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형이 실력을 숨김 (395)화 (395/593)

또 반나절이 지났다.

도선문 산문. 흰 구름이 하나둘 남쪽에서 날아왔다.

천병과 천장이 도선문 장문부터 평범한 제자까지 모두 호송하니 확실히 체면이 살았다.

천정이 임의로 산문을 점령하여 매복을 배치한 일, 그리고 산문이 겪은 손실, 즉 십여 개의 산봉이 평지가 된 일에 관하여 도선문은 따져 묻지 않았다.

되레 많은 문인은 남아서 천정 천병을 돕지 않고 도망갔던 일이 실로 인교 체면을 깎았다고 여겼다.

장문의 설명을 비롯해 홍황에 떠도는 ‘확실한 증거’ 덕에 이번 일은 이대로 넘어갔다.

어쨌든 소요선종에 비해 도선문은 상당히 행운이지 않은가.

소요선종은 수백 명이 죽었고 수천 명이 다쳤다.

심지어 사상자 모두 문파 고수였다. 태상장로 십여 명, 장로 수십 명은 요족 고수와 함께 희생했으니 이 빚은 서방교와 요족의 머리에 떨어뜨리고 말 것이다.

이장수도 딱히 무언가 더 할 도리가 없는지라 천정 수신의 신분으로 소요선종에 침통함과 위로를 표했다.

다른 인교 선종, 특히 자재문은 아주 친절하게도 소요선종에 장로가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왔다. 아무래도 두 문파가 수행하는 도는 비슷한 터라 산문을 수호할 장로를 빌려줄 수 있었다.

이번 일을 겪은 후, 중신주 선문들은 스스로 연합을 구성하고 요괴 소탕 시련 대회를 조직하기로 약속했다.

중신주 남북 경계 구역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고 요족 변방 세력은 끊임없이 진압되었다. 두 번의 큰 손해를 입은 요족은 감히 인간족과 싸움을 벌이지 못하고 부단히 세력 범위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천정은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건 정말로 이장수가 꾸민 계략이 아니었다.

천정에서 요족을 제거하는 명령인 제요령(除妖令)를 반포한 것이다.

죄업을 휘감은 요족을 소멸시키는 자는 천도가 주는 공덕 위에 천정에 가서 영석, 단약을 수령하고 요괴를 제거한 공적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정말로 천정에 가서 상을 받는 선인은 거의 없었으나 홍보 효과만큼은 좋았다.

용족상천부터 동해 샘구멍이 파괴되었던 전투, 요승산 전쟁, 인교 선종에 찾아온 전쟁을 치르면서 천정의 명성은 신속하게 치솟았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천정이 지금에 이르러 크게 흥성할 기미를 보이리라는 걸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더구나 천정이 현재 천병을 모집하고 인재를 갈구하는 자세를 취하자 천정을 무시했던 홍황 연기사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장수의 말을 빌리자면, 현재 천정에 올라가면 비상장 주식을 얻지는 못해도 쉽게 핵심 인물로 자리 잡을 수는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경지가 출중한 산선들이 하늘로 올라가 노동하고 공덕을 벌어들일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건 나중의 이야기다.

큰 전쟁을 치른 후 불과 이틀 만에 도선문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기절했던 이들도 차례대로 깨어났다.

사부 제원 도사는 이장수에게 꾸지람했다가 제자가 적잖게 마음을 썼으리라는 걸 고려하여 이내 불자를 들고 천정 보통 권신의 궁둥이를 때리지는 않았다.

되레 주우시가 여러 질문을 해댔다. 당시 상황이 워낙 급하여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 기절시키고 함께 남주로 가서 숨었다는 령아의 변명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지만.

주구는······ 본인이 술에 취했다고 여겼다.

웅영리: “오라버니 말씀이 다 옳아요!”

유금현아는 이번 일을 겪고 큰 자극을 받았는지 이장수에게 수도에 관한 질문 몇 가지를 한 후 백 년 안에 천선경을 돌파하겠다고 선전포고하고는 산으로 돌아가 폐관했다.

그녀는 이장수가 이번에 한 갖가지 안배가 도선문에서 경지가 괜찮은 문인을 천정으로 보내 천장으로 지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걸 눈치챘다.

지난 기수 수석 제자였던 그녀는 가장 좋은 본보기이리라.

이 때문에 유금현아는 상당한 기대를 안았다.

