호숫가 초가집 앞, 파란 하늘과 흰 구름 사이.
맏제자가 부르는 소리에 제원 도사가 아래로 내려왔다. 이장수와 남령아는 곧장 다가가 사부님의 진로를 막았다.
이런 상황에 문득 지난번 단방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떠오른 제원은 엉겁결에 뒷걸음질 치고는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두 제자를 쳐다보았다.
“너희 둘,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냐?”
“사부님, 염려 마십시오. 이번에는 절대 사부님을 기절시키지 않을 겁니다.”
이장수는 온화하고 겸손하게 미소 지었다. 남령아도 옆에서 거들었다.
“사부님, 사백은 그간 소식 한번 전하지 않다가 요 몇 달 사이에 뜬금없이 두 번이나 서신을 보낸 것도 모자라 만나자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너무······ 갑작스럽지 않으세요?”
제원 도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 사백은 그해 내가 글러서 화가 났었던 것뿐이다.”
이장수가 황급히 말했다.
“사부님, 사내는 ‘글렀다’는 말을 절대 하면 안 됩니다.”
제원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옆에 있던 령아는 사형을 흘끔 하며 의미심장하게 웃고는······ 수줍어했다.
“사부님, 사백 또한 소경봉 맥인데, 사부님을 뵙고자 한다면서 어찌 문으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해 나가실 땐 선인이 되기 전이었으며 바깥에서 유력하는 사조를 찾기 위함이라고 이유를 댔었습니다. 그러나 천 년 가까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문규에 따라 사문을 배반한 것으로 여겨졌지요. 사부님, 경솔하게 사백을 찾으러 가셨다가 나중에 문에는 무어라 말씀하실 겁니까? 문파 장로께서 물으시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제원 도사는 미간을 구기고 생각에 잠겼다. 불자를 쥔 손으로 뒷짐을 지고 호숫가 잔디 위를 왔다 갔다 서성였다.
령아는 남몰래 엄지를 치켜들었고, 이장수는 그저 시선을 늘어뜨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끔 일을 너무 복잡하고 지나치게 멀리까지 생각하는 고질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나 생각을 많이 하는 건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더군다나 사부님의 일은 이래저래 미심쩍었다.
조금 전에 사부님을 기절시키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말로 설득이 안 되면 미진 같은 수단을 쓸 생각이다. 어차피 약속을 저버린 것도 아니니 말이다.
계속 이치를 들어가며 사부님을 설득시키려던 찰나 사부님이 탄식하며 말했다.
“너희 사백은 그해 그냥 나가버린 터라 이미 제명되었다.”
제원은 이장수를 쳐다보며 약간 입을 떼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끝내 물었다.
“장수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이장수는 전음으로 말했다.
“사부님, 서신을 고쳐 쓴 다음 약속 장소를 말씀해주시면 제가 종이 인형을 이용해 대신 서신을 전달하겠습니다. 전에 밖에 나가서 약초를 사러 갔을 때처럼요. 어쨌거나 저희 입장에서만 이 일을 대할 수가 없으니 사백에게 문으로 돌아와 잘못을 인정하라고 설득하세요. 문규가 엄하긴 해도 처벌은 그리 심하지는 않잖습니까. 끽해야 두문불출하고 천 년간 반성하는 것이겠지요. 어떠세요?”
제원은 말이 없었으나 이미 마음은 움직였다. 이장수는 령아에게 전음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고 두 사람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며 작당 모의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원 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에게 설득당한 셈이었다. 도사는 얼른 방으로 돌아가 전서 옥패로 서신을 한 통 썼다. 반복해서 수정하고 말을 고르느라 두 시진을 열심히 끄적인 후에야 전서 옥패를 이장수에게 건넸다.
“몰래 훔쳐보지 말거라!”
이장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쓰실 때 이미 다 봤습니다.”
“이놈이!”
“농입니다, 농. 고정하세요.”
“내 너희 두 녀석 때문에 화가 나서 조만간 심마에 걸릴 지경이다!”
제원 도사는 약속 장소도 말해주었다. 남주 동해지빈에 ‘임동(臨東)’이라는 속세 도읍이었고, 두 달 후, 도읍의 동쪽 시내에서 석양 후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장수는 사부님께 종이 인형이 다녀올 동안 방에서 수행하고 초가집 외곽의 진법을 더하여 외부 정찰을 차단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사형, 어떻게 하시려고요?”
령아는 슬그머니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이장수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동안 함부로 나돌아다니지 말라고만 했다.
“나도 이 두 달 동안 단방에 가지 않고 초가집에서 수행하겠다.”
이장수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했다.
