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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형이 실력을 숨김 (428)화 (428/593)

슬픔이가 중얼거렸다.

“내 존재는 지워져야 해. 반드시 바로잡아져야지. 여전히 거짓이야.”

“바로잡아지기 전에 다른 감정을 느껴보고 싶지 않아요?”

“그게 무슨 의미지? 그냥 이대로 사라지게 해주면 안 돼?”

“도우에겐 아무 의미가 없을 순 있지만, 당신들을 탄생하게 했고,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생명들에겐 의미가 있지요. 슬픈 감정에 정신을 점령당한 도우 또한 그녀가 아닌가요? 계속 이곳에 숨어서 나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 봐 걱정하는 도우, 모든 괴로움을 짊어지고 타인에게 도움을 주려는 그녀는 결국 같은 생명일 뿐입니다. 똑같이 따뜻하고 상냥하죠.”

슬픔이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울먹였다.

“내가 그녀를 도울 수 있다고? 난 슬픔과 절망밖에 모르는 쓰레기일 뿐이야!”

“자, 우리 간단한 놀이를 하죠. 그럼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이장수는 슬픔이에게 오른손을 뻗었다.

“그녀를 위하는 셈 치고 좀 앉아볼래요?”

“의미가 없대도······.”

“그럼 엎드려 있어도 돼요. 자, 이걸 봐요.”

이장수의 오른손에 금빛이 반짝였다.

금빛마다 이장수가 조금 전에 책을 읽을 때 크게 웃던 화면을 머금고 있었다.

“이건 제 즐거움의 일부입니다. 도우도 슬픈 감정을 꺼내 보세요.”

슬픔이는 손가락을 떨었다.

푸른색 광구가 천천히 날아와 이장수의 손바닥에서 맴돌았다.

이장수가 눈을 감고 법술을 재촉하자 두 개의 광구가 하나로 엮였다. 두 가지 색깔의 빛다발이 서로 쫓고 쫓으며 태극과 혼돈이 되었다.

슬픔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극과 혼돈을 바라보았다. 현묘한 기운을 느꼈으나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금세 이장수는 구슬 하나를 꺼냈다. 태극 광구를 구슬에 주입하고 검은 천으로 가렸다.

“도우, 이 안은 기쁨일까요, 슬픔일까요? 조금 전에 드러난 음양의 도를 이해할 거 아니에요.”

“둘 다 아니야. 감정의 혼돈이야······.”

“혼돈은 끊임없이 진화해요. 하지만 진화하는 방향은 확실하지 않죠. 명확하게 알려줄게요. 안에 있는 감정은 이미 정형화됐어요. 혼돈은 음양을 생(生)하죠. 이 안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두 개의 감정이 태어나요. 바로 슬픔과 기쁨입니다. 그러니까 반은 슬픔이고 반은 기쁨이에요. 그렇죠?”

“그래, 그런 것 같네.”

“이 검은 천을 계속 벗겨내지 않으면 슬픔과 기쁨은 동시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죠?”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슬픔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던 도문 선인들도 고개를 갸웃거렸고, 점점 알쏭달쏭해졌다.

“그러니까 슬픔과 기쁨은 이미 하나로 겹쳐졌습니다. 이 천을 벗겨내지만 않으면 두 가지는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고요. 자, 이제 앞을 봐요. 다음 순간, 다음 시진에는 더 멀리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도우가 멀리 내다볼 수 없는 곳의 감정은 혼돈의 상태일까요? 감정의 혼돈에는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존재해요. 아직 확신할 수 없고, 도우가 그곳에 도착해야만 감정이 어느 방향으로 무너질 겁니다. 반은 슬픔이고 반은 즐거움이겠지요. 그렇죠?”

“아니, 그건 억지야. 나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해. 내 모든 건 이미 정해졌어.”

이장수는 검은 천 아래에 있는 광구를 흔들었다.

“그럼 이 안에는 슬픔이 있겠네요?”

슬픔이는 당황했다.

“한번 보세요.”

슬픔이는 엉겁결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턴가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앉아 있었다. 검은색 옷의 끈이 어깨에서 스르르 미끄러졌다.

이장수는 일어서서 검은 천으로 감싸진 구슬을 슬픔이 앞에 놓았다.

“슬픔은 도우가 존재하는 의미가 아녜요. 생명이라면 누구나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리 말하고 이장수는 뒤돌아 구름을 몰고 도문 선인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슬픔이는 검은 천으로 감싸진 광구를 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작은 손을 뻗었으나 검은 천에 닿기 직전에 다시 움츠리기를 반복했다.

