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 전하께서 영산과 손을 잡길 원치 않는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도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매에서 자루 하나를 꺼내 선력으로 단상 위로 보냈다.
자루는 날아가면서 서서히 풀렸다. 금빛이 번쩍이면서 엄청난 위엄이 대전 안에서 넘실대더니 커다란 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제 옥새였다!
육압을 비롯해 십여 명의 요괴들이 벌떡 일어섰다. 손을 뻗으려는 충동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커다란 인장은 육압 도인이 내민 오른손에 떨어졌다.
“지난번 지장 사제가 약조한 요족의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지장 사제는 수신보다 한 수가 부족하여 심각한 사상자가 생겼지요. 이 일로 스승님께 경고를 받았습니다. 천정 수신은 실로 다루기 힘든 상대입니다.
태자 전하, 수신이 정말로 전하와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고 목숨을 살려주시리라 믿으시는 건 아니지요? 요승산의 일을 잊지 마십시오. 그자는 수단이 극히 악랄합니다. 우리와 달리 상고 이후에 태어난 인간족이라 본래 요족에 원한을 갖고 있지요.
다들 잘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무리하게 요족과 손을 잡으려는 게 아닙니다. 단순히 이 천지는 인간족이 주역이긴 하지만, 태고, 상고부터 살아온 우리 같은 생명에게 살아갈 구멍은 남겨야 합니다. 그리 생각지 않으세요?”
도사의 목소리가 떨어지고, 대전에는 적막이 흘렀다.
대전의 문 어귀, 문정 도인은 팔짱을 낀 채 돌기둥에 기대있고, 옆에 있는 은발 소녀는 말없이 보검을 들고 고개를 드리우고 있었다.
문정은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불만을 토로했다.
‘조금 전에 남긴 기식을 수신 대인께서 발견했는지 모르겠군. 수신 대인의 성정이라면 시시각각 이곳을 감시하고 계실 테지. 쩝. 또 성인 제자가 나서서 서방교와 도문의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군. 요근래 서방교 내에서는 도문에 대겁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겠어. 그야말로 강인한 수신 대인과 끝도 없이 나오는 서방 성인 제자의 싸움이 아닐까. 며칠 후면 저 도사는 또 끌어내려 지고, 수신 대인께선 영산에 말하겠지. 다음!’
문정 도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요사스러워졌다.
“아줌마, 이번에는 어떤 생명을 죽여야 하죠?”
문정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확 굳어졌다. 도대체 몇 번이나 말했어, 여왕 대인이라고 부르란 말이야!
“아줌마는 무슨, 언니라고 불러. 그리고 손을 쓰는 건 아직 이르다. 바깥은 피바다처럼 단순하지 않아. 계략과 꾀가 중요하다.”
“그렇군요.”
문정의 전음에 나찰 소녀가 대답했다. 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흐르는 물처럼 외투를 파고들었고, 이내 외투에 달린 모자를 썼다.
“그럼 난 좀 쉴게요, 아줌마.”
문정의 이마에 핏줄이 도도독 돋았다. 하나 별말 없이 계속 팔짱을 낀 채로 돌기둥에 기대기만 했다. 요사스러운 자태를 유지한 채 도사가 멍청한 요족을 낚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어째서 요족이 멍청하냐고?
서방교 도사가 이미 상당히 많은 말을 했는데도 소위 요족 고수라는 놈들은 도사의 정체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요족 태자가 그나마 지각이 있었는지, 양쪽에서 다시 맹약을 선언하고 정식으로 손을 잡기 직전에 입을 열었다.
“선생님,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요?”
“서방 성인의 제자로 보리라고 합니다.”
······
무엇을 신수라고 부르는가?
반년 전에 북주 북부 지역에 화가 생길 것이라는 걸 예감했고, 심지어 ‘재앙 유발자’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순전히 천도의 운영을 통해 그 화가 닥치리라는 걸 느낀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일종의 직감이긴 하나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직감이었다.
이장수는 백택의 신통력이 진정으로 부러웠다.