령아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럼 제가 종이 인형을 산문 밖으로 보내는 건가요?”
“아니.”
이장수는 사매를 쳐다보며 웃었다.
“과정을 제법 잘 아는구나. 마음 놓고 수행해. 네가 천겁을 보내고 이런 상황이 생기거든 더 참여하게 해주마.”
“예! 걱정 마세요, 열심히 할게요!”
령아는 의욕 넘치게 대답했다.
이장수가 초가집으로 돌아가 수행하자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이마를 부여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제 사형에게 법보로 쓰이고 싶으면 선인 경지부터 시작해야 한다니······.
사숙은 정말!
사형의 크기 기준을 다르게 만든 것도 모자라 ‘법보 인간’의 문턱까지 높여버렸잖아!
속으로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고 있을 때, 별안간 공중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령아야—”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자 검은 인영이 극히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령아는 무의식중에 옥병 두 개를 쥐었다가 이내 사형이 곁에 있으니 외부인이 소경봉을 습격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전광석화 간에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이 사람은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늘까지 닿을 상대의 죄악만 봐도, 마음속으로 한참 원망 중이던 사숙이 왕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령아는 옥병을 거두고 착실하게 온몸으로 주구를 받아냈다. 주구에게 안긴 채로 그 자리에서 몇 바퀴를 돌고 난 뒤 두 사람은 초가집 앞에서 한바탕 웃고 떠들어댔다.
“사숙, 숨 막혀요······.”
“하하하. 너를 향한 내 애정을 한껏 느껴보아라! 우리 령아!”
“제, 제가 잘못했어요. 하하하! 간지럽히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대도요······.”
이웃한 초가집, 이장수는 이를 보고 슬며시 미소를 드리웠다. 그러면서도 내심 령아의 수행이 염려되었다.
매일 사숙과 이렇게 떠들고 놀면, 자연히 수행은 지체될 수밖에 없을 터.
조만간 일깨워줘야겠어.
이윽고 사숙의 공세를 이기지 못한 령아는 화근을 옮기고자 사형에게 도움을 청했다······.
주구는 순간 눈이 밝아졌다.
“엥? 장수가 폐관을 끝냈느냐? 그럼 불러서 같이 신과의 전쟁을 하자꾸나! 녀석을 못 본 지 반년이 다 돼간다!”
이장수는 마지못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느릿느릿 초가집을 빠져나왔다.
방석을 채 데우지도 못했는데.
······
령아의 초가집이 금세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이장수는 술 두 단지를 꺼냈고, 령아는 전에 사숙에게 만들어줬던 다과를 꺼냈다. 세 사람은 이장수가 만든 종이 패를 들고 한참 난리가 났다.
“진선 한 쌍!”
“훗! 천선 한 쌍이요!”
“이번 판에 저희 둘은 소선이고, 사형이 대신입니다! 사숙, 저를 왜 누르세요!”
“어······. 순간 손이 근질거려서 나도 모르게 그만. 하하.”
이장수는 담담하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냥 패배를 인정하시지요. 금선 두 장이 손에 있는데, 둘 다 판을 뒤집을 수나 있겠습니까?”
령아가 바로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금선은 제 손에 있거······. 젠장, 속았어!”
주구는 발을 껴안은 채 한참 크게 웃었고 웃느라 꼴딱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감히 내게 빈정댄 거냐······.”
바로 이때, 문밖에 한 도사가 어른거리며 다가왔다.
바로 ‘제원’이었다.
“사부님!”
“제원 사형!”
세 사람이 막 일어서려고 하자 ‘제원’은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손을 들고 저지했다.
“계속 놀아라. 장수, 령아는 주구 사매를 잘 모셔라. 나는 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오마.”
남령아는 순간 눈을 깜빡였고 이장수는 벌써 일어서서 읍하였다.
‘제원’은 손을 흔들고 허허 웃으며 구름을 몰아 산문 쪽으로 날아갔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남령아는 이장수를 보며 눈을 깜짝거렸고, 이장수는 픽 웃으며 두 사람에게 게임이나 계속하자고 말했다.
주구는 바로 의기양양해졌다.
“들었냐? 너희 사부님이 나를 잘 모시라고 했다! 자, 좋은 술과 안주로 대접하고, 패 놀이를 할 때도 양보를 하려무나!”
사문 남매는 웃으며 계속 주구와 놀이를 이어나갔다.
이장수는 마음을 둘로 나누고 있음에도 연전연승하는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조금 전 제원 도사는 이장수의 종이 도인이 변장한 것이었고 미리 사부님의 동의도 얻었다.
