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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관심이 있어서 (3/85)

제3화. 관심이 있어서2021.11.08.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도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올리고 단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48711100208.jpg“네, 대표님. 실수해서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죄송한 표정을 짓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새까맣고 짙은 시우의 눈동자가 올라간 입매와 내려간 눈썹을 주시했다.

16548711100213.jpg“민 팀장이 캘린더 사용법 알려줬습니까?”

이어 비서의 사과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16548711100208.jpg“네.”

16548711100213.jpg“오늘 일정은 확인했나요?”

16548711100208.jpg“2시 대표 회의실에서 임원회의, 5시 로아 패브릭 대표 방문, 7시 저녁 모임 적혀 있었습니다.”

16548711100213.jpg“더이상 방해하지 말고 그것만 차질없이 준비하세요.”

그는 서늘하게 명령했다. 본론을 말한 후 오들거리는 도아에게 하얀 수건을 건넸지만, 그것이 친절한 행동으로 보이진 않았다. 정신이 없어 대표가 무엇을 들고 돌아왔는지도 몰랐던 비서는 멍하니 손끝에 잡혀 있는 수건을 바라보았다.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리다 시우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움찔하며 팔을 뻗었다.

16548711100208.jpg“아……. 고맙습니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몸을 틀었다. 그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도아는 그제야 깔끔하게 접혀 있는 수건을 크게 펼쳐 망토처럼 어깨에 둘렀다. 바람 하나 막았을 뿐인데 따뜻했다. 그제야 봄볕도 느껴졌다. 하지만 따사로운 볕이 마음속까지 들어오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허리를 숙여 땅에 떨어져 있는 보안 카드와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 시우의 옷에 흙이 묻을까 봐 가져온 것이었는데 결국에는 본인의 옷에 흙이 잔뜩 묻고 말았다는 사실이 허무했다.

16548711100208.jpg“아. 점심!”

이곳에 왔던 또 다른 이유가 뒤늦게 기억이 났지만, 방해하지 말라던 냉담한 경고가 떠올라 포기했다. 쓰라린 손바닥과 무릎을 한 번 더 확인한 후 도아 역시 비서실로 걸음을 옮겼다. **

16548711100208.jpg“괜찮아. 이제부터 잘하면 돼.”

온종일 주문을 외우듯 말했다. 다행히 5시 일정까지 무사히 끝났다. 도아는 준비부터 마무리, 그밖의 전화응대까지 매뉴얼대로 잘 해냈다. 정원에서 나오자마자 서둘러 새 옷을 사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말린 덕분에 오히려 오전보다 단정한 모습이었다. 이쯤 되면 평온하다고 느껴야 하는데, 어쩐지 긴장감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실수할까 봐 무섭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까 같은 일이 또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한시우의 눈을 보면 이상하게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주머니 속에서 인사팀장이 주고 간 비서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쩜 기종과 색상까지 자신의 것과 똑같은지. 캘린더를 열어 앞으로의 일정들을 가만가만 살피며 불안감을 달래는 중에 전화가 울렸다.

16548711100208.jpg“네. 대표님.”

16548711100213.jpg-들어와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재빨리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피부를 찌르자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라 명치끝이 아려왔다.

16548711100208.jpg“괜찮아.”

호흡을 가다듬고 문을 염과 동시에,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온 선명한 석양빛이 도아의 눈을 찔렀다. 그 빛을 등지고 서 있는 시우의 인영이 크고 곧은 형체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핸드폰을 내려놓은 시우는 이어 시계를 찼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기품있는 모양새였다.

16548711100208.jpg“벌써 출발하시는 건가요? 아직 시간이 안 됐습니다.”

16548711100213.jpg“네. 일정이 생겨서요. 첫날인데 어땠나요?”

16548711100208.jpg“괜찮았습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16548711100213.jpg“네. 내일은 잘하도록 해요.”

