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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좋은 사람 (1/85)

제1화. 좋은 사람2021.11.01.

16548710365914.jpg“아……. 대표님.”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정신이 없어 계단으로 뛰어온 도아가 숨을 할딱이며 시우를 불렀다.

16548710365919.jpg“왜 이렇게 빨리 왔어?”

물줄기가 가득 서려 있는 창을 주시하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16548710365914.jpg“제가 핸드폰을 바꿔서 놓고 갔습니다. 그래서. 가지러…….”

도아는 머리와 가슴. 양쪽에서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자신이 핸드폰을 두고 갔던 곳부터 빠르게 방 안을 훑기 시작했다. 층계를 오르는 와중에도 그가 메모를 보지 않았을 거라는 미약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실낱같던 바람은 단 한마디에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16548710365919.jpg“여기 있어.”

선선한 목소리가 나비처럼 날아와 귀에 안착했다. 애타게 찾는 물건이 그의 손에서 인질처럼 숨죽인 채 잡혀 있었다.

16548710365914.jpg“보, 보셨어요?”

흠칫 놀란 도아가 불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목소리를 꾹 누르며 침착하게 물었다.

16548710365919.jpg“뭐를?”

16548710365914.jpg“뭐, 그러니깐 제가 적어 놓았던 개인적인 코멘트 같은…….”

16548710365919.jpg“아까 고기 맛있게 먹던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난 아주 질겅질겅 씹히던데. 말고기쯤 됐나 봐? 아, 여물 먹었으니 소려나?”

봤구나. 도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16548710365914.jpg“죄송합니다.”

핸드폰 메모장에는 자신이 비서로 일하며, 회사 대표인 시우를 험담한 내용이 한가득 적혀 있었다.

16548710365919.jpg“다른 할 말은?”

16548710365914.jpg“제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16548710365919.jpg“뭐, 나라님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하는 법이니.”

16548710365914.jpg“하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바닥이 닳도록 싹싹 빌겠다 결심했던 각오가 무색해질 만큼 너그러운 태도에 불안한 마음은 더 커졌다. 그럼에도 이 대화가 조속히 끝나기를 바랐기에,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상사의 기분을 맞추고자 노력했다.

16548710365919.jpg“하지만 도아 씨는 들켰으니 상황이 다르지.”

시우가 거만한 자세로 핸드폰을 세워 탁탁 두드리다 그런 반응은 재미없다는 듯 내려놓았다.

16548710365914.jpg“대표님. 제가 그때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16548710365919.jpg“이걸 쓸 때마다 미쳐 있었다? 양이 꽤 되던데, 그럼 회사 생활 불가능한 거 아닌가.”

빈정거리는 말투가 도아의 속을 긁을 때마다 원피스 자락을 쥐고 있는 주먹에는 힘이 들어갔다. 차마 타인에게 보스를 흉볼 수 없어 선택한 방법이었다. 누군가와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 역시 없었다. 무엇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감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16548710365914.jpg“아뇨. 그게 그렇다는 게 아니고요.”

16548710365919.jpg“그래. 말해 봐. 자세히 설명할 기회를 줄게.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이 일은 없던 일로 해줄 수도 있어.”

설명?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을 뿐. 내 눈에 당신은 그렇게 보였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사실 그렇게 보려고 애쓴 거였어. 당신을 좋아하게 될까 봐. 네가 날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나만 널 좋아하면 너무 슬프잖아? 대표를 싫어하는 직원이라는 오해를 받는 것이 싫었지만, 이런 제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게 엉망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저토록 여유로우니 속에서는 점점 더 열불이 터졌다.

16548710365914.jpg“솔직히 제게 친절하셨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처 주는 말도 많이 하셨고요. 답답해서 쓴 것이었습니다. 공유할 마음은 절대 없었습니다. 지금 상황에 화가 나시면 차라리 그냥 소리쳐서 혼내시고 그에 합당한 징계를 내리시면 좋겠습니다.”

16548710365919.jpg“그러면 이렇게 또 메모를 적을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그럴 순 없지.”

16548710365914.jpg“메모를 마지막으로 적었던 것은 한 달 전입니다. 지금은 대표님이 무어라 하셔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16548710365919.jpg“내가 뭐라고 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16548710365914.jpg“네. 저한테 물을 뿌리셔도, 화를 내셔도 저는 이제 아무렇지 않습니다. 제 인생에 영향이 없으니, 메모를 남기는 일도 없을 겁니다. 다시는.”

16548710365919.jpg“그래. 그렇단 말이지.”

