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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봄날 (2/85)

제2화. 봄날2021.11.05.

이도아. 이도아는 고래다. 정확히는 칭찬에 춤추는 고래. 그녀가 처음부터 칭찬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도아가 초등학교 때 부모님은 치킨집을 개업했다. 분식집, 피자집 실패에 이어 마지막으로 개업한 가게는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하듯 대박집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나가서 가게를 청소하고, 닭을 초벌했다. 어머니는 오후에 나가 새벽까지 장사했다. 도아가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는 가게에 나가서 없었고, 어머니는 항상 잠들어 있었다. 부모님은 일에 치여 도아에게 관심을 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도아가 부모님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단지, 조금 외로울 뿐이었다. 중학생이 되고 반에서 1등을 한 날, 도아는 부모님에게 칭찬을 받았다.

16548710774807.jpg“우리 딸, 혼자서도 이렇게 잘하다니 정말 대견하구나!”

노력하고, 성취하는 것을 좋아했으나 어디까지나 본인의 만족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몽글몽글하고, 겨울 같던 마음에 봄이 찾아온 듯했다. 새로 돋아난 어린잎들이 초록 물결을 만들었고, 도아는 그곳에서 물고기가 되어 기분 좋게 헤엄쳤다. 그날부터 칭찬은 도아의 원동력이고, 삶의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생각했다. 노력하면 인정받고, 칭찬받을 수 있을 거라고.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 인사팀장은 15층의 구조와 비품 위치, 간단한 업무들을 설명해 주고는 사무실로 내려갔다. 혼자가 된 도아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자리에 앉았다. 몇 시간 사이에 벌어진 상황을 정리하기에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탕비실로 가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 한 병을 집어 들고, 벌컥벌컥 마시며 자리로 돌아왔다. 의식처럼 경건하게 머리를 묶고, 비서실 업무가 정리된 프린트물을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16548710774815.jpg“신입 교육 때 배워두었던 것도 있고,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네.”

큰 실수만 안 한다면……. 뭐 애초에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실수하기도 어려운 업무들이었다. 일이 좀 힘들어도 칭찬 한마디면 힘이 불끈 솟는 성격이었다. 대표의 따뜻한 격려를 직접 듣게 된다면 애사심이 폭발할 것이 분명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문에 너무 치우쳐 있었던 건지,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나쁜 사람 같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깝게 느껴졌다. 아무리 희망 없는 비서실이라곤 하지만, 대표를 돕는 일인데 득보다 실이 많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자신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무사히 지내다 다시 전략팀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도아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면, 대표가 얼마나 칭찬에 인색한지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생수병에 담긴 물과 걱정이 바닥을 보일 무렵에야 도아는 옥상정원이 얼마나 훌륭한지 실감했다. 15층의 구조는 간단했다. 로비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긴 복도가 보였다. 복도 왼편으로는 로비부터 이어지는 정원이 자리잡고 있었고, 오른편에는 비서실, 회의실, 응접실, 탕비실과 같은 도어 사인이 부착된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복도의 제일 끝에 있는 문을 열면 비서가 앉는 프런트 데스크와 집무실 입구가 나왔다. 특히, 비서실은 복도 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정원의 모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앙상한 가지 위로 반질거리는 어린잎들이 솟아오른 모습에 빠져 있을 때쯤, 짐이 가득 들어 있는 플라스틱 박스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입사 동기인 주혜였다.

16548710774815.jpg“어. 주혜야.”

16548710774829.jpg-언니! 괜찮아요? 갑자기 인사이동이라니!!!

큰 목소리에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땐 도아가 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16548710774815.jpg“괜찮아, 괜찮아. 근데 어떻게 알았어?”

16548710774829.jpg-벌써 메신저로 소문 다 났죠. 대표님이랑 인사했어요? 어때요? 소문만큼 무섭죠?

16548710774815.jpg“아니야. 인사 나눴는데, 좋은 분 같아.”

16548710774829.jpg-……좋다고요? 그럴 리가……. 진짜로요?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내려올 수 있죠? 오늘 다 같이 점심 먹기로 했잖아요.

그래. 점심. 도아는 시계를 힐끔 바라보며, 대표의 식사를 준비하는 위대한 첫 임무를 잘 해내리라 주먹을 불끈 말아쥐었다.