다 똑같은 생명인데 어쩜 이렇게 차이가 크냔 말이다!
백택의 신통력이 그에게 있었다면, 즉시 화를 피했을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촉이 오면 즉시 탈주하면 그만 아닌가.
지금 백택은 수신 이장수를 도와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 중이었다.
천정은 반년 전부터 이미 대비를 해두었다. 북주 무족은 요족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을 때 이장수의 경고를 받고 이장수가 준 방어 방안대로 초기 배치를 끝마쳤다.
이제 요족이 미끼를 물길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문정과 초면인 영산 고수, 은발 소녀가 요족의 땅에서 종적을 드러낸 지 사흘째 되는 날, 요왕 수백 명이 어느 산에 모였다.
육압 도인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요족의 상고 원로 수십 명이 등장하면서 요족 전체가 피가 들끓었고, 천정의 장난질에 당하면서 서렸던 패색이 완전히 걷혔다.
요족 원로들은 천정이 도에 어긋나고 의롭지 않는다며 비난하다가 상고 무요 대전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요족 내에서 명망이 꽤 높은 사슴 공이 일어서서 천지에 대고 삼배를 올린 후 목소리를 높였다.
“무족은 잔인하여 선량한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오늘날 여전히 북주에 모여서 우리를 휩쓸고 다시금 홍황을 사냥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습니다! 천지의 청명함을 수호하기 위해, 상고 때 무족의 손에 처참하게 죽은 영혼들을 위해 오늘 우리는 군사를 일으켜 북벌하고 무족 잔당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정도의 빛이여, 다시 홍황 대지를 비추시옵소서!”
윗세대 요족들은 무족을 이용해 천정이 나서도록 압박하려고 하는 의도를 파악했고, 천지 대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젊은 세대 요족들은 이 순간 흥분하여 고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한순간 북주 경계 지역에 요기가 들끓으며 온 하늘을 가리었다. 구중천에 거대한 삼족 금오의 허상이 응결되면서 위세가 한껏 올라갔다!
아래에 있던 이장수의 종이 도인은 ‘여러 지점’에서 관찰하며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서방교 놈들, 너무 살벌하잖아.
무언가를 멸망시키려면 일단 미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게 요족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다.
뒷모습만 본 서방교 성인 제자는 전에는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던 또 하나의 악독한 캐릭터이리라.
대의를 담은 말은 일전에 요족이 보였던 태도로는 절대 외치지 못할 말이었다. 패기와 안목이 부족했으니 십중팔구 서방교 성인 제자의 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렇지만 자세히 되짚어보면 그 말들은 무얼 대표하는가?
요족은 ‘하늘을 대신하여 정의를 행하고’ 천정과 대의를 다투고자 했다. 그 선언은 이장수가 옥황상제를 깨워서 요족과 전면전을 펼치자고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천정은 적을 일천 명 죽이고 아군이 팔백 명 다치는 꼴이니 원기를 크게 다치게 될 것이다.
“일단 안온하게 처리하자.”
이장수는 한숨을 내쉬며 요족의 동향을 계속 관찰하고 천정 곳곳의 부서를 검사했다.
사고 노선은 한결같이 뚜렷하다.
뒤에서 손을 쓸 생각이다. 이번에는 요족 군대를 전멸하지 않고 일부 정예병을 삼켜서 천정과 요족 사이 고수의 실력 대비로 각색해야 한다.
이틀 후, 요족이 군대를 일으켰다.
요족 전체 3분의 1이 북주 집거지를 떠났다. 요왕 백 명, 요족 고수 수천 명, 요병으로 조직된 대군 수십만이 북주 경계 지역에서 서해로 향했다.
요병의 실력은 들쑥날쑥했다. 대다수 실력이 원선경인지라 북주 장기가 가장 짙은 지역을 뛰어넘는다면 절반 가까이 다치거나 죽을 것이다.
