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형이 실력을 숨김 (514)화 (514/593)

이장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보드게임 방은 정적이 흘렀다.

다들 깊은 생각에 빠졌다. 천지에 영향을 주는 일인 만큼 위험도 상당히 큰 편이었다.

강림이 팔짱을 끼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헤헤. 뭐, 따로 떨어지는 이득은 없고?”

이장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렸다.

물론 사조가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은 눈치챘다.

되레 망정 상인이 인상을 썼다.

“림, 우리는 인교 도승이고 인교 제자잖아! 인교는 천정을 보좌하여 창생에 복을 가져다주어야 할 임무가 있어. 우리가 그런 일에 쓰이게 되었는데 어찌 이익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있어?”

강림이 흰자위를 번뜩이며 망정 상인을 쏘아보았다.

“예, 예. 부군 대인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제가 천박하게 굴었죠. 흥!”

“화내지는 말고. 도리가 그렇다는 거지······.”

“사조, 걱정하지 마세요. 천정을 위해 일하시는데, 저도 제 사람들이 손해 보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영석, 단약, 법보, 공덕처럼 수행에 필요한 것들이 부족하지 않도록 할 거고, 사조의 벗에게도 그 혜택을 드릴 겁니다. 가장 중요한 건 기운이겠지요. 옥황상제 폐하께선 이미 목공에게 지시했으니 칙지가 완성되면 천정 기운의 보호도 받을 수 있습니다.”

“혹 서방교에 당하면 어찌 대응하면 됩니까?”

“우선 발붙일 땅부터 선정해서 서방교의 세력 범위를 피해야겠지요. 그 밖의 조치도 어느 정도 생각을 해두었습니다. 이따가 한 번에 써드리겠습니다. 무릇 시작 단계가 가장 어려운 법입니다. 그렇다고 고수가 많이 필요치는 않아요. 사조와 사조부께서 총대를 메고 백 선생이 뒤에서 대국을 맡아주시면 저는 뒤에서 전면적인 계획을 총괄하면 어떨까 합니다.”

백택은 곧바로 이장수의 뜻을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었다.

“망정 전주(殿主)라. 이 이름이 참으로 마음에 드는군요. 듣자마자 무언가 좀 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망정 상인이 이맛살을 좁혔다.

“내가 무슨 덕이 있다고 전주의 자리에 앉는단 말이냐? 난 그저 산에서 수행하는 사람이다. 장생도과를 수행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해. 계략이고 통솔이고 하는 건 전혀 모른다. 다른 사람은 없느냐?”

“현재 천정에 가장 부족한 게 고수인지라 제가 신임하는 장생선은 사조부밖에 없습니다. 무족은 다소 총명하지 못하고 용족은 오만하며 다른 인교 선종은 저도 잘 모르기도 하고요.”

“하나······.”

망정 상인의 미간이 펴질 생각을 앉자 이번에는 백택이 그를 설득했다.

“수신의 신임을 얻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니 망정 도우도 그만 사양하십시오.”

“시작 단계를 지나면 전주는 뒤로 퇴장해도 됩니다. 게다가 전주는 명분상 얼굴마담일 뿐이고, 백 선생을 비롯한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논의해서 각 사무를 처리할 거고요. 어쨌든 망정 상인처럼 기개가 남다르고 영준하고 소탈한 장생선은 많지 않으니 임천전 병사 모집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네가 그리 말하는데, 내 어찌 거절하겠느냐.”

강림이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백택과 이장수도 금세 웃는 얼굴을 했다.

“저기!”

별안간 옆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줄곧 얌전하게 있던 주구가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나는 뭐, 도울 일이 없느냐?”

“사숙은 마음 쓰지 말고 산에서 마음 편히 수행하십시오.”

“공으로 먹고살기가 영 미안해서 말이야.”

사부님 앞이라 좀 민망한 모양인지 주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그리 말했다.

“제가 선인이 되지 않았을 때, 그리고 막 선인이 되었을 때 사숙께선 저를 비롯해 돌아가신 사부님을 많이 도와주셨지 않습니까. 소소한 일에 얽매이지 마세요.”

“제자들도 함께 데려가는 건 어떠냐. 주오는 경지가 부족하긴 해도 인정에 통달하여 사람을 사귀는 일에 능하다. 주의와 주구는 경지가 뛰어나 금선이 될 자질이 있다. 이 아이들이 임천전에서 일한다면 절로 기연도 늘릴 수 있지 않겠어?”

