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그러느냐?”
현도 대법사가 다정하게 물어왔다.
“사형, 서둘러야 합니다!”
이장수의 손바닥에서 나온 음양의 기운이 태극도로 변해 대법사의 왼쪽 어깨로 돌아갔다.
“조금 전 제가 말한 위치에서 금시대붕조가 화를 당했습니다. 육신창이었습니다!”
흠칫 놀란 눈치를 보이던 대법사는 일말의 잔상도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건곤에 연달아 주름이 졌다. 대법사가 가동하는 선천 지보 태극도의 위력을 절반 가까이 보였다!
선인들은 이장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다보 도인을 필두로 다들 하나씩 질문을 던졌다.
“육신창이라고 했어?”
“육신창이면 태고 때 망가지지 않았나?”
“혼돈청련의 연근으로 만든 육신창? 과거 마조 나후의 무기였던?”
이장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현황탑이 원신 위에 떠 있고, 건곤척이 손바닥을 파고들면서 초조함과 허한 느낌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일을 지체하면 안 되니 구체적인 건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사형을 도우러 가야 해요. 엄청난 대능이 홍련을 노리고 있는 듯합니다. 종이 도인이 홍련이 있는 곳이라 의심 가는 위치를 지키고 있었는데, 조금 전 어느 허상이 쥐고 있던 육신창에 기습을 당했습니다. 금붕 원수는 그 육신창의 상대가 되지 않을 듯하여 사형께 지원을 요청했고요.”
이장수의 손바닥에 운무가 솟구치더니 빠르게 화면들로 응결되었다.
다보 도인이 도포를 휙, 털어 청동 수레 한 대를 꺼냈다!
“설명할 겨를이 없으니 일단 타라! 예서 말이 길어졌다간 홍련을 빼앗기고 만다!”
조공명, 이장수, 백택은 다보 도인을 따라 수레에 올라탔다. 광성자는 옥정 진인과 태을 진인을 쳐다보며 신신당부했다.
“괜히 무리하게 나서지 말아라.”
천교 고수 셋도 곧바로 따라갔다.
청동 수레가 출발하려는 찰나 경소와 귀령 성모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슬금슬금 옆에서 끼어들려고 했다. 하나 이장수가 했던 당부를 기억한 노군의 청우는 곧바로 달려가 팔을 벌리고 절교 선자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구름을 타고 갑시다. 사형들에게 폐를 끼치지 마시고요.”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다보 도인은 어느새 영보 수레에 시동을 걸었다.
전방의 건곤이 움푹 꺼지면서 커다란 동굴이 드러냈다. 수레는 휘황찬란한 빛으로 변해 그 속으로 들어갔고, 건곤은 순식간에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경소는 청우를 노려보았으나 노군의 탈것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불만을 담아 콧방귀를 뀌고는 귀령 성모를 끌고 윤회탑을 벗어났다.
도문 고수들이 떠나고 윤회탑은 급속도로 썰렁해졌다. 창틀 앞에 앉은 지장은 이장수가 조금 전 했던 모든 말을 짚어보며 속으로 기괴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체청?”
“묻지 마.”
체청은 얌전히 엎드린 채로 말을 이었다.
“이 일은 우리가 관여할 수 없어. 도문 대사형들로 충분해.”
지장은 미간을 찡그리고 생각했다가 다시 물었다.
“두 분 스승님의 계략이 있을까?”
“당연하지.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더 부추기는 거지.”
체청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키가 낮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겁이 오고 홍련이 나타날 거라는 소리에 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다 뛰쳐나왔잖아. 예로부터 홍황은 승자는 맑고 패자는 탁하다고 했어. 탁한 것이 모여 작은 산을 이룬다고 한들 더 강한 맑음을 어찌 이길 수 있겠어? 발악해봤자 헛수고야. 차라리 몸 둘 자리를 찾아 여생을 보내는 편이 낫지.”
“음?”
지장은 옆에 있는 푸른 털을 가진 커다란 개를 흘겨보았다.
“설마 나도 네가 몸 둘 자리라는 거냐?”
“그럴 리가.”
체청은 눈을 한 번 깜짝이고는 말을 바로잡았다.
“순전히 주인의 계략과 지모가 마음에 들었던 거지, 주인이 성인 제자라서는 절대 아니었어!”
“흥!”
지장은 소매를 탁 털고는 윤회탑 곳곳의 출입구를 닫고 눈을 감았다.
이 모든 일은 이제 그와 무관하다.
······
이장수를 비롯한 도문 선인들이 윤회탑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피바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직경 백 리가 넘는 거대한 소용돌이의 상공에서 현도 대법사가 온몸에 피를 단 금시대붕조를 든 채로 조용히 기다렸다.
