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쩝. 내가 억지를 부린 건가.’
곤륜산. 선부 주인이 친우를 만나러 외출하여 비어있는 선부. 각기 다른 양식의 ‘구름’으로 가득 채워진 옆 동굴 안.
염소수염을 기른 중년 도인이 흰 구름 위에 모로 누워서 수염을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반 시진이 이대로 지나가려나.
홍황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건 오직 수신밖에 없으리라.
백택은 이번에 정말로 전부를 걸었다.
수신이 평소 일 처리하는 버릇과 추산 방식에 따라 반년을 써서 수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추산한 다음 그 반대로 행동했고,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말로 내기를 규정했다.
이번 문제는 나, 백택이 안온하게 승리하리라!
수신의 선택이 10층짜리 누각이라면 보통의 지혜로운 자들은 5층짜리 누각 정도만 생각한다.
수신과 힘을 겨루려면 10층이나 9층짜리 누각까지 고려해야 하나 그는 한발 물러나 5층으로 내려왔다.
너무 높아도, 너무 낮아서도 안 된다. 이곳만이 수신의 사고방식에 제일 부합하지 않은, ‘가장 안전한 장소’이니 말이다!
“하하, 하하하하!”
여기까지 생각이 이른 백택은 옆으로 누운 채 한참을 껄껄 웃어댔다. 염소수염에는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고 표정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매일 화신을 가지고 움직이는 수신이 그의 가짜 육신을 찾아낸 후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반 시진이, 됐구나!
“사형, 저자가 상고 요수인가요?”
꾀꼬리 같은 여인의 목소리가 뜬금없이 등 뒤에서 울려 퍼지자 백택은 온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원신은 아예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사내의 탄식이 이어졌다.
“제대로 짚었군. 사형, 재로 날려버려 주세요.”
“오냐.”
······
‘사형은 어째서 내 답변을 고른 걸까?’
곤륜산 팔보운광동(八寶雲光洞) 정운방(停雲房) 구석, 령아가 팔짱을 낀 채 심도 있는 인생 문제에 빠졌다.
사형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어느 위치를 차지하는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빙빙 돌아가는 태극도 아래, 조금 전 그 중년 도인이 음양 두 기운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팔목부터 손목까지 묶인 채 입도 틀어막혀 있었다.
“사제, 백택을 그냥 죽이기엔 좀 아깝지 않으냐? 인교로 들이는 건 어때? 요수라면 경지도 꽤 훌륭할 테니 후원을 지키라고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야.”
중년 도인이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부위라곤 목뿐이었다. 그는 대법사의 말을 듣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좀 그래요. 상고 10대 요수 중 하나입니다. 요제, 곤붕과 동석할 수 있었던 상고 대능이죠. 그런 요수에게 후원을 지키라고 하면 인교에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가 있어요. 남들은 우리가 너무 거만하다고 여길 겁니다.”
이장수의 말에 대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요제는 이미 죽긴 했지만, 강자를 존중하기는 해야 할 터. 아니면 어떻게 하길 원하는지 물어나 볼까?”
“백택은 홍황에서 드물게도 지조 있는 인사입니다. 죽는다고 한들 굽히지 않을 것이니 더 물을 것도 없지요. 그냥 죽입시다. 상고 요정과 생사를 함께했다는 명성은 지켜줘야지요. 원신 절반을 남겨서 구슬에 봉인하고 살아있는 역사서로 삼아도 좋고요.”
중년 도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눈에는 실핏줄이 가득했고 얼굴도 분노가 역력했다.
령아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도인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인간이 아니군! 당신은 인간이 아니야! 제발 인간답게 굴란 말이오!’
뭐,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이렇게 거칠게 다루는 것도 좋지 않다. 어쨌든 죄업도 없고 신수라는 명성도 있지 않으냐······.”
이장수는 안타까움이 역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게도 일찌감치 둔갑한 신수지요.”
“둔갑하여 인간의 모습이 되었는데, 식재료로 삼으면 우리 도심에 영향을 주지 않겠어? 선천 영수는 온몸이 보물이라지?”
백택은 온몸을 벌벌 떨었고, 눈가에도 눈물이 어른거렸다.
“아니면 도솔궁으로 들어가 나이 많은 동자라도 하라고 할까?”
