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 월로전.
동목공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눈앞의 동목공을 보며 월하노인은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다소 난처해했다.
“그건······ 음······.”
두 사람은 월로전 별전의 응접실에 앉아있었고, 동목공은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월하노인은 이런 자세가 아주 눈에 익었다. 보통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나 다른 이에게 알리고 싶지 않을 때, 무의식중에 이런 자세를 취하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동목공이 자루를 건네는 동작과 말할 때 살짝 비끼는 눈빛이라던가······ 더할 나위 없이 익숙했다.
하지만 오늘 동목공이 제기한 요구사항은 실로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 상당히 난감했다.
단순히 홍실을 끌어달라는 요청이었다면, 동목공의 신분, 지위, 자격과 이력 등을 놓고 봤을 때 월하노인은 회피하지 못하고, 공덕이 깎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한데······.
“월로, 분명하게 말씀해주시겠소?”
낮은 목소리로 묻는 동목공의 눈에는 유감이 깃들어 있었다.
“동목공.”
월하노인은 공수하고 사뭇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홍실을 끌어줄 수는 있습니다. 홍실 두 개가 본디 서로 가깝고 서로 그렇고 그런 뜻이 있기에 연결해주는 거지요. 반대로 홍실을 끊어준 적도 있습니다. 그때는 양쪽의 흙 인형이 서로 다투고 그 홍실을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기에 시원하게 잘라준 겁니다. 하나 소선, 절대 인연 흙 인형을 전부 깨끗하게 잘라낼 수는 없습니다. 천살고성(天煞孤星)의 명격으로 필시 엄청난 인과가 생길 겁니다!”
월하노인의 진심을 들은 동목공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때, 마음속에서 그 ‘노선생’이 한 말이 떠올랐다.
‘만일 첫 번째 길이 통하지 않는다면, 반대로 좋은 짝을 골라 일찌감치 혼인하십시오. 그런 다음 핑곗거리를 찾아 폐하께 편액 같은 걸 부탁하세요. 동목공과 부인의 좋은 인연을 축하해달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 앞에서 부인과 애정을 많이 과시하면 의심을 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동목공은 계책을 내준 ‘노선생’이 사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하다는 걸 자연히 모르고 있었다.
동목공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월로, 내 인연을 볼 수 있겠습니까? 워낙 관련 범위가 큰일이라 월로가 조금이나마 힘을 보탠다면, 추후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월하노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동목공의 말씀을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쪽으로 드시지요.”
월하노인은 동목공을 데리고 후전으로 가서 그의 인연 흙 인형 및 동목공과 인연을 이룬 흙 인형을 불러왔다.
동목공은 곧바로 눈앞이 밝아졌다. 자신의 흙 인형 주위에 흙 인형 네댓이 떠 있었는데, 인연 흙 인형들의 홍실이 모두 자신의 흙 인형을 향해 뻗어 있었다.
“제가 평소에 이리 걱정을 시켰군요.”
“동목공은 폐하의 신임을 얻고 있고, 남선들의······.”
“그런 말 마세요!”
월하노인이 아첨하는 말을 끊은 동목공은 잠시 고민했다가 자신을 향해 홍실을 뻗은 흙 인형들을 자세히 들추어보았다. 생각이 영민하면 운이 트이고, 때가 되면 좋은 운이 들어온다고 하던가. 동목공의 마음속에 한줄기 영광이 확 스쳤다.
며칠 전, 폐하와 함께 남해 해신과 처음 만났을 때 남해 해신이 폐하께 열두 가지 간언을 바쳤었다. 마지막 간언은 ‘평범함이라는 색을 빌려 안정을 추구한다.’라는 구절이었다.
동목공은 생각에 잠겼다.
평범함이라는 색을 빌린다는 건 나를 최대한 평범하게 보여서 다른 사람의 경계를 사지 않는 것. 안정을 추구한다. 안정을 추구한다라······.
“월로!”
동목공은 고개를 확 쳐들었다. 순간 눈에 빛이 번뜩이더니 오른손으로 월하노인의 팔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란 월하노인은 목소리마저 변했다.
“동목공, 어, 어찌하고 싶으십니까?”
동목공은 왼손을 내밀어 다섯 손가락으로 천천히 긋고는 손바닥을 말아 주먹을 쥐었다.
“전부 원합니다!”
월하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어찌 이러시는 걸까? 혼인의 인연을 묻히지 않고 독신으로 만들어달랄 땐 언제고 지금은······.
과연 고수로군!
동목공은 직위가 높고 권세가 무거운 데 반해 월하노인은 변변찮은 신선이라 감히 무어라 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월하노인이 방금 불러온 인연 흙 인형들은 실로 동목공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동목공이 경지가 높고 깊은지라 본인이 이런 생각이 없어서 흙 인형 홍실도 연결되지 못했을 뿐.