이전에 연속으로 종이 도인 여러 개를 조작해보았던 터라 이번에 마음을 두 개로 나누는 건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본체는 여기서 사숙과 함께 게임을 하면서 수다를 떨었고, 저쪽은 이미 산문을 빠져나가 구름을 몰고 남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이장수는 사부님 모습을 한 종이 도인이 지닌 측감석에 빛이 가물거리는 걸 발견했다. 한줄기 선식이 계속 종이 도인을 탐색하고 있었다.
이장수는 티를 내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날아갔다. 종이 도인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해졌다. 감개에 어린 것 같기도, 다급한 것 같기도 했고, 또 보고 싶지만 감히 보지 못하는 두려움도 섞여 있는 듯했다. 그야말로 사부님보다······ 더 사부님 같았다······.
그 선식은 줄곧 사백여 리를 쫓아 나왔다가 점점 미약해졌다. 몰래 살피는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형세로 추단하건대 진선경 중기일 가능성이 있었다.
일전에 추측했던 것과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이 또한 추측일 뿐이고, 얻은 정보가 너무 적었기에 이장수는 이것으로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사부의 탁선 기식은 사실 흉내 내기가 어려웠다. 특히 그 탁한 기운 말이다.
이장수는 ‘나쁜 생각’을 하고 사부님이 종종 제자를 벌할 때 쓰는 불자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종이 도인 자체의 기식 절반을 거두어서 진짜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불자는 돌아갈 준비를 할 때, ‘털’보다 훨씬 부드러운 것으로 바꿔드려야지······.
산에서 천 리를 지나 남주에 이르렀다.
새와 구름이 함께 노닐면서 내게 번뇌가 많다고 비웃는구나.
사부님 모습을 한 종이 도인은 공중으로 올라갔고 이장수의 선식이 동쪽 삼백 리 너머에서 도선문 선인들이 있는 구름 한 점을 발견했다.
바깥에서 일 처리를 하고 돌아오는 주오와 주시, 그리고 다른 문파 집사 두 명이었다.
주오도 ‘제원’을 발견했다.
키 작은 도인은 다소 우려 섞인 얼굴로 옆에 있는 주시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세 사람을 먼저 산문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구름을 몰아 방향을 틀고 이곳으로 쫓아왔다.
그러나 주오는 바로 다가오지 않고 대범하게 삼백 리 너머에서 따라오며 선식으로 ‘제원’을 고정하고 제원이 무엇을 하러 가는지 볼 참이었다.
이장수: ······.
사백은 사부님을 첩자로 여기기라도 하는 건가.
나는 현재 사부님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다. 사부님의 선식 정찰 범위에선 주오 사백을 발견할 수 없다. 하여 이장수는 잠시 고민했다가 무시하고 사백이 따라오게 내버려 두었다.
주구 사숙과 수다를 떨고 게임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종이 도인을 조종해 구름을 몰고 남주로 천천히 날아갔다.
주오는 의외로 인내심이 강했다. 줄곧 삼백 리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따금 아래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식으로 보름을 따라왔다······.
이장수는 심지어 주오 사백이 사부님의 연적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하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주오와는 우연히 마주친 것이었고 사부님과 전혀 교집합이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몇 번 만났었을 때도 이상한 낌새가 전혀 없었다.
이렇게 가고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제원’은 한 달 반을 앞당겨 사저와 약속한 장소, 동해지빈 남주 동북 지역에 위치한 임동성에 도착했다.
흔히 볼 수 있는 행각 도사로 변한 종이 도인은 불자를 들고 미간을 찡그린 채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성 밖에서 멈춘 주오는 그곳에서 서서 한참 머리를 긁적였다. 사제의 행방이 퍽 미심쩍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설마, 지난번 문파의 대겁과 관련이 있는 건가? 장수 사질의 사부라서 모른 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속으로 이런 생각이 일기가 무섭게 선식이 조금 전 도읍으로 들어간 ‘제원 사제’가 도포를 입은 도사를 만나 무어라 중얼거리는 모습을 포착했다.
“뭔가 있어. 역시 뭔가 있단 말이지.”
주오는 바로 기식을 감추고 도읍으로 몰래 들어갔다. 자세히 조사해볼 참이었다.
물론 키 작은 도인은 오해하고 있었다. 조금 전 이장수의 종이 도인이 도읍으로 들어갔을 때, 도포 차림의 화신경 도사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던 건 ‘환강우’의 일이 아니었다.
단정한 얼굴에 기식도 평온한 도사는 다가오기 전에 먼저 공수로 예를 갖춘 다음 이렇게 말했다.
“도우, 혹시 남해 해신교라고 들어보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