북주 무족은 일부 상고 무족이 말썽을 피우고 치우가 헌원 황제와 인황의 자리를 다투는 걸 지지한 탓에 인간족 기운이 집어삼켜 지는 결과를 맞이했고, 상고의 남은 실력이 절반 가까이 깎였다. 그런 상태로 요족 대군을 맞이한다면 잠깐은 막아낼 수는 있겠지만, 상대는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장수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요족 대군이 서해로 향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요족 정예병 수십 명이 북주 장기로 들어갔고, 요족 고수 수백 명의 인솔 아래 서서히 무족이 모인 땅을 압박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달려갈 수 있는 요족 대능과 참선비도를 지닌 육압까지 더하면······.
사방에서 매복하고 팔방에서 포위 공격을 하니 무족의 머리 위에 ‘위험’이라는 글자가 떠오르고 빨간 불이 들어온 셈이다.
이장수는 남몰래 군대를 배치하고 진을 쳤고, 종이 도인도 일찍이 지부와 북해 용궁으로 돌아갔다.
용족은 서방교에 ‘원한’이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도 적잖은 분노를 안고 동해 용궁 고수들이 거의 다 나와서 북해 샘구멍을 지켰고 천정을 지원하고자 고수도 제공했다.
서방교가 현재 불온한 소수의 해족 세력에 대한 지원을 멈추면서 사해의 해족 반란은 서서히 진정되었고, 해족은 다시금 용족이 지닌 하찮은 힘으로 전락했다.
해족은 실력이 전체적으로 약한 편인 데다 졸개들이 바다를 떠난 후로 실력도 크게 깎였다. 그리고 용족의 ‘이무기 병사’, 그러니까 현 ‘흑룡병’도 나머지 삼해 샘구멍을 지켜야 했다.
고로, 이장수는 이번에 용족 고수만 움직여서 참전했다.
물론 안전을 위해 며칠 전에 암암리에 해족과 졸개들을 모은 대군을 배치하고 조용히 북해 결빙 아래에 이동시키기도 했다.
이어지는 대전에서 천병이 전멸하고 무족 사상자 수가 심각해진다면, 수신이라는 신위를 이용해 해일을 일으키고 백만 해족 대군으로 요족을 익사시킬 생각이었다.
하나 이렇게 하면 북주 생명에 가해지는 위해가 상당히 커서 북주 생태계를 파괴하고 홍황 종의 다양성을 해치게 된다. 되레 무족이 다치고 요족 고수에게도 별 위협을 가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수신 보기를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요족이 행군하는 속도로 판단컨대 대략 이틀 후면 요족 대군이 북주 무족 집거지에 도착할 것이다.
요족이 군대를 정비하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대략 사흘 후에 북구로주 북부에서 혈전이 일어날 터.
사방을 감시하면서 동시에 마음속으로도 자신이 한 배치에 누락된 곳이나 부족한 점이 없는지도 꼼꼼하게 따졌다.
그리고 이때, 백택이 다시 한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반나절을 함께 연구했고 이장수는 선력으로 모래판을 응결했다. 여러 가지 색의 깃발을 바둑알로 삼고 각 세력을 표시한 다음 백택과 후속 전쟁을 추론했다.
홍황 제1차 전쟁 추론!
백택은 요족을 상당히 깊게 알고 있었으니 요족 측 ‘사령관’이 되어 더없이 사실에 가까운 요족의 태도에 접근했다.
그들은 깃발을 쥐고 서방교의 영향을 고려해서 북구로주 북부의 대지 위에서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수십 번 반복해서 추론했고, 마지막에는 모두 백택이 패배했다.
다만 천정, 지부, 무족, 용궁이 매번 입는 손실이 조금씩 달랐다.
가장 처참한 상황은 무족 사상자가 10명 중에서 6명 정도였고, 천정이 준비한 수십만 대군은 사상자가 3할에 달했다.
반나절 논의한 끝에 이장수의 메인 방안과 백업 방안을 보완했고, 그 덕에 이장수는 마음속의 안정감이 늘어났다.
“백 선생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니 천정으로썬 실로 다행입니다.”
“수신이 상고에 태어나 인황을 위해 힘을 썼더라면 상고 무족, 요족, 인간족의 대전이 얼마나 볼만했을까요.”
