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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형이 실력을 숨김 (516)화 (516/593)

이번 외출에서 옥황상제 3호 화신이 이장수에게 준 느낌은 다소 달랐다. 예전보다 훨씬 온화해졌다고나 할까······.

변장이 말실수를 하건 여악의 언사가 불경하건 진천주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넘어갔다.

마음속 수첩에 따로 기록해둘 확률이 아주 크긴 하지만, 확실히 전보다 무덤덤해졌고 여유가 생겼다.

대인배 진천주?

속으로 중얼거릴 뿐, 대놓고 전음으로 물을 순 없다. 게다가 당장은 여악의 토대를 살피는 게 급선무다.

기존 봉신 스토리에서 여악의 말로는 상당히 처참하다.

천교 3세대 제자들에게 미친 듯이 얻어맞은 그는 처음 하산했을 때 제자 넷을 잃었고, 두 번째 하산했을 때 경지도 별로 높지 않은 양임이 꺼낸 오화칠금선(五火七禽扇)에 재가 되어버렸다.

당시 여악과 함께 오화칠금선에 당했던 것도 여악의 두 사제였다.

그렇게 여악과 여악의 사제 두 명. 그리고 네 명의 제자는 천정 팔부 정신 중 온부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 각도에서 판단해보면 여악이 서방교와 관련있을 확률은 몹시 낮았다. 그러나 매사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 대겁의 내용이 바뀐 지금은 이장수도 감히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만림균 장로의 입에서 여악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만 장로는 여악이 쓴 독경 반 정도 읽고 난 후 독도에 관한 절교 연기사 여악의 조예를 더없이 떠받들게 되었다고 했다. 만 장로가 구상 중인 금선 독단의 경우, 여악이 정제한 제품은 일찌감치 홍황에서 전해졌다. 그 수가 몹시 드물 뿐.

이장수는 이래저래 따져본 후, 여악이 흥미를 느낄 만한 대화 주제를 찾아냈다.

“여악 사형, 아까 연단하면서 문제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입니까?”

여악은 꽤 나이 지긋한 얼굴에 우울감을 드러냈다.

“허허. 해묵은 지난 일이라 말할 것도 못 되네.”

딱 봐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역력하군.

“솔직하게 저도 연단을 아주 좋아하여 독단도 꽤 연구했었습니다. 이것 좀 보시지요······.”

이장수는 단약이 담긴 자기 병 두 개를 꺼냈다. 진천주에게 하나를 건네고 또 다른 하나를 선력으로 여악의 손에 건넸다.

여악은 자기 병을 열어서 코끝에 대고 킁킁거리더니 씩 웃었다.

“훌륭하군. 아주 튼튼하게 정제한 독단이야. 대충 천선 몇 명은 독살하겠어. 자, 이번에는 내 걸 좀 보게.”

여악은 소매에서 단약이 든 호리병 두 개를 꺼냈다. 진천주를 한번 쳐다보고는 선력으로 한 병을 밀었다.

이장수가 미처 조심하라고 일깨우는 것보다 진천주의 손이 훨씬 더 빨랐다. 옥으로 만들어진 호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옥황상제의 화신은 눈앞이 어지러워지면서 몸을 비틀거렸다. 얼른 온몸으로 선력을 퍼뜨려 호리병을 단단히 봉했다.

“콜록, 콜록콜록!”

진천주는 민망함을 잔기침으로 애써 숨겼다.

“엄청난 독단이군요. 대라금선도 원신이 다치겠습니다.”

여악은 담담하게 웃고는 손가락으로 흩어진 독무를 갈무리했다.

“천애각 미인들이 다치면 곤란하겠지요. 다들 경지가 그렇게 높지 않거든요.”

안전을 위해 이장수는 호리병을 열지 않고 돌려주려고 했다. 하나 여악이 오기로 손을 휘휘 저었다.

“호신용으로 쓰게. 사형이라 불리는 양반이 기껏 선물해놓고 다시 가져가는 도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장수가 꽤 정중하게 호리병을 자루에 담고 몸에 지는 걸 보며 여악은 빙그레 웃더니 당부 사항을 늘어놓았다.

“독단은 본디 단도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고 구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세상의 비난이 상당하지. 장경 사제, 자네는 천정 수신이고 인교에 둘밖에 없는 제자 중 하나야. 정말로 이길 수 없는 강적을 만났거나 곤경에 처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이 단약을 꺼내 보이지 말게. 우리가 음험한 수단으로 남을 다치게 한다는 소리나 들으면 대사백의 명성을 깎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충고 감사합니다, 사형.”