태극도의 기운이 아직 흩어지지 않았고 뭉개진 살육의 기식이 곳곳에 맴돌았다.
아래 소용돌이 속 건곤은 자동으로 복구되는 중이었다. 아직 천도의 기운이 옅게 남아있어 마치 방금 천벌이 떨어졌던 것만 같았다.
건곤이 푹 꺼지면서 둥그런 굴이 생기고 청동 수레가 슝, 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보 도인이 커다란 손으로 영보를 갈무리하고, 일곱 명의 선인이 빠른 속도로 대법사의 곁으로 달려갔다.
“사형!”
현도 대법사를 부르며 이장수가 백택의 팔을 끌고 앞으로 향했다. 넋을 놓고 있던 현도 대법사가 뒤돌아 의식불명의 금시대붕조를 이장수의 앞으로 살짝 밀어 보냈다.
금시대붕조는 피가 낭자했다. 쇄자갑은 일찍이 망가졌고 긴 머리카락에도 혈흔이 잔뜩 묻어 있었다. 온몸에 스무 군데가 넘는 상처가 있었다. 대부분 깊게 찔리면서 입은 부상으로 상처 부위에는 검은 기식이 감돌았다.
다행히 원신은 가벼운 상처만 입은 터라 침습하려는 살육의 기운을 저항할 수 있었다. 몸속에도 약기운이 넘쳐흘렀다.
현도 대법사가 다소 멋쩍은 듯이 말했다.
“방심한 사이에 도망쳤다.”
“총 몇 명이었습니까?”
“너덧 되는 듯하다. 장경의 화신과 금시대붕조를 기습한 자는 일부러 우리의 시선을 끌 생각이었던 것 같다.”
“저쪽의 내력을 명확히 파악하셨습니까? 정말로 육신창이었나요?”
광성자의 물음에 현도 대법사는 짐짓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육신창은 육신창인데, 또 육신창이 아니기도 하다. 육신창의 남은 조각을 녹여서 새로 정련한 것이라 태고 육신창의 위력에는 못 미치더구나. 맞붙으면서 얼굴을 잠깐 내비쳤더니 금시대붕조를 홱 던지고 건곤에 어렴풋한 잔상을 남기고는 철수하더구나. 아직 형태를 이루지 않은 그 홍련이 그놈들에게 있다.”
이장수는 금시대붕조를 백택에게 맡기고 입을 열었다.
“홍련을 찾을 방법이 있습니다······. 사형, 제 종이 도인을 구하셨나요?”
대법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쪽에서 네 종이 인형을 가져갔다. 네 종이 인형이 가지고 있는 수납 법기에서 무언가를 찾을 모양이다.”
엥? 무얼 찾는다는 거지?
이장수는 이맛살을 구긴 채 되짚어보느라 눈에 불을 켰다.
수납 법기 중에 저쪽의 흥미를 끌만 한 게 뭐가 있을까? 늘 곁에 지니는 심화소? 독약? 불자?
아니, 다 아니다. 죄업을 휘감은 아흔아홉 개의 혼백이다. 홍련의 입장에선 몸을 보양할 수 있는 물건에 속하리라.
속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피바다 상공에서 왔다 갔다 서성대던 이장수는 아흔아홉 개의 혼백에 사과했다. 자신이 도리어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하지 않았는가. 하여 이따가 종이를 태워 제사를 올리겠다는 말도 했다. 금시대붕조도 중상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에 바짝 긴장했던 정신도 좀 느슨하게 풀었다.
최대한 빨리 홍련의 위치를 찾아내는 게 급선무다.
이장수는 광성자와 다보 도인을 바라보며 공수했다.
“번거롭겠지만, 사형들께서 각 동문 선인에게 피바다를 봉쇄하고 관련 없는 인물은 최대한 빨리 떠나라고 전달해주세요. 홍련이 폭발하면 경지가 좀 낮은 생명의 혼백을 집어삼켜 자신을 채울 수도 있다고도 말씀하시고요. 이치로 말이 통하지 않으면 그냥 쫓아내십시오. 저는 천병과 천장에게 곳곳에 가서 선고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알겠다!”
“그리하마!”
광성자와 다보 도인은 대답과 동시에 옥패를 발부했다. 이장수는 계속 왔다 갔다 서성대며 한참 고민하다가 종이 도인을 염라전으로 보냈다. 죄업을 휘감은 채 구석에 있던 혼백 몇십 개를 꺼내 다시 홍련을 수색할 준비를 했다.
마음속에 영광이 번쩍하고 눈앞이 밝아졌다.
그래, 공덕!