“내 말이! 내 절대 방해하지 않으마!”

이장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라는 한 마디에 주구는 기뻐서 껑충껑충 뛰었다. 그 모습이 조금은······ 웃겼다고나 할까.

······

임천전 초기 핵심 ‘멤버’를 결정할 무렵, 이장수는 평온한 소세계에 이르렀고 정신도 함께 옮겼다.

소세계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세 사람은 선병 부대에 가로막혔다.

남녀가 반씩 섞인 선병들은 경지가 하나같이 진선경이었고, 천선경 후기인 연기사 둘이 부대를 이끌었다.

변장이 앞으로 다가가 뒷짐을 쥐고 섰다. 두 다리를 쩍 벌리고 눈으로 멀리 은하수를 내다보았다.

드디어, 돌아왔다.

그런데······.

“도우는 도호가 어찌 되시오?”

“우리 천애각의 대능 옥패가 있소? 이곳은 천애각의 비경(祕境. 비밀스러운 장소)인지라 대능 옥패를 지닌 도우에게만 개방되니 양해 바라오.”

“대능 옥패라는 것도 만들었어?”

진천주의 말에 변장은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묵묵히 손으로 머리 모양을 바꾸고 손가락으로 눈꺼풀 아래를 두어 번 문질러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피로에 전 사람처럼 하품을 하면서 자신의 기운을 방출했다.

처음에 인상을 쓰고 관찰하던 천선들은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소각주! 소각주시군요!”

“소각주, 돌아오셨습니까! 어, 어서 각주와 어르신들께 소각주가 돌아왔다고 보고하라!”

이윽고, 소세계에서 휘황찬란한 빛들이 날아 나왔다. 개중에는 기식이 순수한 금선 고수도 꽤 있었다.

앞에 운무가 확 걷히고 다채로운 빛깔의 다리가 세 사람 앞에 나타났다.

변장은 몸을 살짝 틀고는 씩 웃었다.

“큰형님, 작은형님.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드시지요!”

진천주는 눈을 가늘게 접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고, 이장수의 종이 도인도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옆에서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이장수의 귓가에서 터졌다.

선식으로 살펴보니 소세계에 여기저기 펼쳐진 누각 가운데 회색 도포를 입고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도사 하나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자의 경지는······ 뜻밖에도 꿰뚫을 수가 없었다.

이장수는 인상을 쓰고 쳐다보았다. 그 도사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시선이 맞부딪혔고, 이내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주 대단한 종이 인형이로군. 홍황에서 경지가 있는 종이 인형 화신을 쓰는 건 수신 장경밖에 없지. 감히 운소 사저를 두고 이곳에 오다니, 우리 절교선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운소 사저? 절교 고수인가?

이장수가 선식으로 전음하여 물었다.

“도우, 존함이 어찌 됩니까?”

“구룡도(九龍島), 여악이다.”

헐!

온신이다!

물론 온신(瘟神)이라는 건 사실 좀 애매모호한 표현이다.

천정의 신선에는 복신(福神. 복과 행운을 가져다주는 신)이 있다면 자연히 재앙을 불러오는 온신도 있다. 천수에도 이득이 있고 손해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여악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이장수가 제일 먼저 보인 반응은 자칭 성인 이하 싸움의 제일이요, 남다른 독으로 주나라 대군을 압도한 봉신의 독 영감이었다.

구룡도는 금오도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도장으로 금오도보다 명성이 조금 약한 정도였다.

도사를 응시하면서 마음이 움직였는지 이장수는 웃으며 전음했다.

“도형,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말고 들어주세요. 저는 지금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자 온 겁니다.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만나서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사는 살벌하게 두 눈을 치켜떴다. 조금 화가 난 양 전음으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아느냐? 삼계에서 사랑놀음과 향락을 추구하는 땅으로 유명하다! 진심으로 장경 사제가 이런 품성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통탄스럽구나! 슬프도다!”

도사의 전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편에 드리운 휘장에서 묘령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선배님, 무얼 보셔요? 다들 기다리고 있답니다.”

“응, 지금 간다, 가.”

상냥하게 대답한 여악은 여인의 허리를 안은 채 누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마지막까지 이장수를 노려보며 전음으로 비난하는 건 잊지 않았다.

“자네가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 이런 곳을 찾아오다니!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삼선도에 계시는 사저들에게 알릴 것이야! 흥!”

