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생각났다······.
홍황이 조각나기 전, 동쪽 하늘 변경에 있는 황량한 산에서 이제 막 수행의 성과를 얻었던 그는 석양 아래에서 즐거이 뛰어놀았다. 그건 이미 흘러가 버린 그의 청춘이었다.
여동생들과의 첫 만남은 그녀들이 흉수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받을 때였다. 본디 미인을 구한 영웅이 되리라 여겼는데······ 오라버니가 되어버렸다.
‘도우가 우리 세 자매를 보살펴주신 덕에 오늘 각자 자신의 도를 깨달았습니다. 도우께서 마다치 않으신다면 오라버니로 모셔도 될는지요?’
스승님과의 첫 만남은 스승님이 섬에서 설교하실 때였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상대의 도가 그저 그렇다고 여기고 논도하다가······ 된통 얻어맞았다.
‘하하하. 승복하거라! 하하하, 깨달음이 괜찮은 듯한데, 내 제자가 되어보겠느냐? 음. 도행이 이미 생겼으니 외문 제자로 거두마! 어떠냐? 생각해볼 테냐? 이 세상에 나를 이길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세월은 아득하고 천지는 창망하구나.
제일 처음 영지가 생기고 장생을 갈망하고 천지에 인정받고자 했던 갈구를, 벌써 잊어버린 것인가?
‘아, 이게 내 초심이로구나······.’
정원 안에서 조공명은 가만히 서서 유유한 세월을 꿰뚫어 보면서 탁한 눈물이 저도 모르는 사이 눈가를 타고 서서히 미끄러졌다. 온몸에 기운이 감돌고 표정도 한결 개운해졌다.
벌써 이 정도 경지가 되었는데도······ 또 소소하게 작은 걸음을 돌파하다니.
이장수는 옆에서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의 ‘초심 기술’이 대능에겐 이렇게나 유용하단 말인가?
바로 그때, 옆에 있던 운소도 하늘 끄트머리의 구름을 응시하며 슬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몸 주위도 한 줄기 기운이 천천히 에워쌌다.
오라버니의 초심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 또한 느끼는 게 있었는지 도심 경지가 소소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
다음번에 대능에게 말할 때는 미리 가격을 명시할까나?
“해신.”
조공명은 뒤돌아 이장수를 쳐다보며 허리를 푹 숙여 읍했다.
“깨달았소.”
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운소 선자는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노신선 얼굴의 종이 도인을 응시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깨워주어 고맙습니다, 도우. 오늘의 은혜는 우리 남매가 천천히 보답하겠어요. 경소, 벽소. 남해 해신 도우가 인정을 베풀어주신 덕에 이번에는 큰 벌을 주지 않으마. 9천 년만 금족령을 내리겠다.”
벽소는 고개를 돌려 맥없이 말했다.
“언니, 나랑은 상관없지 않나요······?”
“그럼 왜 꿇어 앉아있어?”
운소는 큰언니의 위엄을 내보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마음에 켕긴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벽소는 유유히 한숨을 쉬며 경소와 똑같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이장수는 온화하게 웃으며 최대한 속을 헤아릴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는 없으나 효과는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그럼 ‘초심’이라는 두 글자를 언어 비장의 패 창고에 수록해볼까나.
이장수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질 않아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공명 도우, 앞으로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이런 일을 저지르면 안 됩니다. 누차 말하지만, 사람을 공연히 건드리는 일은 어쨌거나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일이고, 도우 같은 도문 고수가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괜히 마음 쓰게 했구나.”
조공명은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 한순간의 즐거움을 탐내고 대도의 원모습을 잊고 있느라 해신을 삼선도로 오게 만들었네. 도우가 아니었다면 도심이 혼란스러워졌고, 향도의 마음을 잃고 스승님의 가르침과 기대를 저버릴 뻔했어.”
“······.”
그렇게 심각하게 말씀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이장수는 그저 조공명과 경소가 또 쥐도 새도 모르게 ‘모기를 놀래주는’ 일을 저지르고 제일 처음 자해공갈 사기 수법을 제시한 사람에게 엄청난 인과를 불러올까 봐 겁이 났을 뿐이었다.
울분을 참는 중인 경소와 벽소를 보니 이번 사태에 후환이 남은 듯했지만, 오늘 나는 정말로 이미 할 만큼 했다.
과유불급이다.
문제는······.
이장수는 바닥에 넙죽 엎어진 함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가를 씰룩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부교주의 ‘전 여친이 될 뻔했던 사람’이 이곳에 있는 걸까?
진선경 연기사가 어찌 언제든지 대라를 압도할 수 있는 두 고수와 함께 섞여 있는 거지?
이는 어떤 복원이고, 어떤 운수란 말인가!
그러나 나도 나름 제법이었다. 아직 금선이 되지 않았으면서 인교 대법사와 한 조를 이루고 성인께서 전송한 스몰 필름도 봤었지 않은가.
