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샘구멍 쪽.
목숨을 내걸고 용감히 돌격해 부딪히고 물어뜯는 흑린 교룡들은 마치 정신이 나간 마귀였다.
임시로 펼친 대진도 곧 버텨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무렵, 옆에서 우렁찬 용울음이 들려왔다.
나이 든 청룡 한 마리가 자신을 둘러싸고 공격하는 수십 개의 검은 인영을 몸으로 떨쳐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만 장 길이로 변한 그는 육중한 용초리로 샘구멍 위편의 흑린 교룡을 절반 가까이 쓸어버렸다!
동해 용왕, 오광이었다!
바로 그때, 건곤 틈새에서 우람한 검은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바닷속에서 빠르게 몸집을 불린 검은 인영은 이내 머리 세 개 달린 검은 교룡으로 변했다. 비대한 몸은 동해 용왕에 뒤지지 않았다. 샘구멍 위편에서 용왕을 밀쳤고 이내 두 용은 해저에서 엉켜서 죽일 듯이 싸웠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몸집이 거대한 흑린 교룡이 샘구멍 위에 나타나더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샘구멍으로 돌진했다!
흑린 교룡의 노호성에서 무수한 세월 동안 쌓아온 불만이 들리는 듯했다.
그들은 용족이 공들여 선발해낸 병과다. 존엄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 용족의 호위이자 진룡의 종이었다. 오만하고 사치스러운 용족 자제는 언제든지 그들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고, 경지가 높고 실력이 강한들 무능한 용족 앞에 무릎 꿇어야만 했다.
심지어 실력이 어느 정도 차원에 이르면 경지가 파기되고, 출산과 번식을 담당하는 종룡(種龍)이 되어 용족에게 무수한 교룡의 용단을 제공했다.
용단(龍蛋), 그들의 자손은 대부분 쓸모없는 폐기물로 전락했고, 자질이 출중한 흑린 교룡은 성년 때 전투를 벌이는 첫 번째 대상이 되어 채찍질 당하고 욕을 먹었다.
꾹 참으며 고통에 빠졌다.
용족의 무기였지만, 그들은 어쨌든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생명이다!
생명이란 말이다!
용왕의 상대가 되지 못한 삼두 교룡은 금방 패전했다. 목덜미가 용왕에게 물리고 말았다!
“오광! 우리 교룡의 손으로 반드시 너희 용족을 끝내주마!”
교룡은 맹렬하게 발버둥 쳤다. 왼쪽 목덜미가 끊어지고 선혈을 흩뿌렸다!
그 틈에 삼두 교룡은 몸을 돌려 샘구멍 웅덩이로 다시금 돌진했다!
용왕이 즉시 달려가 저지하려 했으나 삼두 교룡은 온몸으로 끝없는 혈기를 내뿜었다. 혈기는 적색 창룡으로 응결되어 오광의 숨통을 아주 잠깐 틀어막았다!
시간은 충분했다.
용왕의 눈에 절망이 역력했다!
삼두 교룡의 육중한 몸집이 샘구멍을 향해 급속도로 추락했다!
흑린 교룡들이 까만빛으로 변해 날아왔다. 삼두 교룡 주위를 에워싸고 뒤엉키며 교룡과 합체했고 삽시간에 검은 이무기를 거대한 ‘검은 공’으로 만들어버렸다!
대진은 건드리기만 하면 터지리라!
샘구멍 속에서 용들은 치를 떨었다. 모든 용의 육신에서 터져 나온 강렬한 빛은 마치 거대한 그물을 연결된 듯했다.
만 장 길이의 창룡으로 변한 오광의 노호가 동해를 뒤흔들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거대한 교룡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미처 막지 못했다.
그때였다. 수화 태극도 한 장이 샘구멍 위에 나타나 바닷속에서 빠르게 응결되었다!
이장수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대법사가 오셨어!
한편, 샘구멍 상공에 맞물린 건곤 균열 속에서 검광이 스쳤다. 은빛을 가물거리는 보검 한 자루가 대법사가 응결해낸 수화 태극도를 그대로 베어버렸다!
검광이 스친 곳, 건곤이 다시금 벌어졌다.
검은 건곤을 망가뜨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도대체 어떤 검인지 생각하고 있을 무렵 마음속에서 탑 형님이 흥분에 차서 외쳤다.
“원도검(元屠劍)! 와씨, 원도검이네! 빨리 가서 내 좀 몇 번 때려보라 캐라. 아픔이 뭔지 못 느껴본 지 쫌 됐그든!”
“······.”