그 말을 끝으로 소매를 탁 털고는 여인을 껴안고 가버렸다. 누각 주변에 대진이 가동되었다.

“······.”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정말로 공무를 처리하러 왔고, 정작 여악이 이곳에서 ‘소비’하는 것이지 않은가!

어째서 이리도 당당한 겁니까!

‘내로남불’의 주둥이를 보아하니 정말이지, 그쪽이 서방교 사람이 아닌가 의심마저 되는군요!

이장수가 손으로 머리통을 부여잡자 변장이 관심 어린 투로 물었다.

“작은형님, 어찌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이장수는 손등을 휘젓고는 옆에 있는 옥황상제의 화신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이 화신은 ‘화일천’이 아니라 딱히 남들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천지 사이에서 빈둥빈둥 지내던 공덕 금신 화일천이었더라면 들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이리라.

“절교선인가?”

“형님, 괜찮습니다.”

이장수가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변장과 함께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천애각 고수들을 맞이했다.

가족들에게 천정에서 사귄, 서로 지기로 여기는 형제들이라고 두 사람을 소개한 변장은 가족들을 보러 오는 김에 두 사람도 데리고 왔다고 덧붙였다.

변장의 대고모님들이 예를 행하자 이장수와 진천주도 능숙하게 화답하면서 소천 세계로 들어섰다.

선식으로 훑어보니 곳곳의 누각과 전당에는 대진이 겹겹이 처져 있었다. 토대를 구분할 수 없는 최소 백여 명의 고수가 향락을 즐기는 중이었다.

조금 전에 여악의 경지를 간파하지 못했던 것도 여악의 경지가 너무 높아서가 아니라 이곳에 배치된 각종 눈가림 진법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식이 정찰할 수 있는 ‘손님’은 대진에 가려졌거나 흐릿한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다.

아주 전문적이군!

이장수가 오늘 이곳을 찾아온 건 딱히 비밀이 아니었다. 비밀을 지킬 생각을 한 적도 없었고. 물론 여러 가지 따져본 후 내린 결론이었다.

‘천정이 삼천세계 세력을 흡수한다’라는 소식을 퍼뜨려서 상대의 관심을 끈 다음 분위기를 조성하고 세력을 끌고 와 임천전을 엄호하는 게 주된 생각이었다.

본래 이장수와 진천주는 천애각에서 현지 특색을 내와 그들을 대접하리라 여겼었다. 그러다 이어지는 상황에 이장수는 조금 안도했고, 진천주는 무료해졌다.

그들은 다소 외진 방으로 안내받았다. 전당 안은 음악이 감돌았고 깨끗하고 고상한 편이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구리거울에 방송할 수 없는’ 화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좌우를 둘러보면 미모의 소녀들이 자신의 몸을 꽁꽁 싸매고 있어 일말의 불량한 풍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이장수는 풍어주를 수동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아무런 잡음도 들리지 않고 바람이 전하는 건 은은한 가락뿐인지라······ 마치 그림 속 선경에 온 것만 같았다.

변장을 따라 후전에 발을 들였을 때, 화려한 도포를 입은 노부인이 노부인들을 이끌고 그들을 맞이하였다.

화려한 도포의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우리 큰 똥강아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어디 할미 얼굴 좀 보자. 천정에서 고생했어? 어찌 이리 말랐어? 천정에서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더냐!”

변장은 조금 민망한 듯이 대답했다.

“할머니, 형님들도 계시는데 똥강아지라고 부르지 마세요······.”

“형제들이 있다고 할미가 우리 강아지를 예뻐하면 안 되는 거냐?”

변 노부인은 책망하면서 변장의 손을 끌었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이장수와 진천주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이장수는 그제야 노부인의 기식이야말로 정말 꿰뚫어 볼 수 없을 정도로······ 고수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장수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변 노부인이 이내 싱긋 웃었다.

“귀한 손님이 찾아왔구려. 여봐라, 인봉루(引鳳樓)를 열어라.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내 명령이 없이는 그 누구도 들이지 말도록 해.”

뒤에서 화려한 차림을 한 중년 부인들이 나와서 허리를 숙였다.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부디 양해해주십시오.”

“그 무슨 말씀입니까. 누추한 곳이라 대접이 변변치 않으실까 염려됩니다.”

이장수는 공수하고 진천주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의를 잊지 마시게.”

진천주의 신분을 가려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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