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위에는 선인들이 즐비해 있다. 수백 개의 인영은 천선들의 안내를 받아 깜깜한 밤에 남섬부주와 동승신주의 경계지로 달려갔다.
지하에는 종이 인형과 선두를 잔뜩 실은 마부 종이 도인이 토둔술을 펼쳐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도선문 선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홍림국의 수도 아래쪽에서 등장한 이장수의 금선경 종이 도인은 이맛살을 구긴 채 이곳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이 그냥 위급한 정도가 아닌데?
이 정도면 아예 게임 오버 아냐?!
수백 명이 공중에서 맞붙었고, 한쪽은 이미 전멸이나 가까운 상태였다.
번화했던 도성을 전쟁의 연기가 집어삼켰다.
동쪽 성문과 성벽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기병 부대가 성안 최후의 방어선에 충격을 가하고 있었다.
범인들의 전쟁.
정확하게 말하면 연기사가 참여한 범인 전쟁이었다.
대부분 장군은 수도 경지가 있었다.
죄업에 집어삼켜지는 것이 두려워 웬만한 상황에서는 ‘병사는 병사끼리, 장군은 장군끼리, 선인은 선인끼리’ 싸우는 원칙을 따른다.
선식을 흩뜨려 둘레 만 리를 관찰했다. 큰 싸움이 벌어진 전쟁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홍림국의 한쪽 방어선은 아직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상태였고 대규모 부대가 몇 군데서 국토를 수호하는 중이었다. 홍림국 수도에 나타난 대군은 몰래 들어왔으리라.
침략해온 두 부락은 동북과 동남 두 방향에 수십만 정예군을 모아 맹공을 펼쳤다. 그 기세란 막을 수 없는 수준에 달했다.
설령 오늘 밤 수도를 기습하지 않았더라도 홍림국은 보름을 버티기 힘들 것이다.
‘부락’이라는 건 하나라의 낡은 제도를 이어갈 뿐, 이들의 자체 실력이 홍림국 같은 ‘방국(方國)’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남섬부주에 위치한 번화한 대국의 눈에 홍림국과 두 개의 부락을 비롯한 동승신주의 무수한 나라, 부락은 모두 ‘동이(東夷. 동쪽 이민족)’ 범주에 속했다.
선식으로 반복해서 곳곳을 훑어보고 나서 금방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두 부락의 배후에는 대선종이 후원하고 있을 것이다. 군대 사이에 원선, 진선경 선사가 섞여 있는데, 그 수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고 수행한 공법(功法)도 상당히 비슷했다.
이번 전쟁은 ‘선문이 속세 자원을 쟁탈하는 것’이고 동시에 아군인 도선문은 누가 봐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패자는 그야말로 탕진잼이 아닐까.
붙잡혔던 도선문 진선 집사들은 무탈했다.
도선문 선인들이 달려올 길에는 수백 개의 기식이 감춰져 있었다.
진선은 백이 넘고 천선은 삼사십 명이었으며 금선경 위압도 둘이나 느껴졌다.
이 선문은 도선문 일행을 암암리에 매복 습격할 생각인가?
매복 습격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막는다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 터.
자세히 느껴보니 상대 선문에게 살의는 얼마 없었고, 이때 배치한 진세 또한 방어 위주였다.
남주에서 벌어지는 난전에서 종종 나타나는 패턴을 보았을 때, 저쪽은 도선문 선인들을 되돌아가게 압박할 확률이 몹시 높다.
인질을 이용해 도선문과의 전쟁을 피할 생각이리라.
그리고 도선문은 여러 가지 요소를 보고 상대와 전쟁을 벌일지를 결정한다. 대치할 때 홍림국의 전체적인 상황이 어떠한가를 주로 볼 것이다.
매가 토끼를 잡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이장수도 감히 방심하지 않고 즉각 배치를 시작했다.
우선 암암리에 계무우 장문에게 알리고 동해 근처에서 종이 도인들을 소집했다.
오을을 불러 언제든지 동해 용궁에서 고수를 파견해 지원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어쨌건 저쪽 편에 금선경이 둘이나 있으니 절대 얕봐선 안 된다.
다른 건 장담할 수 없지만, 상대방이 고집스럽게 도선문 선인들 앞에 매복을 친다면 이장수는 대규모 원군을 동원해 도선문을 도울 것이다.