속으로 무어라 투덜거리기도 전에 이장수는 둔술을 멈추었다. 어느새 동해 용궁 근처에 이른 것이다. 샘구멍과는 불과 몇만 리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미 반보 늦어버렸다.
흑린 교룡이 만들어낸 거대한 공이 샘구멍의 ‘용 몸통 제방’과 충돌했다!
창룡의 비명과 함께 천지의 색이 변했다. 샘구멍 쪽에서 돌연 끝이 없는 혈광이 나타나고 해류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져 나왔다!
이 순간 홍황 오부주가 다 진동했다.
내가 간들 뭘 할 수 있을까?
이장수는 그곳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몸을 번쩍 스쳤다. 동해 상공에서 나타난 그는 흰 구름이 되어 샘구멍이 있는 곳을 내다보았다.
직경 수천 리에 달하는 물 공이 서서히 만들어졌다. 고공에서 내려다보니 동해는 맑은 샘물이고 샘구멍은 말 그대로 샘물이 나오는 구멍이었다.
바닷물이 샘구멍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도심이 떨리고 이장수의 마음속에 흐릿한 화면이 떠올랐다.
동해 샘구멍이 폭발하고 동해에 인 거대한 파도가 동승신주 전체와 남섬부주 절반을 휩쓸었다. 생명이 도탄에 빠졌다!
‘천도는 관여하지 않는 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의구심을 담은 눈을 했으나 이어서 또 깨달음이 찾아왔다.
오천은 본디 천지를 개벽한 죄업으로 응결되었고, 생명을 향한 천지의 원망이 섞였으니 모든 생명의 인과였다.
용족은 천지 만령(萬靈)의 인과를 대신 감당해야만 과거 홍황을 조각낸 죄업을 상쇄할 수 있었다.
‘이 순간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이장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정말로 조금 전에 보았던 참극이 발생한다면 인간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문 성인이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터. 다시 말하면 샘구멍을 메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설마 용족은 오늘 기필고 대량의 희생을 치러야 하는 건가? 태고 때의 참극을 반복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천정에 충성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을 터. 나는 용족에게 실언을 한 것인가.
그때였다.
“교주 형님······ 샘구멍, 샘구멍이 망가졌습니다.”
도심이 바짝 조여왔다. 이장수는 이내 정신을 반쯤 나누어 오을의 곁에 떨어뜨렸다.
오을을 뒤따르던 수십 마리의 창룡은 지금 바다에 둥둥 떠서 망연자실한 눈을 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몇 가지 화면이 떠올랐다.
청년 도인으로 변한 이장수의 종이 도인이 오을의 곁에 나타났다.
저도 모르게 소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오을의 시뻘건 눈가에서 눈물이 홀연히 떨어졌다.
“형님······.”
오을은 엉겁결에 손을 움켜쥐었고 이장수가 바로 손을 들어 그런 오을의 손바닥을 감쌌다.
“그래.”
”샘구멍이 망가졌습니다.“
오을은 숨 쉬는 것도 버거웠다.
“조금 전에 부왕이 목숨을 걸고 샘구멍을 막으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샘구멍이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고 비늘도 온통 피였어요······. 엄청난 파도가 대지를 집어삼키고 육지의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이 죽고 다쳤습니다. 자소신뢰가 우리 용족을 내리치고 재로 날렸어요. 또 무수한 용족이 샘구멍으로 달려갔으나 샘구멍이 찢어 뜯겼습니다······.”
과연 그러했다.
용족이 목숨으로 메우는 것이 천도의 뜻이었다.
이게 하늘의 뜻이요, 천도였다.
용족이 천정에 귀순했고 천도를 위해 일한다고 한들 여전히 숙명은 바꿀 수가 없었다.
“형님!”
어느새 오을의 눈에서 막막함이 사라졌다. 청수한 얼굴에 눈물을 단 채로 이장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제 손을 감싼 이장수의 손바닥을 풀어내고 뒤로 물러나 읍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오을은 그리 말하고 뒤돌아 우렁찬 용울음을 방출했다. 같은 화면을 보았던 수십 마리의 창룡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다시금 앞으로 돌진했다.
다만······ 오을은 용으로 변하려는 찰나 발아래가 휘청하면서 무력하게 두 눈을 감고 바닷물 속에 누워버렸다.
앞에 있던 창룡들이 확 고개를 돌렸다. 그때 이장수가 앞으로 가 오을을 부축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나 수신을 믿어주시오. 오을의 목숨은 내가 지키고, 오을이 끝까지 지려고 했던 그 책임을 내 화신으로 대신하리다!”
