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련 한 송이는 대전 가장 깊숙한 곳에서 활짝 폈다. 홍련 뒤에는 이장수가 십여 년 전 ‘천도 현몽’ 때 보았던 도사가 두 눈을 뜨고 있었다!
도사의 육신이 다시금 형체를 갖추었다. 그러나 기식은 다소 허하기 짝이 없었다. 반듯한 얼굴에 길고 가는 눈. 회색의 긴 눈썹에는 날카로움이 역력했다.
허상이긴 하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다.
태고 대능 명하 노조가 깨어난 것이다!
이 사실에 이장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나마 조금 놀랐던 건 홍련이 금방이라도 완전히 무르익으려는 듯 원만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홍련 아래에 있는 광구에는 서른 개 정도의 광점만 남아있었다.
이장수가 보는 앞에서 명하 노조는 손가락으로 광구를 살짝 가리켰다. 혼백 하나가 날아 나와 명하 노조의 입으로 들어가면서 허상에 녹아들었다.
먹었다.
비록 혼백이 명하 노조의 증폭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으나 이장수의 안색은 곧장 어두워졌다.
명하 노조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당대 수신이 내 부활을 막으려는가?”
이장수는 예의 바르게 되물었다.
“지난날 패망한 잔혼이 감히 하늘을 거스르고 운명을 바꾸려는 겁니까?”
명하 노조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서서히 걷혔다. 목소리도 좀 희미해졌다.
“수신은 오늘 패하면 인간족이 어떤 말로를 겪게 되는지 잘 알 텐데?”
이장수는 대답 없이 대전 언저리로 시선을 옮겼다.
철선 공주가 원도검을 꼭 끌어안은 채 그곳에 누워서 깊은 꿈에 빠져 있었다.
명하 노조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오늘 그 누구도 본좌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 한낱 도문의 신진 제자인 주제에 감히 본좌 앞에서······.”
“도우, 아직 잔혼이지 않소이까.”
이장수가 던진 말에 명하 노조의 말이 턱 막혔다. 이장수는 불자를 털며 태연자약하게 웃었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도우의 부활은 잔혼을 깨우는 수준에 불과하고, 십이품업화홍련을 본체로 하여 혼돈해로 가서 천천히 신혼을 채워야 할 터. 도우가 나에 대해 아는 것도 사실 도우가 빨아들인 수라족 혼백이 가지고 있던 나에 관한 기억이겠지. 맞소?”
“그렇다면 뭐 어떤가?”
“아닙니다.”
이장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있는 건 내 화신이고 본체는 태극도 아래 숨어있는데, 도우가 뭘 어쩔 수 있겠소이까?”
“허!”
명하 노조는 콧방귀를 뀌었다.
허상이 왼손을 펼치자 철선이 품에 안은 원도검이 핏빛으로 변하여 명하 노조 손바닥으로 날아왔다. 다시 검형을 응결한 다음 한참을 울어댔다.
그 위에 걸렸던 금제가 한층 한층 흩어지자 십이품업화홍련의 꽃잎이 흔들렸다. 기나긴 세월 동안 침묵했던 보검이 깨어난 것만 같았다.
바로 이때, 별안간 성 밖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려왔다.
성 외곽에 있는 백택을 비롯하여 열 명이 넘는 도문 고수에게 수라족 고수 수백 명이 공격을 퍼부었다.
몇몇 늙은 수라족이 온몸에 영롱한 빛을 반짝이며 빛기둥 근처에 있는 금시대붕조를 공격했다. 이에 금시대붕조는 잠시 피바다 물결을 일으키는 걸 멈추고 물러났다.
수라족 고수가 모조리 튀어나왔다!
“검······ 내 검!”
대전의 무너진 담벼락 아래 가장자리에서 철선이 깨어났다.
두 눈을 아직 뜨지도 않은 상태에서 얼결에 제 몸을 꽉 껴안았다. 그러나 품에 있던 검이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이장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가 은발 소녀를 더 쳐다보지 않았다.
내심 좀 놀라긴 했다. 스스로 깨어날 수 있다면······
유영구를 좀 아낄 수 있겠군.
철선은 열심히 두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홍련 뒤에 있는 원도검, 그리고 누가 원도검을 쥐고 있는지 확인한 후 격앙된 감정을 안고서 바닥에 꿇어앉아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부친······ 노조, 돌아오셨군요!”
명하 노조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은발 소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다시 이장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 천지 사이에서 도문이 이토록 오만방자하게 굴다니. 본좌가 부활하려는 걸 뻔히 알면서 고수들을 데리고 왔구나. 내가 부활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고 싶어서 말이다. 도문 제자는 정말이지 갈수록 못하는군.”
“명하 도우, 말할수록 양심에 찔리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태고 대능인데 체면을 좀 살피긴 해야지 않겠어요?”