“그럼 인교의 문턱이 너무 낮아집니다. 세상의 무수한 생명이 성인 어른의 보호를 받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이 또한 하나의 인과인지라 어르신도 언짢아하실 겁니다.”
대법사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그 말도 맞구나. 인교가 딱히 저자의 계책이 필요한 건 아니니 말이다. 사제 하나로 충분하지.”
“사형, 법보 인간이 되는 건 당사자가 꺼릴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하! 죽이자, 죽여. 그러면 끝이지.”
대법사는 호탕하게 웃고는 손가락을 들고 태극도에 거꾸로 매달린 백택의 이마를 가리켰다.
백택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면서 온 힘을 다하여 음양 두 기운에 묶인 몸을 덜덜 떨어댔다.
“저기!”
사형이 등 뒤로 보낸 손짓에 령아가 과감하게 일어섰다.
“대법사님, 차라리 직접 말하도록 하는 건 어떨까요? 인간은 죽는 순간에 솔직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백택은 인교를 위협하고 상고 요정 잔당을 돕기만 했잖아요. 기꺼이 공을 세워서 과오를 벌충하길 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참에 요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수도 있고요.”
백택은 령아에게 감격 어린 눈빛을 던졌다.
등 뒤에서 이장수가 왼손 엄지를 치켜들자 령아는 얼굴이 화드득 붉어졌다.
모처럼 사형에게 칭찬받은 순간이 아닌가.
대법사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서 허공을 가르자 백택의 입에 걸린 음양 두 기운이 즉시 사라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요수가 입을 열자마자 내뱉은 말이란 다음과 같다.
“누가 죽어도 굽히지 않는다고 했소! 굽힙니다! 이번에 굽힐 생각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라고요!”
이번에는 이장수가 미간을 찡그렸다.
“사형, 이자가 진정 백택이 맞습니까?”
“잘못 잡은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홍황 선배님이 이토록 절개가 없다니. 그냥 죽이자꾸나.”
“두 분, 인교 고수이자 성인 제자 두 분이여, 부디 이런 식으로 저를 들들 볶지 말아주십시오!”
백택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도선문에 옥패를 보냈던 건 인교와 접촉하고 화해할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교의 후원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저 인교에서 받아주시기만 바랄 뿐, 그러니 저를 죽일 생각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이장수와 대법사는 시선이 마주쳤다. 두 형제는 순간······ 참지 못하고 미소를 드리웠다.
“약간 이해가 안 되는군. 도우는 줄곧 숨어왔고, 누군가가 자네를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을 텐데 어째서 육압을 도운 거지? 육압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태극도를 이용하더라도 도우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네.”
“아······.”
백택은 유유히 한숨을 내쉬었다.
“육압이 저를 찾아왔을 때, 본디 피할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검은 기운을 휘감고 있었지요. 곧 죽음이 닥친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하나 육압이 무사하도록 지켜주기로 요제와 약조한 터라 그 겁을 벗어나도록 도운 것뿐입니다.”
“요제라고요? 아무래도 무언가 숨기고 있는 모양이군요. 정말로 요제와의 옛정이나 약속 때문이라면, 요제를 입에 올릴 때 그리 가벼울 리가 없지요. 마치 일찍이 생각해둔 변명 같단 말이죠. 도우의 말이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사형······.”
“어일 여신, 어일 여신님입니다!”
백택은 다소 포기한 듯한 눈빛을 하고 처연하게 웃었다.
“육압의 모친이 제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습니다. 요정이 무너지기 전날 밤, 어일 여신께선 인간족과의 전쟁에서 요정이 패하리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하여 어린 태자를 제게 맡기며 태자를 세 번 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 구했으니 더는 빚진 게 없습니다! 어일 여신이 아닌 요제라고 말했던 건 이번 일에 여신을 끌어들이고 배후에서 뒷말이 나오는 게 두려워서였습니다. 육압을 돕지 않았더라도 수신이 경지를 좀 더 돌파하고 공덕 금신을 응결하고 나면 요족 출신인 저를 놓아주겠습니까?