이 또한 도선문의 평범한 ‘원선’ 문인인 그가 사문을 위해 할 수 있는 소소한 공헌이었다.
신속하게 준비를 끝마치고, 범인의 살상을 한참 지켜보는데, 점점 도심에 이상 반응이 생겼다.
이런 전쟁으로 인간족이 스스로 실력을 깎을까 봐 걱정하는 건가?
그건 아니다.
홍황 인간족. 기운은 범인에게 모여있고 실력은 연기사에게 집중돼 있다.
인간족 자체는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이곳의 전쟁은 인간족의 전체적인 실력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장수가 떠올린 건······.
범인 세력끼리의 전쟁은 외부 압력이 낮아서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천도가 배후에서 영향을 주고 일부러 인간족이 세력을 늘리는 속도를 늦추기 위함일까?
성인을 제외하고 금선, 대라금선, 준성인도 천도의 영향을 받는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으니 어느 정도에서는 범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너무 비관적인가?”
혼자 중얼거리면서 도심의 이상 현상을 평탄하게 다듬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히 대청 성인이 보여준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정황을 보고 어떻게 나설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민간 전쟁에 간섭하면 엄청난 죄업이 유발되리라.
깊은 곳에서 날아 나와 왕궁에서 가까운 황량한 객잔 별실을 찾은 이장수는 조용히 상황이 어떻게 발전해나갈지 기다렸다.
성인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상나라의 탄생’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은 아닐까?
나와서 하는 말인데, 태청 성인께서는 매번 ‘가’라는 짧은 명령을 내리셨다.
이건 내 이해 능력이 미달인 걸까, 아니면 태청관 인터넷이 버벅거려서 그런 걸까.
흐음, 성인에 대해 함부로 논하면 안 되지.
‘천병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연출하고 유금이 버틸 수 있도록 도울까?
아니야. 옥황상제와 왕모가 출타하신 마당에 더더욱 신중하고 조심히 행동해야지. 절대 약점을 잡혀선 안 돼.
내 본체가 도선문에 있다는 사실을 운소 선자가 추측했다는 건 토대가 밝혀질 가능성이 낮지 않다는 걸 말하니 그 어떤 불필요한 일을 하지 말자.
물론 손 한 번 까딱하는 정도로 사소한 수고로 유독을 도울 수 있다면 인색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왕궁 깊은 곳에서 선력 파동이 전해지고 혈광이 하늘로 솟구쳤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홍림국 왕도성(王都城) 상공에 상흔이 역력한 푸른 교룡 한 마리가 나타났다!
교룡은 하늘로 솟구치려는 듯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었다. 그러나 몸이 빠르게 부서지고 육신 안은 텅텅 빈 채 새까만 재가 섞여 있었다.
홍림국의 기운이 이미 붕괴하였다!
······
“현아······ 현아야?”
하늘의 성광을 보며 넋을 놓고 있던 유금현아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사백, 사숙.”
커다란 표주박을 등에 메고, 삼베 단삼과 짧은 치마를 입은 주구가 옆에 있는 구름 위에서 훌쩍 뛰어 내려왔다.
본디 ‘어흥’하는 자세로 장난을 걸고 싶었던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유금현아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밟고 히히 웃으며 이미 쳐든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기만 했다.
주구는 홍림국에 변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경봉에서 부리나케 쫓아왔다. 유금현아에게 힘을 주려고 말이다.
선문에 발을 들였다면 그건 속세를 벗어났다는 의미이니 본디 연연해선 안 된다.
하지만 유금현아의 상황은 좀 특수했다. 홍림국의 공주이자 도선문 지난 기수 수석 제자였다. 그리고 홍림국은 도선문의 ‘자본주’가 아닌가······.
이는 유금현아의 현재 처지를 상당히 미묘하게 만들었다. 미묘하다 못해 주구조차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대사저를 불러 함께 왔을 정도였다.
옆에서 자색 치마를 나부끼는 주의가 검을 들고 다가왔다.
주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유금현아에게 말을 걸었다.
“현아야, 가족들을 걱정하는 것이냐?”
유금현아는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살포시 끄덕였다.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고결한 얼굴에 드러난 감정이란 근심과 불안이었다.
그러나 이내 유금현아는 고개를 아래로 드리웠다.
“입문할 때 속세를 잊어야 했는데, 저는 아직 속세에 연연하는 마음이 있사옵니다.”