“아······ 예예,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월하노인은 조용히 대답하고 즉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도선문, 소경봉.
이제 3분의 1을 개축한 영수 우리 옆.
세 미녀 연기사들은 자신들이 계속 놀면서 일하면 10년, 20년이 지나도 완성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그리하여 령아와 유금현아는 논의 끝에 사숙이 술에 취하도록 열심히 권한 다음 둘이서 작업하기로 했다.
효율이 순식간에 10배 이상은 올라갔다!
석 달 만에 3분의 1을 완성했다!
요 며칠 유금현아는 사부님의 재촉을 받아 돌아가서 몇 달 수행해야만 했고, 령아도 영수 우리 곳곳에서 홀로 바쁘게 움직였다.
온자경은 아직 1,600번이나 더 써야 했고, 영수 우리는 최소 반년은 더 작업해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령아는 유유히 한숨을 내쉬고 치맛자락을 쥔 채 수령식 옥개구리가 있는 연못 옆 잔디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정말이지······.
속히 사형의 심리 방어선을 열고 사형에게 조금이라도 남녀 방면의 생각을 심어줘야겠다는 생각만 아니었다면, 굳이 사숙과 유금 사저와 같이 애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사형의 성가신 성정이란,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령아야.”
옆에서 별안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령아는 엉겁결에 벌떡 일어서서 사형을 노려봤다.
“사형! 어찌 이제는 걷을 때 기척도 안 내는 겁니까!”
“원래 이렇게 걸었잖니?”
이장수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너는 예서 넋을 놓고, 긴장을 전부 놓고 있다가 적이라도 기습해오면 어쩌려고 그러냐?”
령아는 혀끝을 날름 내밀었다가 울분에 차서 말했다.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렇잖아요······. 게다가 사형이 계속 이곳에 있는데, 누가 기습할 수가 있겠어요.”
이장수는 구겼던 미간을 살짝 느슨하게 풀었고 눈빛에도 엄격함이 잦아들었다.
“이따가 나 좀 도와주고 수행하러 가려무나. 영수 우리 일은 주구 사숙에게 하라고 할 테니.”
령아는 곧바로 입술을 앙다물고 빙그레 웃었다.
“네에······. 어떻게 도우면 될까요?”
“따라오너라.”
이장수는 령아와 함께 옆에 있는 누각으로 갔다. 이 누각은 퍽 공을 들여 지어졌다. 재료를 쓰고 색을 칠할 때 모두 고급 재료를 선택했는데, 이장수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곳의 장식은 모두 유금현아가 직접 했다.
과연, 속세 공주 출신인지라 게임방을 만드는데도 황실의 품격이 스미는군! 마치 황실의 도박장 같구나!
이장수는 소매에서 인물 초상화 한 폭을 꺼냈다.
그림 속에 영준하고 잘생긴 사내는 이장수가 종이 도인에게 해준 ‘고정 분장’이었다. 그는 몰래 이 초상화를 걸어두고 초상화 뒤에 향낭을 놓은 후 령아에게 영식으로 초상화를 살펴보라고 했다.
잠시 후, 이장수가 물었다.
“어떠냐?”
“뭐가 어떤데요?”
령아는 힘없이 눈을 깜빡였다.
“마음속에 화면들이 떠오르지 않았어?”
“예?”
령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초상화는 그냥 초상화잖아요. 무슨······ 화면이 떠올라야 하나요?”
이장수는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계속 살펴보아라.”
“예.”
령아는 고분고분 대답하고는 아예 양반다리로 앉아서 영식으로 계속 초상화를 살펴보기로 했다.
이장수가 세세히 감응해보았으나 령아는 실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이장수는 초상화를 거두고 향낭을 손으로 가져온 다음 향낭의 봉인을 풀어 안에 있는 단약을 봉하려고 했다.
바로 이때, 령아가 온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가볍게 기식을 토해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형······.”
이장수는 순식간에 향낭을 봉하고 청심단 한 알을 꺼내 그대로 약 기운을 녹이고 그 속에 있는 약성을 안개와 섞어서 령아의 콧속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령아는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뒤늦게 겁먹은 눈초리로 이장수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다시 점점 벌게지더니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사형, 조금 전에 무얼 하신 거예요? 만약······ 만약에······ 드디어 그런 생각이 드셨다면, 이런 수단을 쓰지 않아도······ 신호만 주면 돼요······.”
이장수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얌전히 수행해라. 허튼 생각하지 말고. 이번에 사부님께 쓸 단약을 시험해본 것뿐이다.”
이어서 이장수는 의심이 그득한 얼굴을 한 채 자리를 떴다.
이 단약은 누군가에게 마음이 있는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 건가?
