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형이 실력을 숨김 (566)화 (566/593)

수만 명의 선인이 ‘웅성웅성’하기 시작하면서 대회장은 시장통이 되었다.

연등은 두 눈에 금빛을 터뜨리며 벌컥 성을 냈다.

“이 사태의 원흉이 감히 패악을 부리러 오다니!”

진작 나서려고 했던 금령 성모와 조공명, 여악은 허보리의 화신이 좀 더 길길이 날뛰게 내버려 두자는 이장수의 전음을 들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낸 건 화해를 청하기 위해서요!”

선인들의 안색은 각양각색이었다. 연등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미간을 구기기만 할 뿐, 대꾸가 없었다.

금령 성모는 입꼬리를 삐죽이기만 하고 충동적으로 굴지 않았다. 심지어 몸을 옆으로 살짝 틀고 의자 팔걸이에 팔을 올려둔 채 느긋하게 허보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디 이따가 때려죽일 기회가 있길 바라면서.

허보리는 뒷짐을 지고 구름을 서서히 위로 몰았다. 연등과 같은 고도를 유지한 채 고개를 들고 고공에 있는 이장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아주 우습지 않소? 천정 신선은 구름 끝에 앉아 가볍게 감시하는 직권을 누리고 각 선사더러 천정을 위해 충성을 바치라고 하다니. 그래놓고 정작 천정은 인과도 묻히지 않고 죄업도 짊어지지 않는구려. 수신은 역시 수신이군요.

그 빼어난 수단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소이다. 하나 여러분! 천정이 정말로 여러분에게 약속했던 걸 주었소이까? 삼천세계가 정녕 오부주에 종속되길 바랍니까? 여러분은 천정과 수신이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제대로 알고는 있습니까?!”

아래에선 정적이 흘렀다.

“호오? 상세히 듣고 싶구려.”

이장수가 온화한 투로 묻자 허보리는 눈에 경계심을 드러내며 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 천정과 서방교는 대성을 위해 기운을 다투었고, 우리 서방교가 반응이 느려 천정이 우위를 점하였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대성한 천정은 시야를 삼천세계로 옮겼습니다.

여러분이 서방교에 맞서기로 마음을 정한 원인은 삼천세계에 있는 서방교의 세력이 여러분을 위협했기 때문이지요. 하나 지금 홍황 전체를 휩쓴 대겁은 천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로 옥황상제가 일으켰지요!

천정이 각지의 선도 세력을 모아 선맹을 결성하는 게 정말로 정의를 펼치기 위함일까요? 웃기지 말라고 하세요! 천정은 지들밖에 생각하지 않은 겁니다. 더 큰 계략이 숨어있겠지요! 정작 본인들은 병사나 졸개 하나 쓰지 않고 삼천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삼천세계에 있는 연기사의 실력을 깎으려는 속셈입니다!

설마 남섬부주야말로 인간족의 기운이 모인 땅이라는 사실을 잊은 겁니까? 우리 서방교가 대성하는 틀을 끊어버리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천정이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을 어디 쳐다나 봤겠습니까? 그렇지만 오늘 서방교는 한발 뒤로 물러날 생각입니다. 맹세도 할 수 있어요. 현존하는 향불 신국 외에 그 어떤 향불 신국도 확장하지 않겠습니다!”

열 명 중 서넛 정도. 선사들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허보리는 이장수를 쳐다보았다. 무어라 말을 꺼내면 반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장수는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모양인지, 아주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허!

“서방교가 향불 신국을 세운 건 교운을 안정적으로 다지려는 게 다였습니다! 도문은 강성하고 서방교는 척박하다는 건 여기 계신 여러분도 알지 않습니까. 하여 우리는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며 여러분의 원한을 샀습니다. 용서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나 도우들, 천정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부디 잘 생각해보세요! 기운일까요? 공덕일까요? 보물일까요? 아닙니다.

천정은 그런 것들은 전혀 부족하지 않아요. 그들이 필요한 건 대의와 질서입니다! 대의는 도우도, 나도, 선문도, 각 선국에도, 연기사들에게도 없소이다. 바로 수명이 백 년도 채 안 되어 속세에서 세월을 총망히 흘려보내는 범인에게 있소이다! 천정이 추구하는 질서가 일단 확립되면 여러분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 숙청되거나 와해되어 우리에게 살길이 없어질 겁니다! 천정은 옥황상제와 수신부터 천장, 천병까지 입만 열면 삼계 생명, 천하 창생을 위한 일이라고 하지요.