16548710774815.jpg“첫날이라 어려울 것 같아. 난 다음에 같이할게.”

16548710774829.jpg-회사 진짜 너무해! 언니가 전략팀 가서 얼마나 좋아했는데. 흑. 으아앙

주혜는 감정 표현이 풍부했다. 조금만 화가 나도 울고, 조금만 재미있어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이도 기수 중 제일 어렸기 때문에 귀여움을 한가득 받았다.

16548710774807.jpg-도아야. 주혜 또 운다. 하여간 애가 여려.

16548710774815.jpg“또? 난 오늘 못 갈 거 같으니 네가 위로 좀 잘해줘.”

16548710774807.jpg-그래. 알았어. 이왕 간 거 잘 적응하고. 수고.

16548710774815.jpg“응.”

울음이 터진 주혜를 대신해 다른 동기가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도아가 픽 웃으며 고개를 들어 다시 정원을 건너보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빈 물병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한시우 대표. 마치 숲속에서 유유히 모습을 드러내는 최상위 포식자처럼 여유롭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시우가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아직 잎이 오르지 않은 가지들 사이로 그의 모습이 조각조각 나누어져서 움직였다. 걷어 올린 셔츠와 호스를 쥐고 있는 단단한 손에 시선이 쏠렸다. 자세히 보니 기다란 워터 호스를 손에 들고 나무와 흙을 살피며 정성스레 물을 주는,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모습이었다. 적당히 날렵한 턱선부터 햇빛에 닿아 살살 흔들거리는 머릿결까지. 따로 떨어트려 놓고 보아도 감탄이 나올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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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아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뚫어지게 시우를 감상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 인수인계서에 대표가 직접 나무들을 관리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당연히 비서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언질 역시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점심 식사도 확인해야 하고, 무엇보다 흙을 만진 손으로 인해 옷이 더럽혀질까 걱정되었다. 긴장된 마음을 안고, 로비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문을 힘껏 열었다.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차량 소리와 높은 곳을 휘젓고 다니는 바람이 거세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완연한 옥상정원의 한 가운데, 그녀의 눈에는 시우만 보일 뿐이었다.

16548710774815.jpg‘나무에 직접 물을 주다니 멋지십니다.’

16548710774815.jpg‘정원이 너무나 훌륭합니다.’

발걸음을 옮기며 머릿속으로 대표에게 직원으로서 호감을 표현하기 위한 몇 가지 대사도 떠올렸다.

16548710774815.jpg“대표님.”

도아가 먼발치에 서서 시우를 불렀으나 요란한 바람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몇 걸음 옮길 때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뒷모습에 새삼 그의 큰 키가 실감이 났다. 시우의 살결을 스치고 도아에게 이른 바람은 인사할 때 의식했던 시선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조금씩 좁혀진 사이는 마침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되었다. 숨을 고른 후 물티슈를 앞으로 내밀며 한 번 더 시우를 부르려는 그때, 갑작스러운 오한이 도아의 온몸을 휘감았다.

16548710774815.jpg“대표……!!!!”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땐 이미 도아의 얼굴 위로 차가운 물줄기가 거칠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 한시우는 나무를 좋아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몇십 년, 몇백 년 살아가는 초록 생물은 자신의 채우지 못하는 공허함을 메꾸어 주었다. 출근하자마자 줄곧 모니터를 보며 일을 하던 시우는 등받이에 몸을 가볍게 기댔다. 뻐근함에 할 수 없이 감았던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고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에서 정원으로 바로 연결된 문을 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호스릴에 감겨 있는 호스를 풀었다. 그러고는 흙에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습도를 확인하고 적당하게 물을 주기를 반복했다. 햇볕은 따뜻했지만 바람은 차가웠다. 올라왔던 결재 건들을 가만 되뇌던 머릿속에 대뜸 도아가 떠올랐다. 3년 동안 함께 일했던 비서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새로 입사한 비서들은 하나같이 문제를 일으켰다. 다른 중요한 업무도 많은데 그런 일로 속이 긁히니 여간 짜증이 나는 게 아니었다. 시우의 눈치를 보던 인사팀장이 내놓은 해결책은 신입사원 중 한 명을 비서실로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시우는 알아서 하라고 대답했다. 그게 어제저녁이었으니 오늘 인사를 하러 온 사원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셈일 텐데, 예쁘장한 가면을 쓰고 웃었다. 핵심 부서에서 힘없는 비서가 되었으니 속이 말이 아니게 상했을 텐데. 이도아. 누굴 속이려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던 시우는 이어지는 상념을 끊어내며 다른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손을 옆으로 뻗었다. 평화가 깨진 것은 찰나였다.