진천주가 들고 있던 호리병을 이장수에게 건넸다.

“수신 대인, 이것도 쓰십시오. 강적을 만날 상황을 대비하는 수단이 많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수하가 꽤 사리에 밝군.”

“······.”

어르신의 성정을 보아하니 이번 버전 봉신대겁에서도 천정에 가서 이 ‘수하’를 위해 심부름을 하는, 진정한 ‘수하’의 수하가 될 각입니다.

이장수는 웃으며 대충 낚아채듯 호리병을 받아들면서 여악 앞에서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어서 대화 주제를 매끄럽게 전환했다.

“사형의 연독 능력에 한참 못 미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독도 방면에서는 도문 삼교 내에서 사형이 독보적이지요. 사형, 그해 연단하면서 문제가 있었다는 건 독단을 정제하면서 그런 겁니까?”

“어휴······.”

여악은 길게 한숨을 늘어놓았다. 옆에 변 노부인이 남기고 간 찻잔을 흘끗하자 옆에 있던 변장이 눈치껏 새로 차를 내오도록 했다.

역시 인연 서비스 업계 선두주자의 도련님답게 기민함을 여기서 다 썼다.

“때는 상고였네. 당시 문에는 상고 짐승이었다가 둔갑 수행을 한 도려 한 쌍이 있었네. 둘 다 장생선까지 수행했고 자식을 가지는 게 그들의 염원이었지. 그들의 본체는 삼족 금두꺼비와 종달새였는데, 이미 금선까지 수행한 터라 자식을 가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 또한 사형껜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이 얘긴 그만하지. 듣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려서 말이야. 나는 추켜세워지는 게 겁나거든. 추켜세워지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 어쨌든 당시에 나도 얼렁뚱땅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고는 계속 연구했어. 무수한 선천 보재를 수집하고 패기롭게 연단을 시작했지. 그 결과 단약이 완성되려는 마지막 순간에······.”

“어찌 되었습니까?”

“단로가 터졌네.”

여악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때부터 삿된 기운이 내 원신을 더럽혔어. 천애각 같은 장소가 없었으면 내 사도에 발을 들여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를 일이네!”

진천주는 옆에서 웃으며 말을 더했다.

“말은 그렇지만 도우도 절제를 해야 합니다. 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도우는 이미 본원(本源)이 허약해졌어요. 대라금선의 경지에 이렇게 허약한 본원은 실로 드물지 않소이까.”

“상관없다. 법술 싸움은 경지가 중요하지 않네. 순식간에 장생선 수천 수백을 죽이는 것을 논한다면 운소 사저나 다보 사형도 내 손보다 빠르진 않거든.”

이장수는 웃으며 대화 주제를 다시 연단으로 가져왔다.

“풍월은 풍월이고, 저는 사형의 연독 능력을 더없이 존경합니다.”

여악은 한참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이장수를 쳐다봤다.

“여기서도 나름대로 즐거움을 얻었네. 무릇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사제가 수행한 음양의 도와 방법은 달라도 효과는 비슷하지 않은가.”

죄송하지만, 저희 태청은 점잖은 음양 대도거든요!

“얘기만 나누는 건 아래도 부족한 듯하군요.”

이장수는 그리 말하면서 옆에 서 있는 변장을 바라보았다.

“변장, 술상을 준비하라. 여악 형님과 술 좀 기울여야겠다.”

“이미 준비해뒀습니다. 바로 들이겠습니다.”

“아, 잠깐만.”

여악이 손을 들더니 변장에게 자신의 ‘대능 옥패’를 휙 던졌다.

“이걸로 계산하려무나.”

“그게······.”

변장이 난처해하면서 이장수를 쳐다보았다.

이장수가 여악의 독단을 상당히 칭찬하는 것을 들은지라 왠지 모르게 조금 주눅이 들었다.

“어찌 사형의 돈을 쓸 수 있겠습니까? 오늘 사형이 저를 성심껏 대해주었고, 단순히 이곳에 온 걸 모른 척해주겠다는 마음만으로도 퍽 감동했습니다. 변장, 옥패를 사형께 돌려드려라. 그 뒤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겠지?”

“압니다, 알다마다요.”

변장은 두 손으로 옥패를 받들고는 씩 웃었다.