수신의 성정이라면, 천정과 인교에 불온한 일을 하는 건 모두 없애려고 하겠지요. 육압의 일을 빌려 저도 수신과 겨루었지요. 뜻밖에 수신은 천도의 힘을 빌려 요괴들의 인내심을 깎는 생각을 해냈습니다.
제가 간과했던 부분으로 제가 수신보다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수신이 오늘 저를 찾아내지 못했더라면 진정 혼돈해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할 생각이었습니다.”
더없이 진정성이 있는 말인지라 그야말로 듣는 이들을 눈물을 훔치고 가슴 아프게 했다. 앞길이 암담하여 마지못해 이런 하찮은 계책을 썼다는 사실을 부각했다.
다만······.
“사제, 어째서 천정을 불안하게 하는 건 모두 없애려고 하는 것이냐?”
대법사가 약간 이해가 가지 않는 듯이 물었고, 이장수는 입가를 파르르 떨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제 생각이 아니라 백택 도우가 속으로 생각한 것인가 봅니다.”
백택은 당혹스러웠다.
“하긴. 백택 도우가 오해한 모양이군. 사제의 성정이라면 스승님의 명령이나 공덕을 버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지.”
어안이 벙벙해진 백택이 얼결에 물었다.
“마음에 큰 뜻을 품은 것이 아니라면 수신은 어찌 절교와 친하게 지내려 애쓰는 겁니까?”
“······.”
“그건 예외로 칩니다.”
처음 조 대인을 만나고 벗으로 지내자는 제안에 그는 한사코 거절했었다.
“그럼 해신교는 어째서 세운 겁니까? 해신교 사당이 불과 대여섯 채밖에 없었을 때, 신통력으로 이따금 정찰해보았습니다. 수신은 해신 대전 때 모습을 드러내고 용족 태자 오을과 사귀었습니다······.”
백택의 설명에 이장수는 무덤덤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인들이 제멋대로 나를 해신으로 받들고 향불을 잔뜩 실어 넣었소. 그 문제를 해결하러 갔으나 용족을 맞닥뜨렸고 마침 오을이 나를 알아보는 바람에 소극적으로 반격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하,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요?”
“그럼, 일부러 요족들을 요승산으로 유인한 건 어찌 설명할 겁니까?”
“멸인검을 빼앗으려고 했고, 죄업을 휘감은 대요괴들을 놓아주기 싫었소. 공덕을 조금 더 얻고 싶었던 지라 죄업을 휘감은 대요괴를 끌어내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럼 서방교 금선자를 음해한 건요?”
“대법사께서 주신 시련이었소.”
“봉황족 대능 공선과 사귀었던 건요?”
“공선 도우는 대법사의 옛 친우요. 내가 적극적으로 사귀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 대능께서 저를 여러모로 보살펴주셨소.”
이장수는 도중에 말을 멈추고 이맛살을 구긴 채 백택을 가만히 응시했다.
당황한 백택은 한참을 넋을 놓고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수신, 도, 도우의 포부가 대체 무엇이오?”
“딱히 없소. 이 위험한 홍황에서 안온하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 내가 무슨 큰 포부라도 있으리라 여긴 겁니까?”
“상고 요정처럼······ 2천제 자리라도 오르려고······.”
풉!
령아는 진정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돌린 채 입을 가렸고 어깨를 계속 들썩였다. 대법사도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그건 2천제가 아니라 동목공이라 불러야 합니다. 도우, 시대가 변했어요.”
백택은 두 눈을 감았다. 무어라 이을 말이 없었다. 눈꺼풀이 닫히기 전, 두 눈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이장수와 대법사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백택은 추산과 탐색에 능통한 선천 생명이면서 천부적으로 우월하니 노군의 소와 비교할 수도 있을 터. 차라리 걸음을 대신할 탈것으로 삼는 건 어떠냐?”
“사형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백택을 죽이지 않기로 했으니 붙잡아두자. 신통력이 상당히 뛰어나니 앞으로 자질구레한 일에서 계책을 내라고 하면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줄지 않겠어?”
“원신을 속박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당연하지.”
대법사의 손바닥에 상생상극 두 줄기 기운이 서로 뒤얽히더니 자물쇠 모양으로 응결되었다.
이장수는 소매에서 족자 다섯 개를 꺼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염소수염을 기른 중년 도인을 바라보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