이장수는 네 귀퉁이를 보며 웃었다.
“사실 나는 저기 있는 네 도우를 보러 온 거지, 명하 도우가 깨어날 줄은 몰랐소이다. 도우들, 홍련은 우리 도문에 크게 쓸모가 있으니 체면을 보아서라도 물러나 주세요. 그럼 도문도 여러분을 추살하지 않을 겁니다.”
말싸움에선 심리전이지!
구석에 있던 검은 인영들은 미동도 없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마 여러분은 성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여깁니까?”
명하 노조는 찬찬히 눈을 감고 대꾸했다.
“성인이 온다면 내 되레 물어볼 참이다. 같은 태고 생명인데 어째서 본좌를 이리도 난처하게 하느냐고 말이다!”
바로 이때, 대전이 흔들리고 위에서 빛들이 나타났다.
마치 별 먼지가 뿌려지듯 명하 노조의 잔혼으로 모여들었다. 명하 노조의 허상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속도로 한층 더 견실해졌다.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은발의 소녀는 몸을 떨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동공이 확 작아졌다.
파손된 대전 꼭대기 위.
피바다를 관통한 새빨간 빛기둥 주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수라족이 빛기둥으로 돌진했고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재만 남아 별빛이 되어버렸다.
이장수는 시선 끝으로 이곳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마음속에 남았던 의심도 다 사라졌다.
“명하 도우, 하나만 물읍시다. 도우는 수라족을 무어라 여깁니까?”
“수라족은 내가 만든 존재다. 설마 날 가르치려 들 작정인가?”
“수라족은 육도 윤회의 하나요. 도우가 만든 최초의 수라족은 도우의 분신이자 화신일 수도 있겠지. 하나 지금의 수라족은 9할 9푼이 육도 윤회를 통해 환생한 이들입니다. 이 점만 봐서라도 난 도우에게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고 박해한 죄를 물어 천벌을 내릴 수 있어요!”
“하하하, 하하하하!”
명하 노조의 얼굴이 살기를 띠었다. 두 눈과 미간에 혈흔이 스미고 등 뒤로 머리 세 개에 팔이 여덟 개 달린 흉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바로 오늘날 도문 제자란 말인가! 웃기는군! 본좌는 태고부터 상고까지, 무수한 생명을 죽였다! 살해로 도를 증명하고, 살해로 이름을 얻었단 말이다! 하늘이 나를 멸할 생각이라면 나는 하늘을 베어버릴 것이고, 땅이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면 땅을 갈라버릴 것이다! 그 당시 네 사형은 후토와 손을 잡았고, 또 천도가 뒤에서 지지하여 겨우 본좌를 몰락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감히 네가 본좌 앞에서 망언을 퍼붓는 것이냐!”
별빛이 또 한 차례 위에서 흩뿌려졌다. 끊임없이 이어질 형세였다.
성 외곽에는 싸움의 파동이 점점 더 격렬해졌다.
빛기둥 위아래로 수라들이 대거 달려왔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아무런 지각도 없이 새빨간 빛기둥 안으로 뛰어들었다.
십이품업화홍련은 원만해질 기미가 더 선명해진다.
명하 노조의 육신이 실체를 갖추어가면서 이장수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비아냥이 담겼다. 늙어 쭈글쭈글한 얼굴에 핏기가 생겼다.
이장수는 대책을 강구하려는 듯 살짝 인상을 썼다. 이때, 옆에서 느닷없이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조······ 모두를 살려줄 순 없는 건가요?”
“뭐?”
고개를 홱 돌린 명하 노조가 왼손을 높이 쳐들었다!
쾅!
굉음과 함께 철선의 자그마한 몸이 날아갔다. 무너진 담벼락에 부딪혀 나동그라진 채로 피를 토했다.
“본좌의 아수라가 언제 이리도 나약해졌는가! 너는 본좌의 딸이 될 자격이 없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철선은 다시 엎드려 명하를 향해 부단히 고개를 조아렸다. 말을 채 내뱉지 못할 정도로 흐느꼈고 눈에도 초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시간을 계산해본 이장수는 계속 입을 열고 명하 노조의 신경을 끌었다.
“명하 노조, 오늘 정말로 도우의 부활을 막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며칠 못 버틸 거요. 차라리 내기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이기면 도우가 십이품업화홍련을 주시오. 지면, 천정 수신은 도우를 포위하지 않고 이대로 물러나겠소이다.”
명하 노조는 코웃음만 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또 한차례 별빛이 뿌려졌다. 빛기둥 위편은 거의 인파로 가득 차 끊임없이 명하 노조의 잔혼을 채웠다.
태고의 흉악한 대능을 보자. 왼손으로 옆에 있는 법기 원구를 불러와 인간족 혼백 두 개를 꺼내 입에 밀어 넣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이장수를 바라보았다.