오른 손바닥에 금빛이 솟구치고 공덕으로 응결한 연꽃 한 송이를 꺼내 선력으로 감쌌다. 공덕 연꽃을 가지고 백 리를 이동한 그는 피바다를 마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미 알다시피 죄업과 공덕은 서로 상쇄할 수 있다. 십이품업화홍련은 죄업을 흡수하므로 공덕을 배척할 것이다. 아니지. 홍련이 공덕을 흡수하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굳이 공덕을 멀리할 필요까진 없잖아.
이렇게 단순하게 판단해선 안 돼.
뒤늦게 달려온 현도 대법사를 포함한 일행은 이장수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장수는 피바다 위에 책상다리로 앉아 조용히 골몰했다.
또 잠시 후. 피바다 가장자리에 세 여인이 나타났다. 하얀빛, 금빛, 옅은 푸른 빛이 전력을 다해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때,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이장수가 확 뒤돌아 소리쳤다.
“다보 사형, 공덕 영보 하나만 빌려주십시오!”
“흐음. 장경, 그렇게까진 할 필요 없다.”
“예?”
뒷짐을 진 대법사가 턱짓으로 서남쪽을 가리켰다.
“저쪽을 보아라.”
현도 대법사의 턱을 따라 시선을 옮긴 이장수는 이내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서남쪽으로 9만 리 떨어진 곳에서 새빨간 빛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 위로 끊임없이 광채가 용솟음쳤다. 무언가를 불러모으는 것처럼 말이다.
피바다 안, 수라족이 생활하는 각지의 ‘빈 섬’.
핏빛으로 두 눈을 가득 채운 수라족은 남녀노소, 경지를 불문하고 빈 섬을 빠져나왔다. 피바다 안에서 이룬 격류가 새빨간 빛기둥이 나타난 땅으로 향했다.
이장수는 빛기둥 아래가 어디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지난번 윤회탑을 찾을 때 뛰어들었던 위험한 장소. 수라족 고수가 사수하던 성이었다!
발붙이고 서면 사이를 가로막은 것들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피바다의 거친 파도를 관통하여 성 정중앙에 폐허가 된 대전 안,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도사와 곧 만개할 열두 개의 꽃잎.
물론 정말로 보이는 건 아니고 마음속에서 이러한 장면을 상상해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실제로······ 버려진 대전 안에서 검은 인영 넷이 네 개의 방향에 서서 장창을 끌어안거나 망가진 검을 쥔 채 곧 열두 번째 잎을 응집해낼 홍련을 바짝 주시하고 있다.
다만 홍련이 모은 죄업이 아직 부족한 탓에 열두 번째 잎은 늘 응결해내지를 못했다.
홍련 뒤에 명하 노조의 허상이 다시 나타났다. 하나 허상은 더없이 투명했다.
“정말로 그를 구할 겁니까? 괴롭힘을 덜 당한 거요?”
“그가 홍련이고, 홍련이 곧 그입니다. 상고에 한 약속으로 그도 우리를 지켰지요.”
장창을 안고 있던 검은 인영이 자루 하나를 꺼내 북 찢었다.
안에서 원구 형태의 법기를 꺼내 홍련 근처에 던졌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죄업의 힘을 홍련이 빠른 속도로 흡수했다.
그래. 없는 것보다는 낫지.
“백 선생, 지금은 어때요?”
“잠깐만요, 수신. 뭔가 느껴지긴 하네요.”
“어떤 느낌인지 상세히 말해줄래요?”
피바다. 새빨간 빛기둥으로부터 3천 리 떨어진 곳에 아홉 개의 인영이 백 장 너머에서 분주한 이장수와 백택을 조용히 주시하고 있다.
이때, 백택은 본체를 드러냈다. 이마에 난 뿔이 부단히 빛을 깜빡이고 온몸을 이루는 다채로운 빛깔의 긴 털을 나부끼며 피바다의 오수(汚水)를 십 장 밖으로 막아내는 중이었다.
대겁이 내려오고 천기가 뒤섞여 점복과 추산이 효력을 잃은 지금, 백택의 독특한 신통력이 더없이 귀중해졌다. 이에 백택은 상당한 부담을 느껴야 했다.
행여나 감응을 잘못했다가 뒤에 서 있는 도문 정상급 성인 제자들을 함정에 빠뜨릴까 봐 두려웠다. 여기 있는 성인 제자들은 삼교의 보물이다. 뜻밖의 재난이나 변고라도 생겼다간 성인 어른들이 그의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다 뽑아낼 게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감응하고 삼천 리 밖에 있는 그 성을 느끼려고 노력해보아도······.
“정말 아무런 위험한 느낌이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수신이나 도우들도 마찬가지로 앞에는 길한 것도 흉한 것도 없이······ 몹시 평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