설마 함지가 정말로 그 함지선이었고, 조공명과 경소가 자해공갈 사기를 치는데 필요한 인원이라 삼소와 어울리게 되면서 삼선도에 남아서 수행하게 된 것인가?
그럼 내가 지금 몇 마디 해서 함지를 내보낸다면, 삼소의 운명은 그렇게 처참한 상태가 안 되진 않을까?
이장수는 이 생각이 막 솟구쳤을 때, 더 따져보지도 않고 바로 꺼뜨렸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구멍을 파내서 이 생각의 재를 넣고 각인해서 열여덟 겹으로 봉해버렸다.
홍황이라는 땅에서 나 자신을 돌보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데, 쓸데없이 참견하는 건 스스로 죽을 길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물며 우연히 모기 도인에게 자해공갈 사기를 한 번 친 것으로 성인께서 미래의 일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걸 예측하셨고, 이에 즉각 반응을 보인 것뿐이었다.
함지를 아는 건 도선문 제자 이장수지 남해 해신과는 무관했다.
이장수는 속으로 탄식하고는 운소, 조공명, 경소, 벽소에게 읍했다.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더 머물지 않고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운소가 온화하게 말했다.
“좀 더 머물다 가시지 않고요?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았다. 커다란 인과가 가득한 곳이라 최대한 몸을 빼는 것이 묘책이었고, 이에 이장수는 다른 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그럼 내가 해신 도우를 배웅하고 아미산(峨眉山)으로 돌아가 폐관하고 반성하겠다.”
그렇게 조공명과 이장수는 삼소와 작별 인사를 하고 삼선도를 떠났다.
운소는 구름을 몰고 천 리 구름 벽을 나와 오라버니와 해신을 배웅했다.
이장수가 떠나기 전 운소가 전음으로 말했다.
“도우, 이번에 베풀어주신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고 뒷일은 염려하지 마세요. 동생들이 장난이 심하긴 해도 사리에 어둡지는 않습니다. 혹여 도우에게 조금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삼선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장수는 감동이 휘몰아쳤다. 그는 돌아서서 구름 끄트머리에 서 있는 선자를 바라보았다.
정상적인······ 도문의 큰손이로구나!
소탈하고 제멋대로인 대법사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군! 대충 핑계를 대자면 심한 생각이 마구 샘솟았다.
이장수는 운소에게 읍하고 급하게 찾아온 삼선도 여행을 갈무리했다.
운소가 구름 벽 안으로 날아가고 나서야 조공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장수는 조 대인이 얼굴을 바꾸고 저를 책망할까 염려되어 먼저 선수를 쳤다.
“선배님, 저를 곤란하게 하셨습니다.”
조공명은 곧바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장수를 쳐다보며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장수는 ‘쉿’하고 손짓했다. 조 대인은 곧바로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고개를 돌려 삼선도를 쳐다본 다음 종이 도인의 팔을 끌고 구름을 몰아 남섬부주로 길을 재촉했다.
삼선도에서 십만 리 떨어진 곳으로 이르고 나자 조공명은 그제야 안도하며 평소의 용맹한 기질로 되돌아왔다.
이를 지켜보며 이장수는 남몰래 웃었다. 기지를 발휘하여 운소 선자를 찾아온 것인데, 알고 보니 정말로 조공명과 경소의 천적을 찾아낸 것이 아닌가!
“도우, 어째서 누이를 그리 멀리하는 것이오?”
“누이를 어찌 멀리할 수 있겠는가?”
조공명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요~만큼 무서워서 그러네.”
“예? 어찌 무서워하십니까? 도우가 오라버니잖아요.”
조공명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전음으로 말했다.
“운소는 너무 융통성이 없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네. 스승님이 그해 벽유궁에서 설교하실 때 아주 미세한 부분을 애매하게 설명하셨는데, 그때 운소가 시시각각 캐물으면서 스승님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지 뭔가. 좋은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때론 요령이라는 걸 너무 모르고 매사에 고지식해. 게다가 무언갈 하나를 마음먹고 나면 죽어서라도 해내려고 해. 태고 때는 경지가 나보다 한참 덜 미쳤는데, 지금은 일심으로 대도를 추구하니 나보다 높고 다보 사형과 견줄 정도이니. 굉장하지!”
이장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하더니 운소 같이 진지한 성정은 확실히 무시무시하긴 하다.
조공명은 어투를 바꾸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조금 전에 내가 도우를 곤란하게 했다고 했는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전에 도우께서 건드린 사람이 엄청난 인과를 끌어냈어요. 저도 거기에 깊이 빠져서 스스로 빠져나오기가 힘들어진 듯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는 우리 인교와 연관된 일인지라 설명하기는 어려우니 양해해주십시오.”
조공명은 미안한 얼굴을 하더니 두 주먹을 말아쥐고 이장수에게 허리를 숙였다.
“미안하네. 도우가 이리 연루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이장수도 얼른 화답했다.
“도우는 선배님입니다. 이러지 마세요.”