“본좌가 조금 전 얻은 기억에 의하면 너는 인간족 생사를 몹시 신경 쓰는 것 같군.”
“제가 인간족이라서요. 도우는 수라족의 생사를 아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군요.”
“본좌가 만든 존재인데, 살리고 죽이는 걸 내 마음대로 결정하면 안 되기라도 하는가?”
“저와 내기할 담은 없으시고요?”
“하찮은 애송이가 감히 본좌 앞에서 이 무슨 망발이냐! 도문 제자들이 올 때가지 시간을 벌 생각이라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내기를 하겠다면 어쩔 것이냐? 어디 말해 보아라. 어떻게 내기할 것이냐?”
이장수는 큰 손을 휘저었다. 소매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대전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주위에 깔린 신기를 깨보겠습니다!”
명하 노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대전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성 밖에서 굉음이 들려오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라족 고수의 기식이 연달아 폭발했다.
빛기둥에 도문 고수가 접근하지 못하게 막던, 실력이 조금 약한 수라족이 불에 뛰어든 나방처럼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다.
폐허가 된 대전 안.
다소 걸걸한 목소리가 구석에서 들려왔다.
“이건 본원신기다. 그 무엇도 깰 수가 없어!”
“호오, 그럼 내기하면 되겠네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재밌군. 그럼 어디 한번 해보지.”
“태고 고수께서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지요?”
“본좌에게도 위신이라는 게 있다.”
이장수는 목소리를 살짝 내리깔고 말했다.
“제가 시도하기 전에 거기 있는 인간족 법기를 좀 돌려줄 수 있겠습니까?”
명하 노조는 차갑게 웃으며 손가락을 살짝 흔들었다.
법기가 이장수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법기 안 혼백은 이제 스무여 개밖에 남지 않았다.
이장수는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법기를 소매에 집어넣었다.
네 귀퉁이에서 네 개의 시선이 이장수에게 떨어졌다.
새까만 긴 창을 짚고 있던 검은 인영이 조소를 흘렸다.
“신기를 풀 방법이 있다면서 어째서 지금까지 시간을 끈 거지?”
“이 방법은 도움이 좀 필요하거든요.”
이장수는 소매에서 옥패 하나를 꺼내 느긋하게 손에 쥐고 으스러뜨렸다.
“듣자 하니 환신의 본원신기는 워낙 현묘하여 수색할 수도, 잡을 수도 없다더군요. 환신이 목숨을 부지할 마지막 수단으로 깰 방법이 아예 없다고 하지요.”
구석에서 노티 나는 목소리가 대꾸했다.
“그렇다. 뻔히 알면서도 감히 내기를 하다니. 정말이지, 시간을 끌겠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이장수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할수록 목소리에는 점점 더 자신감이 깃들었다.
“뭐가 그리 급합니까, 도우. 이미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았고 시도했다가 결국 포기하기로 했어요. 내 지혜와 계략도 태고, 상고를 살아왔던 그 많은 고수와 비교할 수 없으니 그런 결론을 뒤집기란 힘들지 않겠습니까. 하나 바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성 담벼락에 사람이 더욱더 많아지지 않았습니까?”
대전 안. 검은 인영 넷과 명하 노조가 동시에 사방을 살폈다.
이장수가 말한 대로 십여 개의 인영이 더 늘어나 있었다.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이곳에는 본원신기가 있지만, 환신과 같은 흉수는 없습니다. 도우들의 신기는 마치 수량에 제한이 있는 것 같단 말이죠. 이곳은 유명이고, 유명에는 지부가 있습니다. 지부에 가장 많은 게 무엇일까요?”
“혼백?”
장창으로 땅을 짚은 검은 인영이 바로 대답을 가로챘다.
“사실, 도우들은 잘못된 선택을 했어요. 여긴 피바다 가장 깊은 곳으로 무언가 극단에 치달으면 반대 방향으로 전환되듯 피바다의 혼탁함이 줄고 맑은 기식이 늘었습니다. 일반적인 혼백도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죠.”
이장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면의 담벼락 위에 있던 이들이 동시에 나섰다.
자세히 보니 네 명의 염군이 각자 열네 명의 판관을 거느리고 곧바로 사방에 귀문(鬼門)을 세웠다!
귀문이 열리고 음풍이 휘몰아쳤다!
폐허가 된 성 전체가 순식간에 허상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이 허상들의 절반은 고개를 드리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갈팡질팡 어찌할 줄 모르는 눈으로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지부 특산, 남녀 원혼이었다!
염군과 판관들은 곧바로 법술을 펼쳤다.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음풍이 다시 불고 무수한 혼백이 귀문 안으로 거두어졌다.
그런 다음······ 염군들이 귀문을 들쳐메고 곧장 피바다로 들어가 쏜살같이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