수십 마리의 창룡 주위에 빛이 넘실거리더니 이내 인간의 모습이 되어 이장수에게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들은 일언반구도 없이 다시 창룡으로 변해 전속력으로 샘구멍으로 달려들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동해 용궁에서 날아 나온, 대다수 전투력이 높지 않은 수천 마리의 창룡도 이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동해 각지 싸움터에서도 창룡들이 부상을 신경 쓰지 않고 전투지에서 몸을 빼 샘구멍을 향해 전력을 다해 질주했다.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 같았다. 물론 아주 맑은 정신으로 달려드는 불나방이었다.
그 수를 막론하고 동해로 지원 갈 수 있는 용족은 남해, 북해, 서해 할 것 없이 즉시 동해 샘구멍으로 달려갔다.
이때, 처음부터 싸움을 걸어왔던, 서방교에서 보내온 흉악한 생명들은 당당하게 멀리 흩어졌다.
그들은 도처의 이동진, 건곤 틈을 통해 신속히 동해 샘구멍을 벗어났다. 북해와 남해 격전지의 서방교 고수가 버린 일부 총알받이도 똑같이 신속히 철수했다.
동해 용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해저가 별안간 무너져내리면서 동해 용궁 최대 보물창고가 온데간데없어졌다.
서방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철수한 건가······.”
이장수는 화를 억눌렀다.
역시, 오늘 전투를 배후에서 주도한 자는 진정 악독한 인물이었다.
감상에 젖어봤자 소용없다. 어떻게 용족을 도울 수 있을지나 생각하자.
선식으로 곳곳을 훑었다. 샘구멍의 격류 속에 달려들었다가 순간 밀리고 찢어 발겨진 용족이 보였다.
막을 수 없고 말릴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목숨을 내걸고 앞으로 나아갔다.
용족은 거의 이성을 잃고 실성한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들이 가서 샘구멍을 메우지 않으면 며칠 내로 용족은 멸족하고 말리라!
이장수는 샘구멍 위편의 공중을 바라보았다.
동목공이 천병 수만 명을 이끌고 해수면을 뚫고 나와 고공에 집결해있었다.
기다릴 수 없으니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왼손을 뒤집자 철봉 하나가 이장수의 손에 쥐어졌다. 철봉은 살짝 떨면서 무어라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할 수 있겠어?
성공의 희망을 보지 못했으나 망가지지는 않을 터.
커지고 작아지는 훗날 이 철봉의 특징이 연상되었다. 어쩌면 용족의 한 가닥 생존 기회를 얻어낼지도 몰라!
대도의 수는 50, 쓸 수 있는 수는 49.
그렇다면 이 철봉이 용족이 숨겨둔 1인가?
“목공!”
흰 구름에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이장수의 외침이 주위 만 리에 메아리쳤다!
흰 장포가 춤을 추고 백발이 나부끼는 사이로 머리 위에 현황탑이 드러났다.
왼손에 건곤척을 쥐고 걸음을 내디뎠다. 고공에서 연속으로 몸을 가물거리더니 이내 바닷속 ‘쏟아져 나오는 샘물’로 빠르게 돌진했다.
동목공은 절로 기뻐하며 외쳤다.
“수신, 왔구려!”
목공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이장수는 천 리 너머에 나타났다. 몸을 몇 번 더 번쩍하고는 샘구멍 바로 위에 섰다.
어떻게 하지?
손에 쥔 철봉을 바라보며 낮게 소리쳤다.
“영물이라면 영성을 보여라!”
철봉은 잘게 떨더니 이장수의 지배에서 벗어나 앞에 수직으로 떠올랐다. 갑자기 몸집이 불어나더니 한 자가 되었다.
‘선력.’
마음속에 흐릿하게 글자가 응결되었다. 이장수는 당황하지 않고 손바닥 하나에 철봉을 받치고 선력을 밀어 넣었다. 철봉은 이장수를 위로 날려버릴 정도로 확 팽창했다.
이장수는 현황탑을 머리에 인 채 곧장 철봉 위로 뛰어가 두 발로 섰다. 눈을 감고 체내 선력을 끊임없이 철봉에 주입했다.
길어져라, 길어져라, 길어져라······.
커져라, 커져라, 커져라!
눈 깜짝할 사이에 철봉은 천 장 높이로 변해 아래에서 쏟아져 나오는 샘물을 뚫고 들어갔다!
모자라.
소매를 휘두르자 지이잉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 인형들이 날아 나와 사람 모습으로 변했다. 종이 인형들은 철봉 위에 떠 올라 저장해둔 선력을 철봉에 몽땅 주입했다.
철봉이 팽창하는 속도가 배로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