조공명은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네. 우리는 항렬을 따지지 않고 벗이 되기로 한 것인데, 어째 선배 후배를 논한단 말인가? 날 부끄럽게 만들지 말게! 우리는 마음이 잘 맞아서 지기를 맺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냐! 도우가 나를 이리 서먹하게 대한다면 삼선도로 돌아가서 누이들이 보는 앞에서 정식으로 친우를 맺는 건 어떤가?”
“······.”
어떻긴 뭐가 어떱니까!
실례가 많았소, 이만. 최대한 서로 잊고 지냅시다!
훗날의 재신 나리는 정말로 어리석은 걸까, 아니면 일부러 나한테 보복하려는 걸까?
기어코 구렁텅이에 빠뜨려서 함께 처참하게 죽고 봉신방에 이름을 올리려는 생각인 건가?
특히 오늘 삼소 자매의 수단과 성정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흥분하고 나면 성인께 덤빌 수 있는 악독한 인물이었다!
운소는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단순히 마음에 드는 것뿐, 지금은 삼선도와 조공명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면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다.
이장수가 한숨을 토해냈다.
“도우, 나 또한 도우와 항렬을 무시하고 벗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 운소 선자가 한 말도 맞지요. 예의를 지키고 항렬 또한 지켜야 하오.”
조공명은 곧바로 눈을 끔뻑거렸다.
“운소가 그리 말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조공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애써 웃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해신이라 부를 테니, 해신은 나를 선배나 도우라 부르게. 앞으로 운소 앞에서는 나를 선배라 부르면 된다.”
이장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운소 선자가 조공명에게 대체 무얼 한 걸까?
조 대인이 이토록 따르는 모습을 보니 실로 흥미롭긴 했다.
······
조공명은 이장수의 화신을 해신 사당으로 배웅하고 나서야 구름을 몰아 중신주로 향했다.
떠나기 전에 이장수에게 중신주 동남부 아미산 나부동(羅浮洞)에 있는 자신의 선부를 일러주면서 시간이 날 때 와서 놀다 가라고 말했다.
아미산은 홍황 속 동천복지로 조공명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수가 그곳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이장수가 지난 생에 들었던 아미산과 같은 장소는 아니었다.
조공명이 구름을 몰고 멀어지는 모습을 눈으로 배웅하며 이장수도 탄식했다.
삼선도 여정으로 경소와 벽소가 그에게 약간의 불만을 품게 되었지만, 조공명, 경소, 함지 삼인조가 바깥에서 아무렇게나 자해공갈 사기를 치고 다니면서 만들어내는 후환에 비한다면 자매의 불만은 큰일도 아니었다.
선생님께 몰래 고자질하면 기껏해야 한 대 얻어맞지, 죽기 직전까지 맞지는 않지 않던가!
어느 날 경소와 벽소가 찾아오면 종이 도인을 재로 날려버리면 그만이다.
이장수는 종이 도인을 땅 밑으로 복귀시키고 정신의 절반 이상을 본체로 가져와 도선문 선박 구석에 앉아서 돌아갈 때까지 남은 거리를 계산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일단 정리하고 반성한 다음에 경험을 흡수하여 교훈으로 삼았다.
이제 난 조공명, 삼소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얽히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
조 대인의 약점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함지의 일을 생각하니 이장수는 한참을 세상의 기묘함으로 감개에 젖었다.
어쩌면 함지와 삼소는 본디 어둠 속에서 인연이 있었으나 이번 일로 미리 서로 알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공명, 삼소······.
부드럽고 단정하나 고지식한 운소, 똑똑하고 교활하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경소, 톡톡 튀는 막가파 벽소.
조공명은 뜻밖에도 ‘누이를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인과와 앞으로의 일을 내던지고 나니 한결 즐거워졌다.
사실 그는 경지가 높고 깊어진 후에는 마음가짐에도 변화가 생겨서 인간으로서의 즐거움이 줄어들고 도성만 남게 되는 건 아닐까 염려해왔었다.
그런데 몇 가지 생생한 예시들을 보니 그런 부분의 걱정이 사라졌다.
실력은 실력이고, 성격은 성격이었다.
피가 있고 살이 있고 정이 있고 본성이 있으면서 장생해야 행복이지, 도의 허수아비로만 산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조공명은 성격이 판이한 세 동생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장수는 그가 부럽지는 않았다. 그에게도 사매가 하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돌아갈 때 볼 필요가 무어 있겠어. 일단 령아가 무얼 하는지 보고 나중에 어떤 상을 줄지를 결정하자.
이장수는 령아 곁에 있는 종이 도인을 가동해 선식으로 령아 주위를 둘러쌌다가 곧바로 당황했다.
려, 령아가······.
수행을 하다니!
약간 실망스러웠다. 하나 약속은 지켜야 하므로 돌아가면 령아에게 전지성인 원판 신통력을 전수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보아하니 영수 우리의 양식 규모를 키워야 할 뿐만 아니라 나무도 많이 심어야 할 듯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