16548710774815.jpg“님!!!”

16548710774815.jpg“대표님!!!!”

다급하고 간절한 외침에 나뭇잎을 살피던 고개가 저절로 움직였다. 시우의 눈앞에 물을 뒤집어쓴, 정확하게는 자신이 물을 뒤집어씌운 도아가 원망과 당혹감이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힘겹게 시선을 마주치던 도아는 따끔거리던 눈을 질끈 감으며 돌아서다 그만, 발 앞에 놓인 화분에 걸려 고꾸라지듯 찰박 엎어져 버렸다. 넘어진 그녀는 아침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흐트러진 모습이 되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물에 잔뜩 젖은 채 힘없이 주저앉아 가쁜 숨만 색색 내쉬었다. 무릎에선 선혈이 흘렀다. 시우는 그제야 호스를 들고 있던 손을 아래로 툭 내렸다. 호스 헤드는 아직도 차가운 물을 반짝이며 쏟아 내고 있었다. 셔츠 원피스는 도아의 몸에 달라붙어 선명한 곡선을 만들었다. 눈을 찌르던 불편한 물줄기가 사라지자 떨리는 눈꺼풀을 올려 자신에게 물을 뿌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황당하거나 미안한 표정을 지었을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시우는 더없이 무감한 시선으로 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48710844737.jpg“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당황한 기색 없이 크고 긴 손으로 호스 헤드를 달칵 잠그며 물었다. 걱정되는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을 향해 수치심이 일기 시작했다. 손과 무릎에 피가 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16548710774815.jpg“그게. 대표님 손에 흙이 묻었길래 물티슈를 드리려고.”

찬바람이 도아의 살갗을 스치자 젖은 몸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쿵쿵. 심장이 온몸에 강한 진동을 만들었다. 이어서 여진처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대답하는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떨렸다.

16548710844737.jpg“제가 업무분장에 나와 있는 일만 하라고 했을 텐데요?”

시우는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 괜찮냐는 말이 먼저 아닌가? 도아는 시우를 바라보던 눈동자를 아래로 떨구고는 입술을 꽉 물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16548710774815.jpg“죄송……합니다…….”

쪽팔려. 짜증 나. 제발 그냥 가세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자 그제야 쓰린 고통이 밀려왔다. 다시 시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은 무표정을 넘어선 경멸의 시선일 것 같아 먹먹함이 밀려왔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오들오들 떨리는 도아의 몸을 타고 흙냄새와 비린 피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어나야 하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나가는 시간이 원망스러워질 때쯤, 눈앞에 보이던 깔끔한 구두가 방향을 틀어 도아의 눈앞에서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져 갔다. 그제야 아득했던 소리들이 하나둘씩 귀를 트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핏줄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떨림은 여전히 멈출 생각이 없었다. 손바닥에 흥건하게 맺혀 있는 피를 보고 이마를 살짝 짚었다.

16548710774815.jpg“하, 이게 뭐야 바보같이.”

눈을 지그시 감은 도아는 긴 한숨을 요란한 바람 사이로 흘려보내며 짧은 후회의 시간을 가졌다. 직접 물을 줄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공간에 피를 흘리며 엎어졌으니, 이전 비서들처럼 자신도 결국 잘리려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도아는 혀를 쯧 차고는 몸에 힘을 주었다. 후들거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졌다. 겨우 몸을 지탱하고 일어난 모습이 막 태어난 사슴처럼 가녀렸다. 따끔거리는 통증을 무시한 채 피가 묻지 않은 손으로 몸에 묻은 흙을 털기 시작했다.

16548710774829.jpg‘대표님이랑 인사했어요? 어때요? 소문만큼 무섭죠?’

16548710774815.jpg‘아니야. 인사 나눴는데, 좋은 분 같아.’

좋은 분. 자신이 입 밖으로 꺼낸 이야기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를 떠올릴 때쯤 인기척이 느껴졌다.

16548710844737.jpg“이도아 씨.”

그리고 지금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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