전에 주오 사백이 웅심단을 가지러 오셨을 때, 사백에게 미녀의 초상화를 보라고 했었다. 그때도 뒷면에 이 단약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주오 사백은······.
약성이 안정적이지 않은 건가, 아니면 주오 사백 자체가······.
쓰읍.
야단났다, 야단났어.
“사형!”
령아가 누각 밖으로 쫓아 나와 문틀을 붙잡고 불렀다.
“제가 그 물건을 지니고 있을 테니 사형이 ‘영’식으로 해보는 건 어떠세요? 직접 체험해봐야 효과를 알 수 있잖아요~”
걸음을 우뚝 멈춘 이장수는 손을 휘휘 젓고는 구름을 몰아 단방으로 날아갔다.
“흥! 못하는 거잖아요. 온, 온, 온밖에 모르지!”
령아는 콧방귀를 뀌면서 사형을 흘겨보고는 사뿐한 걸음으로 누각 안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장수는 조금 전 만들어낸 두 가지 단약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부단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선식 독단. 이건 만림균 장로의 최초 시도였고, 이장수는 그저 거목의 건장한 가지 위에 서서 곁가지 하나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는 이미 두 종류의 선식단을 만들어냈고 두둑하게 번 약초 보물을 대량으로 소모했다. 하지만 효과는 똑똑히 보였으니 비장의 패 창고는 다시금 소소하게 확충된 셈이었다.
이장수는 단약들을 직접 정리하고, 정통 선식 역정찰 단약의 이름을 ‘반사단(反査丹)’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이 없는 보단(寶丹)이었다.
반사단이 유출되면, 내게 돌아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반사단을 패용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선식으로 나를 살핀다면, 나를 살피는 사람 몸 주위에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약한 영무(靈霧)가 나타난다.
영무는 이장수 대신 그를 살피는 사람을 붙잡는다.
두 번째 선식단은 ‘심화소(心火燒)’라 이름 지었다.
매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정석과 정주(情酒)를 밑바탕으로 쓰고 몇 달 동안 수백 번을 시도한 끝에 한 번 우연히 ‘정확한’ 처방전을 찾아냈다.
만림균 장로의 선식 독단은 선식으로 정찰하는 자의 원신을 ‘푸른 결정 가시벌레’로 찌르는 특수한 독소였다.
이장수가 고안한 ‘심화소’는 ‘푸른 결정 가시벌레’를 ‘정고’로 바꾸고 매술을 약간 차용했다.
겸사겸사 언급하자면, 이장수는 매술을 연구하려고 특별히 사부님의 윤허를 받아 사부님의 모습을 하고서 지맥 대진에 갇혀 있는 진선경 여우 요괴를 몰래 찾아갔었다.
그는 몇 번의 관찰과 분석을 하고, 교묘하게 여우 요괴와 소경봉의 인과를 풀어냈다.
그 과정이란······.
중요하지 않다. 상대는 어쨌거나 대도 맹세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두 달 동안 ‘심화소’의 약성을 조정했다.
이장수는 종이 도인 하나, ‘심화소’ 한 알, ‘반사단’ 한 알을 특수 처리한 향낭 속에 넣었다. 이제 조금 이따가 사부님이 향낭을 몸에 지니고 곳곳을 돌아다니기만 하면 된다.
예컨대 선식 정찰을 만나면 이장수는 종이 도인을 통해 상대가 어떤지 판단하고 괜찮다 싶으면 심화소의 금제를 열 것이다.
사백의 환생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여자 연기사의 인연으로 사부님의 기운을 북돋을 수 있을 것이다.
제자로서 사부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이장수는 향낭을 정리하고 구름을 몰아 사부님의 초가집으로 갔다.
영수 우리 부근이 다시 바빠졌고 이전보다 훨씬 진지해진 세 미녀를 보며 이장수는 절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다만, 미처 초가집에 이르기도 전에 마음속에 느닷없이 들뜨는 감정이 찾아왔다. 손가락을 짚어 추산하니 동목공이 또 해신 사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는 지금······ 그러니까······ 흐음. 사당이 6,692개나 있는데, 어째서 동목공은 늘 거기로 가는 걸까? 조금 더 은밀한 다른 사당으로 가면 안 되는 건가?
양털을 훔치는데, 양 한 마리만 신경 쓰면 조만간 발각되고 마는 법이다.
이장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동목공에게 다음번에는 잊지 말고 종적을 감추라고 일깨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구름 위에서 모퉁이를 돌아 자신의 초가집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마음을 셋으로 나누어 일단 종이 도인의 눈을 빌려 북주에서 독충을 찾는 만림균 어르신을 관찰했다. 장로님이 만사 무탈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해신 사당 지하에 있는 종이 도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