눈물 호수 곳곳에 퍼진 슬픔의 감정은 어느새 희박해졌다.

“현도 사형.”

조공명이 현도 대법사의 곁으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지금 장경은 도대체 어떤 경지입니까?”

“나도 모른다.”

대법사는 제 두 손을 내다보았다. 손에서는 광구 두 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사형, 무얼 하십니까?”

“이따가 악념 소녀와 싸워야 하니 미리 공부 중이다.”

대법사는 광구를 으스러뜨리고 느긋하게 웃었다. 금세 타산이 생겼다.

태극의 이치라······. 쉽군. 물론 더없이 익숙하고 말이야!

······

후토 낭랑과 접촉한 후 이장수는 일행에게 사흘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종이 도인은 동분서주했다. 하늘에 오르고 바다로 내려가면서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본체와 여덟 명의 도문 고수는 눈물 호수에서 두 가지 일을 했다.

슬픔이를 통해 칠정의 힘을 느끼고, 완벽하면서 상세한 계획을 세웠다.

지난 생의 얕은 지식과 태청 기운, 음양의 깊은 뜻을 혼합한 궤변으로 슬픔이에게 희망을 주고 슬픔을 줄인 일은······ 소소한 시범인지라 언급할 가치도 없다.

그들이 현재 연구하는 건 진정한 거사다!

대법사가 뒷짐을 지고 서서 입을 열었다.

“태극도를 쓰자. 태극도가 비교적 안정적이야.”

“선천 지보를 어찌 이곳에 씁니까? 현도 사형, 차라리 정해신주를 씁시다. 정해신주도 건곤을 고정하고 만물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태을 진인이 입을 삐죽였다.

“낭비입니다. 선천 영보를 이렇게 낭비하는 건 처음 봅니다.”

줄곧 아무 말이 없던 옥정 진인이 나섰다.

“사형들, 차라리 제가 슬픔의 화신을 도맡아보겠습니다.”

이들 앞에 있던 슬픔이가 입을 가로로 죽 늘였다.

품에 검은 천에 감싸져 있는 구슬을 꽉 안으며 중얼거렸다.

“협조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옮길지 연구하다니. 난······ 너무 비참해······.”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눈물 호수 아래에서 몇몇 인영이 천천히 올라왔다.

이장수, 광성자 등이 절단된 은백색 쇠사슬을 끌고 있었다.

쇠사슬은 잘게 떨리더니 동시에 은백색 빛으로 변해 슬픔이에게 돌아갔다.

“때가 됐습니다. 시작하죠.”

“애사를 어떻게 옮길지 아직 정하지 않······.”

슥!

금빛이 번쩍하고 슬픔이가 있는 자리에 순식간에 거꾸로 세워진 금두가 생겨나더니 슬픔이를 그대로 뒤덮었다.

운소 선자가 하얀 손을 흔들어 혼원금두를 뒤집자 슬픔이는 금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금두는 자체적으로 건곤을 이루니 다칠 일은 없습니다.”

운소 선자의 간단한 설명에 선인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법사가 소매를 탁 털자 태극도 한 장이 아홉 선인의 발아래에 나타났다.

음양이 돌아가고 주변 풍경이 변하면서 그들은 육도 윤회판 옆 어느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윤회판 근처는 이미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열 명의 염라가 육도 윤회판의 각 방향을 지켰고, 음차, 천병, 무족 고수들은 윤회도 밖에서 겹겹이 방어진을 쳤다.

“사형, 사저들. 지금껏 말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육도 윤회판에 들어가면 외부와 연락이 끊기고 태극도만 수시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 한 번에 성공하고 정해둔 순서에 따라 진행해야 하며 일각을 넘어선 안 됩니다.”

“알겠다.”

여덟 도문 고수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현도 대법사가 오른손을 들자 손바닥에 태극도 허상이 나타나고 앞에 있는 석벽에서는 흑백 소용돌이가 다시 나타났다.

아홉 명은 동시에 도약하여 아홉 개의 빛으로 변했고 이내 소용돌이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소용돌이 안, 차가운 기식이 바깥으로 쏟아지려고 했다. 그러나 태극도의 허상이 가물거리면서 소용돌이는 즉시 무너지고 허무로 돌아가 매끄러운 석벽만 남게 되었다.

육도 윤회판에 발을 들였다.

아홉 선인이 낙하한 지점은 이 작은 세계 언저리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이장수는 이제 막 안정적으로 중심을 잡고 섰고, 각기 다른 방향에 내려온 운소 선자, 대법사, 조공명도 이장수가 있는 곳으로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

그래, 이곳에 있는 도문 아홉 선인 중 내가 경지가 제일 약하니까, 뭐.