16548710365914.jpg“네. 그러니……. 그냥”

16548710365919.jpg“그다지 합당한 이유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하지?”

비서가 악을 쓰며 사죄의 미소를 유지할수록, 시우는 재미있다는 듯 더 기운차게 도아를 궁지로 몰고 갔다.

16548710365914.jpg“대표님, 지금 하는 행동이 속 좁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16548710365919.jpg“속이 좁아?”

16548710365914.jpg“네. 죄송하다는 마음을 받아줄 마음 자체가 없으신 거 같습니다. 그냥 대표님 편한 대로 하시죠.”

16548710365919.jpg“우리 비서님께서 사과하는 것에서 말대답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셨나 봐?”

16548710365914.jpg“사과가 안 통하니 이렇게라도 해야죠.”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빗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16548710365919.jpg“그럼, 이렇게 욕만 하지 말고 한번 가지고도 놀아보지 그랬어.”

그러다 툭,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며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16548710365914.jpg“네? 대표님을요? 제가?”

도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과 함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16548710365914.jpg“그건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16548710365919.jpg“글쎄. 넘어갔을 수도 있지.”

그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넌지시 웃자 도아의 속눈썹이 잘게 떨려왔다.

16548710365914.jpg“왜…… 왜요?”

16548710365919.jpg“예쁘니깐.”

적당히 흔들리던 갈색 눈동자는 이제 정처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 말이 은밀한 농담처럼 농후하게 들렸다. 도아의 얼굴 전체가 순식간에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당황한 마음에 쭈뼛거리다 일단 긍정적인 말로 상황을 넘기기로 했다.

16548710365914.jpg“하하. 감사합니다. 한시우 대표님은 비서가 실수를 해도 예쁘다고 칭찬해주시는, 몸과 마음이 아주 훌륭한 분이십니다. 제가 그것을 미처 몰라보았습니다.”

16548710365919.jpg“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는지?”

16548710365914.jpg“그러게요. 저도 모르게 궁금해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니 아니,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떠올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 미치겠네. 뭐 이딴 말을 주절이고 있는 거야. 뒤늦게 자신이 내뱉은 말이 궤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다행히 시우는 별로 동요하지 않는 듯했다.

16548710365919.jpg“그러고 보니 내 몸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16548710365914.jpg“그……. 메모를 열심히 보셨나 봐요.”

16548710365919.jpg“봤지. 아주 꼼꼼히.”

내가 왜 그런 말들을 적었을까. 지난 날이 후회가 되어 한겨울 파도처럼 매섭게 밀려왔다. 미동 없는 검은 눈동자를 볼수록 점점 더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 들어 목덜미가 빳빳해졌다.

16548710365914.jpg“그 궁금하다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아름다운 것을 보면 호기심이 생기는, 뭐, 본능 같은 거랄까요?”

어떻게든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꺼낸 말은 더 가관이었다. 손안에 잡혀 있는 게 원피스가 아니라 연필이었다면 진즉 부러지고도 남았을 만큼 힘이 들어갔다. 시우는 그것이 재밌는 듯 싱긋 짧게 미소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는 표정과 상반되어 더 말끔하고 차분해 보였다. 도아를 떠나지 않던 날카로운 눈동자는 잠시 허공으로 향했다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16548710365919.jpg“그럼, 확인해봐.”

여전히 얄밉도록 탐나는 얼굴과 몸을 가지고, 유혹하듯 입매를 올리는 모습에 도아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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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개월 전

16548710365914.jpg“이도아라고 합니다. 대표님의 비서로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도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당차게 인사했다. 유리로 된 벽면으로 아침결의 햇살이 가득 들어올 쯤이었다. 시우는 미세하게 구겨진 도아의 미간을 시작으로 유난히 투명한 갈색 눈동자, 핏줄이 보일듯한 하얀 피부까지 잔잔히 살폈다. 도아는 이런 과잉 충성 발언이 나오게 된 것은 자신을 탐색하는 듯한 저 시선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불편한 상황 속에 손끝이 곱아드는 기분이었다.

16548710365919.jpg“네. 저도 잘 부탁합니다.”

단정한 음색이 침묵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력서와 실물을 번갈아 보던 그가 성실성이 다분해 보이는 사원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16548710365919.jpg“업무 분장에 나와 있는 일만 해주면 됩니다. 제가 따로 일을 시키는 경우는 많이 없을 겁니다.”

미소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간결하고 부드러운 어투가 도아의 굳어 있던 마음을 살살 달랬다.

16548710365919.jpg“호칭은 비서와 이름 중에 무엇이 더 편한가요.”