“어리석은 녀석.”
주구가 다가왔다. 뒤에서 유금현아를 껴안고는 푸른색 긴 치마 등 뒤로 드러난 살결에 이마를 갖다 댔다.
“정말로 나를 낳아준 부모를 모른 체할 수 있는 이가 있겠느냐. 그저 네 부모는 다른 부모와 다를 뿐이다.”
“사숙······.”
“아아, 이렇게 안고 있으니 참으로 보드랍구나. 히히히. 웃어봐, 자, 한 번 웃어보래도!”
얼굴이 발그레해진 유금현아는 황급히 주구의 나쁜 손을 저지했다. 그렇지만 웃음이 나지는 않았다.
“주구, 그만! 현아야, 개의치 말아라. 워낙 술을 많이 마셔서 미친 게로지!”
주의는 곧바로 대사저의 위엄을 꺼내 보여 주구를 유금현아의 등 뒤에서 떼어냈다. 그 바람에 주위 도선문 선인들의 주목과 웃음을 샀다.
문파 선인들이 계속해서 다가와 유금현아에게 따스한 말을 건넸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문에서도 이 일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다.
유금현아도 애써 그들을 상대했고, 겨우 여유가 생겼을 때는 구름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주변 사람들도 눈치껏 더는 다가와 방해하지 않았다.
유금현아는 품에서 선력으로 감싸진 달걀 한 알을 꺼냈다. 달걀에 그려진 웃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눈에 결연함이 차올랐다.
‘장수 사형······ 이번 일을 꼭 해결할게요.’
달걀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한 유금현아는 화기린 검집을 치맛자락 위에 가로로 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신의 상태를 최상으로 조절했다.
홍림국 일에서 자신이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겠는가.
휙!
다급한 파공음이 들려오면서 간밤의 적막이 깨졌다. 남쪽으로 날아오는 구름도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태상장로 한 분이 남쪽에서 날아온 전서 옥패 하나를 받았다. 옥패를 열고 자세히 읽어보더니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사백, 어찌 그러십니까?”
“적군이 침습했다. 홍림국 수도는 이미 무너졌고 홍림국 선사도 궤멸했다는구나. 적군은 이미 왕궁으로 갔어.”
도선문 선인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유금현아가 벌떡 일어섰다.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지만, 눈은 차분했다.
“현아야······.”
“저는 괜찮습니다.”
유금현아는 포권하여 고개를 드리웠다. 질끈 묶은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문파의 안배를 따를 것입니다. 어떤 결단을 내릴 때 제 속세 신분은 고려하지 마십시오!”
“알겠다.”
“홍림국은 우리 도선문의 비호를 받는다. 홍림국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도선문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자리에 온 천선 절반은 전력을 다해 왕도성을 지원하라! 반드시 홍림국 유금 국왕을 지켜야 한다!”
즉시 열 명 남짓한 천선이 도선문 선인 무리에서 벗어났고 빛으로 변해 남쪽으로 쏘아졌다.
아리따운 눈에 불안을 담은 유금현아는 조금 망설이더니 이내 앞으로 다가갔다.
“제자, 한발 먼저 지원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주구도 냉큼 뛰쳐나왔다.
“제가 현아와 함께 가겠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주의가 검을 들고 다가와 머뭇거리는 도선문 장로를 바라보았다.
“지금 현아더러 뒤에서 보고만 있으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합니다. 저와 주구가 안전하게 보호하겠습니다.”
“그럼 나도 너희와 함께 가마.”
한 노부인이 나섰다. 문파의 태상장로인 그녀의 경지는 천선경 후기였다.
이로써 다른 장로들도 동의했고,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당부했다.
주구는 등에 멘 커다란 표주박을 던졌다. 표주박이 바람을 타고 몸집을 불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석 장 길이로 변했다.
주의, 유금현아, 그리고 노부인이 빠르게 표주박에 올라탔다.
표주박 주둥이 쪽에 책상다리로 앉은 주구가 두 손으로 검결을 짚자 손끝에 미약한 빛이 가물거렸다. 마치 환영인 양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복잡한 법결을 짚었다.
“질주하라!”
주구의 외침에 표주박은 남쪽으로 용맹하게 날아갔다. 어찌나 거칠었는지, 등에 타고 있던 세 선인을 날려버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