“엄청난 증오로군.”

광성자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나머지 선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마다 영보를 쥐고 운무가 깔린 곳 밖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본 광경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었다면, 지금 시야에 들어온 건 절반 가까이 용암의 모습이었다.

펄펄 끓는 암장이 끊임없이 넘실대고 흘러나오고 응고되었다. 작은 세계는 완전히 종말 직전의 광경이었다.

작은 세계 정중앙에는 몸집이 더없이 큰 용암 거인이 계속 손을 흔들며 타오르는 거암들을 던져댔다.

거인의 머리 위 보좌에는 악의 화신이 비스듬하게 앉아 있었다.

핏빛 갑상을 입고 위에는 허리까지 오는 단삼을 두르고 있었다. 입은 옷 가짓수가 적을수록 방어력이 높다는 명언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사실 상고 무족 여전무가 즐겨 입던 차림새일 뿐이다.

구름을 몰아 공중으로 올라간 아홉 선인은 일제히 이곳으로 달려왔다.

“쳇.”

악념 소녀가 혀끝을 끌끌 찼다. 그녀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울려 퍼졌다.

“뭐라도 하러 간 줄 알았더니, 지원군을 부르러 갔던 거였어?”

대법사는 걸음을 멈추라는 손짓을 하고는 구름을 몰아 뒷짐을 쥐고 앞으로 다가갔다.

“아직 승부가 나질 않았는데, 지원군을 찾으러 가서 뭐 하겠어?”

혀끝으로 입술을 훑은 악념 소녀는 온몸으로 검은 기운을 내뿜었다.

“좋다. 너 먼저 죽이고······.”

“간단한 놀이를 하는 건 어때? 내가 착한 생각을 좀 꺼냈으니까 도우는 동등하게 악한 생각을 꺼내. 그럼······.”

후—

쿵!

산과도 같은 거암이 마구 날아와 대법사를 날려버렸다.

너무 깔끔한 처리에 이장수를 비롯한 선인들은······ 끝내 손으로 눈을 가렸다.

못 보겠다, 못 보겠어.

“네 수작에 안 넘어가거든?!”

악념 소녀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용암 거인을 조종해 대법사를 쫓아가려는 찰나 하늘로 날아간 거암이 펑, 하고 터지면서 가루가 되어버렸다.

이장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위압을 느꼈다.

어째서 익숙한 거지?

이 위압은 이장수가 잘 아는 인교 대사형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처음으로 붙잡았던 바짓가랑이였으니 더없이 익숙할 수밖에.

다만 낯선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는 건······ 대법사가 처음으로 이런 수준의 도경 위압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악념 소녀는 입꼬리를 쓱 올리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용암 거인이 몇 번 몸을 떨자 등 뒤에서 팔이 하나둘 튀어나와 대법사를 향해 산과도 같은 거암을 던졌다!

“허!”

소매가 널찍한 대법사의 도포 자락이 펄럭였다. 대법사가 왼발을 들고 세게 구르자 흑백 기운이 조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바람이 잔잔해지고, 밤하늘에 미친 듯이 날던 거암이 동시에 산산조각이 났다!

“고약한 놈!”

악념 소녀가 벌컥 욕을 하고 흉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온 천지가 어두운 그림자에 빠진 것 같았다. 체구가 더없이 거대한 용암 거인은 대지를 산산조각 내고 사방으로 튀기는 용암과 함께 도약했다!

대법사의 왼팔은 음양 두 기운에 휘감겼다. 이윽고 용암 거인을 향해 다섯 손가락을 펼치고 서서히 밀었다.

대법사의 손바닥이 용암 거인 앞에 이르자 흑백 태극도가 한 장 한 장 응결되었다.

나란히 배열된 태극도가 서서히 커지더니 마지막에는 용암 거인의 온몸을 가릴 정도의 커다란 태극도 한 장이 되었다.

악념 소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고 용암 거인이 둔탁한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대법사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왼손바닥을 천천히 돌리며 다시금 앞으로 살짝 밀었다.

동시에 움직이던 흑백 태극도는 마지막에 태극도 한 폭이 되어 돌아갔다.

더없이 커다란 용암 거인은 순식간에 행동을 멈추고 산산조각이 나서는 기이하게도 공중에 부유했다.

악념 소녀는 당황했다.

음양 두 기운이 언제부턴가 그녀의 등 뒤에서 나타나 태극도의 허상을 응결했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 때, 음양 두 기운이 다시금 그녀를 얽어매고 태극도에 던져버렸다.

전에 대법사에게 손쉽게 붙잡혔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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