이어 예의 바르게 물어왔다.

16548710365914.jpg“아……. 이름이 좋습니다.”

이곳에서 하루빨리 내려갈 생각이 가득한 그녀에게 비서라는 호칭은 달갑지 않았기에, 아마도 그래서 이름을 택했다.

16548710365919.jpg“그래요. 나가보세요.”

시우는 짧게 한마디를 더 건네고는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도아는 자신을 보지 않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인 후 차분히 몸을 틀어 방을 빠져나왔다. 짤막한 첫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16548710509081.jpg“어때? 괜찮은 분이지? 소문만큼 무섭지 않지?”

어쩌면 도아보다 더 긴장했던 인사팀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등을 툭툭 쳤다. 신입사원의 의욕 넘치는 소개가 꽤나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홀리기라도 했던 건지, 시우와 인사를 하는 동안 그녀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16548710365914.jpg“……네.”

진정된 눈동자를 굴려 집무실 쪽을 힐끗 보고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입사 3개월 차인 자신이 이곳에서 회사 대표에게 인사를 하게 되리라는 상상조차 못 했다. 찬 기운을 머금은 봄바람을 맞으며 출근을 했고, 전표작성을 하기 위해 키보드에 막 손을 올렸을 때 인사팀장이 자신을 찾아왔다. 사람 없는 회의실에서 과분한 칭찬을 하는 그녀가 이상하다고 느낄 찰나, 본론을 들을 수 있었다.

16548710509081.jpg‘지금 비서실에 인력이 없어서. 도아 씨처럼 똑 부러지고 일 잘하는 사람이 가주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어.’

비서실. 다른 곳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 회사에서는 결코 좋은 곳이 아니었다. 굵직한 직무는 전략팀에서 수행하고 있으며, 비서는 정말 간단한 업무들만 담당하고 있었다. 글로벌 퍼니싱 기업 에이치는 5년 전, 한국에 상륙했다. 초반에는 젊은 나이에 한국 지점의 수장이 된 그를 향한 우려 섞인 목소리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오픈한 매장은 단일 매장으로는 최대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 4번째 지점이 오픈예정이었다. 온라인 시장 확장과 맞물려 에이치 코리아는 업계 탑 3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한시우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던 비서는 3년 동안 일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 후로 채용된 사람들은 길어야 6개월이었다. 대표에게 눈도장 한 번 찍히겠다고 알짱거리다가 그 성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영원히 회사 밖으로 가게 될 거란 이야기는 에이치코리아 직원이라면 누구나 아는 소문이었다.

16548710365914.jpg‘팀장님, 그럼 새로운 비서가 뽑힐 때까지만 일하면 되는 걸까요?’

16548710509081.jpg‘이건 부서 이동이야. 따로 비서실 채용공고가 올라가지는 않을 거야. 개별 채용보다는 도아 씨처럼 공채로 들어와서 동기도 있고, 교육도 받은 사람이 애사심도 있는 법이니깐.’

차라리 채용공고를 계속 올리면 평판이 나빠져서 내부적으로 인사이동을 하기로 했다고 말해주었다면 기분이 조금 괜찮았을까. 왜 하필 자신일까. 고민하던 도아는 한 번 더 물었다.

16548710365914.jpg‘저, 팀장님. 실례지만 제가 가게 된 이유가 따로 있나요?’

16548710509081.jpg‘이유? 당연히 일을 잘해서 그렇지. 대표님은 일 못 하는 사람 정말 싫어하거든.’

일을 잘해서? 이미 4년 동안 일한 경력이 있음에도 워라벨이 보장되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 이곳에 지원했다. 삼 주에 걸쳐 교육을 받고, 동종 업계 조사를 다니고, 부서 로테이션 동안 사무보조를 하며 전략팀에 배치를 받기까지 도아는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비서실이라니. 이곳에서 승진이나 할 수 있을까. 비서직은 이직할 때 근무부서가 달라서 경력으로 인정이 안 될 것 같은데. 인자한 웃음과 강압적인 명령을 교묘히 섞어가며 말하는 태도가 청소할 때 틀어놓는 화면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도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녹슨 나사처럼 뻑뻑해진 고개를 겨우 끄덕이며 알겠다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기분으로 올라왔다. 그래서 이상했다. 분명, 그냥 인사만 나누었을 뿐인데. 마음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가벼워졌다. 좋은 사람일까? 상앗빛 대리석 복도에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울리는 와중에 도아의 마음속에 작은 기대감이 새싹처럼 포로롱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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