여러분의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고 복연이 두텁다고 한들 결국 범인과 같은 팔자입니다! 범인보다 못할지도 모르지요! 천정이 삼천세계에서 득세하여 안정적으로 발을 디디고, 서방교 향불 신국이 모조리 망하고 나면, 그때 천정은 과연 누구에게 손을 대겠습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좀 강하다고 자부하는 선도 세력이나 인물이 덕이 부족한가요?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천정의 적이 될 거고 여러분을 기다리는 건 어떤 말로겠습니까!

선계와 범계는 결국 다르다는 걸 잊지 마세요. 천도가 원하는 건 천지 안정이고 천정은 영원히 범인의 편에 설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천정과 수신이 이상을 완성하기 위해 쓰이는 바둑알이고, 도를 증명하는 사다리에 불과해요.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는 소립니다! 대세가 천정으로 흐르고 이를 막을 도리가 없다는 걸 압니다. 그렇다고 목을 빼고 가만히 죽기만 기다릴 수만은 없기에 서방교는 선맹 각 세력에 화해를 청하는 바입니다. 삼천세계의 세력이 연합하여 천정이 뻗는 마수를 막아야할 때입니다!”

허보리의 말이 끝나면서 심경에 변화가 생긴 선사는 열 명 중 대여섯으로 늘었다.

“아아······.”

구름 위에서 길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장수가 일어서서 허보리의 화신을 가만히 응시했다.

“수신, 천하 선인들이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소요하는 삶을 포기하는 게 범인을 위한 길이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요?”

“과연 대단하구려. 이런 피도 눈물도 없이 냉장한 말을 아주 버젓이, 그것도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꺼내니 말입니다. 지장 도우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쓰라리군요. 그날 윤회탑 앞에 도우도 있었을 것이오. 게다가 이렇게 당당하고 막힘없이 말을 늘어놓을 힘도 있으면서 그때는 차가운 눈으로 지장 도우가 몰락하기를 방관하기만 했잖소. 우애가 깊다는 서방교 덕에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합니다. 내 오늘 이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소. 선사 여러분,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이장수가 입을 열자마자 여러 개의 시선이 구름 위로 모여들었다.

왼손 검지로 아래를 살짝 가리키자 구름 계단이 천천히 펼쳐졌다. 층계를 밟고 내려가는 천정 보통 권신의 표정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백택은 선인들 틈바구니에서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를 걸었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 선인이 기대하는 것처럼 이장수가 허보리에게 어떻게 반박할지 궁금했다.

계략을 꾸미고 방법을 찾는 분야에서 백택은 이 자리에 있는 선인 중 가히 최고였다. 그러기에 조금 전 허보리가 한 말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도 잘 알았다.

허보리는 ‘선계와 범계는 결국 다르다’라는 모순과 천정이 줄곧 외치는 ‘약자를 보호한다’라는 구호를 틀어쥐고 삼천세계에 규모가 꽤 큰 선도 세력을 향불 신국과 하나로 묶고 천정과 대립하는 입장에 세웠다.

하필이면 허보리가 지적한 게 사실인지라 반박하기 까다로웠다.

“백 선생, 나가서 도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수신이 있는데 내가 굳이 보잘것없는 재주를 왜 보입니까?”

백택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선자가 보내온 술을 맛보았다. 꽤 달짝지근하군.

‘나서고 싶어도 반박하기가 어렵겠지만.’

물론 이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그래도 상고 10대 요수인데 체면이 있지.

이제 그 어려운 문제가 이장수 앞에 놓였다.

허보리의 주장에 반박해서 선도 세력들을 설득해야 한다. 승부를 가리는 건 중요치 않다.

허보리가 내뱉은 규탄의 말은 대의 앞에서 쉽게 무너질 만큼 약했지만, 확실히 선도 세력의 허점을 찔렀다.

이때 천정을 대표하는 이장수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막 내뱉을 수가 없었다. 큰 이익을 내놓고 사람들을 꼬드기면 천정과 서방교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게 됐다간 이어지는 허보리의 비난을 반박하기 더욱더 어려워진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능력 있는 서방교 성인 제자들이 하나로 뭉친다 면 실로 큰 재앙이었겠지. 지장이 허보리를 비롯한 이들에게 당하여 판에서 빠져나갔고, 서방교의 ‘기업 문화’가 옥신각신 암투를 벌이는 거라 다행이었다.