뭐야? 아침에 큰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 후는 스스로 생각해도 처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잘했는데. 칭찬 정도까진 아니었다 치더라도, 다쳤으면 괜찮냐고 물어보고, 첫날에는 마음에 없더라도 고생했다, 한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내일은 잘하라니. 그 말은 도아의 자존심을 손톱으로 할퀸 것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도아가 마음속에서 이는 깊은 짜증을 숨기며 방긋 웃자, 무표정하던 시우의 얼굴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표피 아래 있는 모세혈관 하나쯤 움찔거리는 느낌으로.

16548711100213.jpg“도아 씨. 이번 주 제 일정들은 다 숙지했나요.”

제법 나긋하던 시우의 목소리가 칼끝처럼 뾰족해졌다.

16548711100208.jpg“네. 빠짐없이 체크했습니다.”

16548711100213.jpg“내일 제 스케줄이 어떻게 되죠?”

16548711100208.jpg“오전 9시에 전략실 보고가 있고 오후에는 자선단체 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막힘없는 도아의 대답에 시우는 더 막힘없이 질문했다.

16548711100213.jpg“그다음 날은?”

16548711100208.jpg“조찬 모임 후 1호점 방문일정이 있습니다.”

16548711100213.jpg“그다음 날은?”

16548711100208.jpg“비어 있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16548711100213.jpg“네. 주말이니깐요. 그런데 내일 밤 10시 미국 본사와 화상회의는 말 안 했네요.”

그럴 리 없었다. 분명 여기 들어오기 직전까지 캘린더를 확인했었다.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우가 핸드폰을 내려놓던 모습이 떠오르며, 바로 직전에 등록하고 트집을 잡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16548711100208.jpg“죄송합니다. 확인을 못 했습니다.”

16548711100213.jpg“확답은 쉽게 하는 게 아닙니다.”

네. 더럽게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온 힘을 다해 눌러 담았다. 오늘 하루만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을 하는 건지. 첫날이 이 정도니 점점 더 사람을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서든 너의 입에서 잘했다는 말을 듣고 말겠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우를 향해 작게 다짐했다. 그는 할 말을 다 마친 듯, 시선을 붉은빛 내려앉은 정원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16548711100208.jpg“대표님. 점심은 어떻게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려놓은 듯 깔끔한 모습으로 서 있는 시우를 향해 도아가 물었다.

16548711100213.jpg“안 먹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아의 눈이 휘휘 바람이 부는 듯 흔들렸다.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또 챙겨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밖에 없었다.

16548711100213.jpg“속이 안 좋아서요.”

나뭇가지를 권태롭게 바라보던 시우는 고개를 돌려 도아를 마주한 후 뒷말을 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무안해할까 봐 신경 써주는 듯한 이야기라고 느꼈다. 사람 마음이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게 여태껏 속을 긁어대다가 그 한마디 던져주었다고 요란스럽던 마음이 진정되어 가기 시작했다. 시우는 그런 도아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마디 더 거들었다.

16548711100213.jpg“누구 덕분에.”

억지로 띤 미소 위로 관자놀이가 씰룩 움찔거렸다.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노력해도 자신이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속이 안 좋아져서 밥도 안 먹었다는 의미 같았다. 좋은 사람은 무슨.

16548711100208.jpg“다음부터는 더 신경 쓰겠습니다.”

죄송하단 말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머리를 굴려 다른 대답을 했다.

16548711100213.jpg“그래요. 인사하러 나올 필요 없습니다.”

시우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좌우대칭 완벽하게 미소짓고 있는 비서를 지나치며 말했다. 일정한 보폭으로 멀어져 가는 소리가 안개 속에 쌓여있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도아는 한참 동안 혼탁한 정신으로 그가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괜찮은 사람 같다고 기대감을 품었다가 실망했다, 다시 기대하고. 오늘 하루 동안 겪었던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미련했다. 슬로우 모션처럼 시우의 표정과 말투가 계속 눈앞에서 느리게 아른거렸다. 짜증과 비슷한 감정이 오기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6548711100208.jpg“한시우.”