“전쟁이 일어나면 생명은 도탄에 빠집니다. 볼만하다는 말로 표현해선 안 되지요.”
“그렇지요. 제가 단어 선택을 잘못했습니다. 수신, 제게 요족의 사기를 깎고 천정의 손해를 줄일 계략이 있습니다.”
이장수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백택이 말한 계책이 무엇인지 눈치챈 것이다.
“백 선생은 요족이 정말로 그리 눈에 거슬립니까?”
백택은 사뭇 어두워진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요정이 붕괴할 때 물러났으니 원래는 이런 말을 해선 안 되지요. 하나 요족에 있는 제 벗이면서 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생명은 모두 요정과 함께 죽었습니다. 저는 상고 말기에는 죽음을 두려워했으면서 지금은 또 요정의 이름을 내걸고 살길을 도모하는 비열한 이들이 참으로 거슬립니다.
그들과 접촉한 후 원한이 사라진 지 오래였던 소년 육압이 점차 변한 것이지요. 아아, 이쯤 합시다. 수신, 이번 전쟁은 제가 인교에 바치는 첫 공로이니 성인의 비호를 헛되이 할 수도 없습니다.”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이장수는 백택과 서로 읍한 후, 소경봉으로 돌아왔다.
종이 도인은 단방에 앉아 있고 본체는 지하 밀실에서 몸을 풀었다. 태청 성인 초상화 앞으로 가서 향 세 개를 올리고 허리를 숙인 후 성인의 기운이 나타나길 잠자코 기다렸다.
잠시 후.
아무런 반응이 없어?
이장수는 눈을 끔뻑였다. 막 입을 열고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건곤에서 옅은 파흔이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두 줄기 영념이 도심을 파고들고 익숙하면서 느낌 있는 목소리로 변했다.
“하하하! 내다! 이 행님이 도와주러 왔다! 연등을 죽이러 가나?”
“아따~ 내 실력이 최고제?”
천지현황영롱탑!
정품 건곤척!
도심이 떨렸다. 성인께서 보낸 영보들은 이미 정확한 답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탑 형님만 주셨더라면 친히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계략 위주로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건곤척을 함께 보냈다는 건 천정 측을 대표하여 전쟁에 참여하라는 것으로 어느 정도 선에서 천정 고수의 수가 부족한 민망한 상황을 완화하라는 뜻일 터.
보아하니 이번에는 ‘천정 문신’을 새로 정의할 때가 온 듯하다.
건곤척을 손에 쥐고 현황 탑을 몸속으로 들인 이장수는 성인의 초상화에 허리를 숙인 후 뒤돌아 밀실을 빠져나갔다.
성인에게 허가를 받았으니 백택과 전쟁을 추론할 때 보여주지 않았던 비장의 패들을 곧 있을 정식 전쟁에 쓸 수 있겠군.
······
이틀 후.
지부 풍도성 동부 관문. 손에 옥패를 쥔 우두가 결연한 눈빛으로 앞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의 뒤에는 혈기가 넘쳐흐르는 건장한 천여 명의 인영이 동시에 걸음을 내디뎠고, 유명계 대지 위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미친 듯이 내달렸다.
천정 천하 수군 주둔지.
천하 수군 십만, 천정 정예병 삼십만이 출발을 위해 대기 중이었고, 동목공은 그 앞에 가만히 서서 손에 든 옥패에 불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오을과 변장은 동목공 뒤에서 수십 명의 천정 장군들과 조용히 서서 행군의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북해 용궁. 얼음 기둥 아래 졸개들이 칠흑과 같이 어둡고 차가운 바닷물에서 몸을 벌벌 떨어대며 자신들이 있는 곳까지 군령이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
바닷물 속에서 창룡들이 서서히 꿈틀거렸다. 비늘로 덮인 눈꺼풀 아래에 악감정이 담긴 차가운 눈을 끔뻑였다.
하늘 너머 성모궁의 유일한 출입구 앞.
배 한 척이 천천히 떠올랐다. 웃음꽃을 피우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선자들을 태우고 오부주를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