한 교파에서 두 분의 성인을 모시는 게 좋기만 한 것은 또 아니었다.

일단 연등을 이용해 각 방면과 갖가지 상황을 고려하기로 했다. 서방교가 비난한 ‘지점’도 물론 빠뜨릴 수 없다. 최대한 대입해서 풀어나가야 해.

상대가 허보리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그들이 꺼낼 수 있는 ‘법보’도 몇 가지로 한정됐고······.

이 자리를 빌려, 온 정신을 다 기울여 고민하느라 빠진 꼬마 선녀 남령아 씨의 머리카락에 정중하게 감사를 표합니다!

허보리를 상대할 수법에 궤변 한 세트를 마련했었다. 시선을 옮기고 서방교의 전과 기록을 열거하여 청중의 정서를 부추긴 다음 이상을 펼치고 약속하고 암시하여 연기사들이 공동의 적에 적개심을 불태우게 만든다. 그러면 허보리가 유발한 대립은 자멸하고 말 것이다.

즉각 실행하기 적합한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이장수는 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허보리가 오늘 제기한 문제는 예리했다. ‘선도 세력과 천정 사이에 타협 없는 모순 관계’를 지적했으니 말이다. 만일 궤변으로 상대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선인의 마음에 가시가 하나 남을 거고, 그럼 선맹 내부에도 균열이 생기면서 앞으로 크게 써먹기 어려워진다.

계단을 세 칸 내려오는 사이 타산이 섰다. 이장수는 입가에 미소를 걸고 소리를 냈다.

“허보리의 말은 반박할 가치조차 없군. 옳고 그름이란 마음에 달린 법이나 여러분이 천정을 오해하고 간사한 인간의 이간질에 당하는 일을 막고자 허심탄회하게 말하겠습니다.”

허보리의 화신이 냉담하게 말했다.

“수신, 벌써 인심을 현혹할 방법을 끝마친 모양이지?”

이장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딱히 손을 쓰거나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 옆에서 물과 똑같은 푸른빛이 스치고 정해신주 여섯 개가 허보리의 화신을 그 자리에 고정했다.

“조금 전 네놈이 허튼소리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는데도 우리 장경이 죽이지 않았거늘!”

허보리는 씩 웃더니 태평하게 눈을 감았다. 이미 승기를 거머쥐기라도 한 양 굴었다.

구름 계단을 밟은 채 이장수가 천천히 변론을 시작했다.

“조금 전 서방교 성인 제자는 천정이 범인의 편에 서 있는 게 인간족이 천지 주역이고 범인이 기운의 주체로 남섬부주가 인간족의 기운을 거의 다 모았기 때문이라고 했소. 일리가 있는 말 같지만 사실 지극히 황당무계한 소립니다! 여러분, 용족의 샘구멍이 서방교의 손에 파괴됐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때 서방교는 용족을 끌어들일 의도로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남몰래 사해 해족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켰소. 결국 용족은 격노한 나머지 되레 천정에 귀의했소. 서방교는 소위 대교파의 체면이라는 것 때문에 죄업을 휘감은 대요괴와 홍몽 흉수들을 소집하여 동해 샘구멍을 파괴하고 동해 용궁의 보물 창고를 빼앗아갔습니다.

샘구멍이 파괴되고 바닷물이 역류하여 동해에 해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소. 자신들이 태고에 저지른 죄업을 씻고자 무수한 용족이 샘구멍으로 달려갔다가 샘구멍이 일으킨 격류에 찢어 발겨졌소······. 당시 나는 정해신침이라는 보물을 꺼냈지만 그 보물로는 샘구멍을 일시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소. 그때 화일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정 장군이 육신을 희생하여 동해 샘구멍을 봉하였지요. 이로 인해 철저히 심복한 용족은 천정을 위해 힘을 보탰고, 그때부터 천정도 흥성하기 시작했소.”

이장수는 길게 숨을 내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름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고 큰 목소리로 물었다.

“여러분은 그 천정 장군이 누구인지 압니까? 또 어째서 샘구멍을 막았는지도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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