도아는 봄꽃처럼 붉은 입술을 살짝 벌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고개가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몇 분 전 칭찬 한번 받아보겠다고 작게 결심했던 다짐은 이제 제법 큰 크기로 변해 있었다.

16548711100208.jpg“다른 직원도 이런 식으로 괴롭혔나 보지?”

16548711100208.jpg“가족회사에서 4년 버틴 우수직원의 능력을 무시하지 말아. 네 입에서 나를 칭찬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해 주겠어.”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여전히 선명했다. 조금 더 붉게 변해버린 석양빛은 도아의 얼굴에 피 같은 가로 선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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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8711100208.jpg“수고하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도아가 사원증을 목에서 빼내며 보안요원에게 기계적인 인사를 했다. 머릿속으로 내일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서가 된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한시우한테 칭찬 한번 받아보겠다고 악을 쓰며 근무했다. 그날 이후로 업무적 실수는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어렵고, 불편했다.

16548711183875.jpg“퇴근하시나 봐요. 이도아 비서님.”

그런 도아의 발걸음이 멈춘 건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였다. 고개를 돌리자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16548711100208.jpg“아. 네. 그런데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16548711183875.jpg“관심이 있어서 알아봤죠.”

16548711100208.jpg“네?”

눈동자가 커졌다. 놀란 표정을 본 보안요원은 더 해맑게 웃었다. 종일 실수할까 긴장하며 일했던지라 부드러운 분위기에 웃음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16548711183875.jpg“하하. 왜 이렇게 놀라세요? 농담이에요. 주혜 씨가 알려줬어요.”

이렇게 작업 거는 걸 별로 안 좋아하나? 남자의 머릿속이 일사불란하게 돌아갔다. 무료하게 야간 근무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새벽. 처음 도아를 보았다.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 가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오고 가는 모습을 보며 예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며칠 전, 정적 속에서 로비를 걸어오던 그날의 모습은 처음 봤다고 믿어질 정도로 예뻤다.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고요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피곤함에 든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로 계속 생각이 나는 걸 보니 사랑에 빠진 게 분명했다.

16548711100208.jpg“주혜요? 홍보팀 민주혜?”

16548711183875.jpg“네. 서로 인사 나누다 보니 친해졌어요. 주혜 씨가 이 비서님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도아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신에게 먼저와 인사도 해주고, 간식도 곧잘 주고 가는 주혜에게 운을 띄우자마자 여러 가지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16548711183875.jpg“비서실이랑 보안팀이랑 연락할 일도 많은데, 서로 이름 정도는 알아둬요.”

도아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그의 명찰을 확인했다.

16548711100208.jpg“네. 알겠습니다. 이름이…… 김우진 님.”

우진의 이름을 부르며 단정하게 웃어 보였다.

16548711183875.jpg“저 주혜 씨랑 동갑이에요. 그냥 우진 씨라고 편하게 부르세요. 반말하셔도 되고요. 서로 이름으로 부를까요?”

16548711100208.jpg“아니에요. 존댓말이 편합니다. 우진 씨도 그냥 지금처럼 비서라고 불러주세요.”

16548711183875.jpg“이 비서님 편하실 대로 하세요. 그런데 안 더우세요? 다들 트렌치코트 입는데 이 비서님만 겨울 코트 입으셨네요?”

16548711100208.jpg“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예방 차원에서요.”

정원에서 물벼락을 맞은 이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월차를 내고 병원에 다녀올 처지도 아니었다.

16548711183875.jpg“아. 그러시구나. 지금 주혜 씨 만나러 가는 거죠? 아까 만났는데 저도 오라고 하더라고요.”

16548711100208.jpg“그래요? 못 들었는데……. 아마 얼굴 보고 물어보려고 했나 봐요. 저도 괜찮으니 퇴근하고 편하게 오세요.”

자신이 싫다고 하면 주혜가 무안해질 게 뻔했다. 도아는 보안팀에 아는 사람 한 명 정도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48711183875.jpg“네. 저는 두 시간 후에 교대이니 어디 가지 말고 계세요.”

우진이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도아에게 가까이 가져다 대며 입매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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