“앞으로 여악 선배님은 천애각의 귀빈입니다. 여악 선배님과 사이가 좋은 누님들은 천애각에서 섭섭할 일도 없을 겁니다. 더불어 여악 선배님이 천애각에서 쓰는 비용은 전부 천애각에서 부담할 겁니다.”

“뭐라고? 참나!”

쾅. 여악이 탁자를 내리치고는 눈을 부라렸다.

“누굴 무시하는 것이냐? 내가 빈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변장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악은 정말로 분노하여 화를 퍼부었다.

“내가 지금껏 준 영석과 보물이 다 너희 천애각에 준 것인 줄 아느냐? 미인들에게 준 것이다! 그녀들은 남한테 얹혀사는 상황에서도 나를 반긴다. 나처럼 몸가짐에 신경 쓰지 않는 늙은 도사를 마주하는 게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이더냐. 어찌 재물의 원천을 끊을 수가 있겠어! 마땅히 받아야 한다!”

순간 눈이 마주친 이장수와 진천주는 왠지 모르게······ 그 말이 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은 좋은 일은 아니고 장려해선 안 되는 행동이었다.

홍황의 풍기에 일말의 이득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리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여악 말곤 없으리라.

“사형, 너무 겁주지 마십시오. 변장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들어보십시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사형과 사이가 좋은 선자들은 다른 이들은 만나지 않고 사형과만 사귈 겁니다. 사형이 이곳에 계시지 않을 때 선자들은 한가하게 수행하면서 영석, 보물을 얻는 셈이지요. 천애각에서 다 제공할 거고요. 이렇게 하면 만족하십니까?”

여악은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고 세세하게 따져보는 모습을 보였다.

이장수가 손등을 흔들자 변장이 고개를 드리운 채 명령을 이행하러 떠났다.

변장의 뒷모습을 보며 여악이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자네 수하는 대체 어떤 놈인가? 조금 전 대진에 들어올 때 소각주라고 불렸던 것 같은데······.”

“천애각 각주의 하나밖에 없는 손자로 현재 천정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천정을 위해 일할 뜻이 있는지 천애각의 의사를 물어보고자 온 겁니다.”

“천정에 여선인이 부족한가?”

“흠흠! 그건 아닙니다. 수신은 천애각을 기초로 삼천세계에서 세력을 모아 서방교와 맞설 생각입니다. 천정에 어찌 여선인이 부족하겠습니까? 부족하다고 해도 천애각에 와서 불러갈 정도는 아닙니다.”

이장수는 입을 떡 벌리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초리로 진천주를 쳐다보았다.

폐하, 아직 여악을 제대로 캐내지도 않았는데, 어찌 계획을 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러다 술이 좀 들어가면 임천전의 비밀도 더는 지켜지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진천주는 본인이 말을 좀 많이 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이장수를 쳐다보며 씩 웃고는 묵묵히 차를 마셨다.

“······.”

천제를 데리고 다니기 참 힘들군!

변장이 뛰쳐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화려한 옷을 입은 선자들이 산해진미가 든 쟁반을 가녀린 허리춤에 싣고 하얀 연기와 함께 사뿐히 다가왔다.

둥그런 탁자에 금세 서른 가지가 넘는 음식이 놓였다. 옆에 젓가락과 술을 들고 안주를 집어서 술을 채워 넣는 일을 하는 선자가 있었으나 여악이 손을 휘휘 저어 물렸다.

“장경 사제가 이러니 영 적응이 안 되는군. 다들 물러가라. 음식은 우리가 알아서 집어먹으면 돼.”

진천주가 변장에게 앉으라고 불렀다. 처음에 사양하던 변장은 이장수의 눈짓에 고개를 드리우고 여악의 옆에 앉아서 술을 채워주었다.

여악은 얼굴을 젊은 중년으로 바꾸고는 적극적으로 이장수와의 거리를 좁혔다.

한턱내는 입장인 이장수가 술잔을 들고 세 번 마시고 나면 저마다 한 번씩 술을 올리는 코너가 이어진다.

술이 뱃속으로 들이차자 여악이 먼저 물어왔다.

“장경 사제, 아까 서방교와 맞서겠다고 했지? 내가 독단을 좀 더 준비해줄까?”

이장수는 마음이 좀 흔들리긴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삼천세계에서 서방교와 암암리에 힘겨루기를 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친히 나서면 상황이 골치 아파집니다.”

“하긴. 대겁이 내려온 상황이라 신중할 필요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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