떠나기 아쉬워하는 탑 형님을 보내고 이장수는 다시금 안정감이 사라지고 불안이 찾아왔다.

탑 형님을 잃으니 목숨이 종잇장처럼 얇아지는구나.

탑 형님만 있으면 일당백도 아니고 일당만이 아닌가!

지장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문정 도인과 연락할 길이 없는 터라 계속 긴장과 방비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현재 요족과 서방교의 연합이 깨졌으니 지장은 수중에 사용할 만한 병기가 얼마 없으리라.

나중에 지장이 다시 손을 쓴다면, 소요선종의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대법사께 부탁드려서 영산에 압력을 행사하고 지장의 이름을 불러서 흠씬 두들겨 패달라고 해야겠다.

물론 영산에서 지장을 죽이는 건 난도가 있는 임무였다. 성인의 체면이 엮여있으니 말이다.

보름이 지나니 이번 풍파도 점점 희미해졌다. 다시 한가하고 지루한 수도 일상으로 돌아가려나 싶을 찰나 ‘불청객’이 도선문으로 오고 있었다.

······

구름 위에 큰 배가 떠 있고, 뱃머리에 한 여인이 서서 도선문 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치맛자락 아래에는 새하얀 여우 꼬리가 요리조리 흔들렸다.

‘반드시 내 마음이 그대에게 있다는 걸 알게 할 겁니다. 감옥의 적막함 때문이 아니었어요, 제원 도장.’

······

눈부시게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겹겹의 진법이 보호하는 소경봉은 유난히 태평했다.

한가하게 대숲에 앉아 농도가 적절한 영기를 느끼고 친히 끓인 차를 즐기며 다른 봉에서 나누는 소리와 누각에서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집에 틀어박혀 수행하는 나날이란 이토록 고요하고 편안하군······.

음, 너무 용왕처럼 지낼 순 없으니 어깨를 주무르고 등을 두드리는 건 패스해야지.

인교 제자라면 조금 고생하고 검소하게 지낼 줄 알아야 한다.

대법사는 여전히 짚 더미에서 잠을 청하는데, 그도 단번에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한가해 보이나 사실 이장수의 종이 도인 분신은 남주 곳곳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망가진 사당을 복구하고 재난을 당한 인간들을 위로했다.

이번 전쟁을 치르고 나서 이장수는 백 년 안에 비상사태에 쓸 해신교 호교(護敎) 부대를 조직하기로 마음먹었다.

해신교 세력 범위를 찾아와 문제를 일으키는 자 중 요족이 상당수를 차지하게 될 테니 호교 부대의 주요 전력으로 무족을 초빙하기로 했다. 일단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북주로 가서 사업 협상을 할 생각이다.

결정적인 문제란, 어느 정도 선에서 무족이 했던 선언의 제한을 풀어내는 것이다.

오늘만큼은 청담하고 충실하게 하루를 보낼 줄 알았다.

도선문으로 향하는 큰 배를 선식이 포착할 때까지는 말이다.

뱃머리에 서 있는 아리따운 여우 요괴가 눈에 들어왔다.

아란? 소란이었던가?

저놈의 청구족 여우는 어쩜 단념할 줄을 모르는 거지······.

고민 끝에 누각을 향해 구름을 몰았다.

지난번에 월하노인에게 손을 써달라고 부탁했었다.

동시에 그다지 떳떳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오해로 인해 망상이 생겼다고 여우 요괴를 공격했었다.

이 때문에 약간, 아주 약간의 죄책감이 있었다.

당시 인연전에서 본 바로 여우 요괴의 홍실이 휘감은 건 사부 제원이었다. 하지만 감옥에 있던 여우 요괴 앞에 나타났던 인물은 사부의 외모로 변장한 이장수였다.

여우 요괴가 정말로 당시의 제원을 좋아하게 되었다면 홍실은 이장수를 향해 뻗어야 할 터.

결국 여우 요괴가 좋아한 건 그녀가 생각한 ‘인격’, 그 ‘인격’을 지닌 사부의 외모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그런 여우 요괴가 또 찾아오다니.

조급해하지 말고 일단 탁선 사부님의 최근 감정 현황이 어떠한지부터 살펴보자.

얼마 전 복원한 ‘로얄 보드게임 방’ 앞에 구름이 내려왔다.

진법 밖에서 헛기침을 두어 번 하자 한창 신과의 전쟁을 즐기던 세 여인이 순식간에 바빠지기 시작했다.

“사모님! 어서 옷부터 갈아입어요! 장수가 보면 안 됩니다!”

이건 죄악이 극도에 달한 주구다.

“우시, 방 좀 정리해! 네 사질이 보면 무어라 생각하겠어?!”

이건 극악무도한 사조였다.

엉망진창인 상황을 묵묵히 수습하는 건 이장수가 이번에 찾아온 목적인 주우시였다. 그녀는 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평소 사부 제원과도 별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이치대로라면 전생의 감정이 기초하고 있어서 제원과 주우시는 이번 생에 인연이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감정이라는 건 그 누구도 그렇게 된다고 확신할 수 없는 게 아니겠는가.

지금쯤이면 주우시가 사부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으리라.

이장수가 보드게임 방으로 달려온 건 주우시 사숙의 마음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뒷일을 처리할 때 문제가 생기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자로서 탁선이 된 약~간 기구한 운명의 사부님에게 반려자가 생기는 건 극히 좋은 일이다.

끼이익—

방문이 열리고 담담한 향을 머금은 바람이 확 끼쳐왔다.

삼베 단삼과 짧은 치마를 입은 주구가 먹이를 탐내는 호랑이처럼 두 손을 오므리고 외쳤다.

“술! 가! 져! 와!”

대충 몸을 흔드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이장수는 한 줄기 선식으로 주구를 받치고 소매에서 엄지만 한 술 주전자를 꺼내 정확하게 그녀의 손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4품 영단 당두단 두 알을 꺼내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그녀의 입에 집어넣었다.

“나무즙 삼백 근이요!”

작은 술 주전자 두 개를 품에 껴안은 주구는 술기운이 돌아 볼이 발그레했다.

입으로는 당두단을 아작아작 씹으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문제없다!”

구석에 있는 도박 테이블 뒤에 있던 강림이 눈을 흘겼다.

“너희 두 녀석, 이 무슨 남사스러운 짓이냐!”

주구는 헤헤 웃더니 흐뭇해하며 조그마한 술 주전자 두 개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강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비밀 유지’ 조항이 있지 않았던가.

이장수는 앞으로 다가가 읍했다.

“제자, 사조께 인사 올립니다.”

“녀석, 그런 호칭은 부르지 않기로 하지 않았어? 여긴 외부인도 없는걸.”

강림은 혀끝을 끌끌 차며 웃었다.

왕부귀에게 시집간 그녀는 성숙한 면모로 꾸미기 시작했다.

덥수룩하던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빗었고, 담황색의 긴 치마로 갈아입었으며 뽀얀 피부는 점점 더 광택이 났다.

그러나 절벽은 여전히 절벽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앞뒤로 늘어뜨리니 완전히 앞뒤를 구분할 수가 없······.

“흐음.”

이장수는 구석에 조용히 서 있는 주우시를 바라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시 사숙, 혹 수행이 급하지 않으시면 잠깐 저와 산을 좀 거닐어도 되겠습니까?”

주우시는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머릿속 소경봉의 진정한 주인 이장수는 줄곧 그녀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왔고 평소 대화를 나눈 횟수도 적었으니 말이다.

“물론이다.”

주우시는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주구는 이장수를 보고 눈을 끔뻑거렸고, 이장수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반면 강림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이장수에게 전음했다.

“수 형, 너무 이른 거 아닌가? 우시는 아직 선인도 되지 않았어.”

수!

수 형은 또 무엇입니까?

아니지, 지금 성급하다고 하셨습니까?

청구 여우 요괴가 제 발로 찾아왔는데, 구체적인 상황을 묻지 않았다가 우시 사숙이 괜한 오해라도 하면 어떡하냔 말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사조께서도 이따가 아시게 될 겁니다.”

이장수는 전음으로 그리 대답하고 주우시에게 앞장서라는 듯 손짓했다.

“사숙, 앞장서십시오.”

“그래.”

주우시는 대답하고는 누각을 빠져나왔다.

이장수는 뒤에서 따르면서 육 척의 거리를 떨어뜨렸다.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일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두 사람은 영수 우리 가장자리를 거닐었다.

새끼 영수를 먹이느라 바쁜 웅영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 금세 고개를 내리깔고 제 할 일에 몰두했다.

‘해신 대인께서 우시와 따로 있다니······ 중요한 얘기를 하는 거겠지?’

이장수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딱히 선력으로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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