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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실수 (4/85)

제4화. 실수2021.11.12.

16548711467157.jpg“우진 씨가 본인도 오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오라고 해버렸어요. 화난 거 아니죠?”

주혜가 한입 베어 물었던 치킨 조각을 급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반짝거리는 큰 눈에는 상대방이 절대 화내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담겨 있었다.

16548711467163.jpg“화난 거 아냐. 갑자기 너무 친하게 말 걸어서. 원래 그런 타입이야?”

16548711467157.jpg“맞아요. 성격 너무 좋죠? 머리도 보안팀 중에 유일하게 갈색이라서 눈에도 띄고, 잘생기고.”

우진을 떠올린 주혜의 얼굴은 어느새 달큰한 웃음이 한가득하였다.

16548711467163.jpg“흠. 그런가?”

16548711467157.jpg“뭐야? 언니, 대표님을 매일 봐서 웬만한 사람한테는 감흥이 없는 거예요?”

주혜의 말대로 우진은 귀엽고 잘생겼다. 하지만 시우와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아는 15층에 왜 그 흔한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지 이제는 알았다. 정원은 풍경화고 저 사람은 인물화인데 미술 작품이 필요할까 싶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는 단정했고, 재단한 듯 완벽한 위치에 자리 잡은 눈, 코, 입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긴 목과 이어지는 넓은 어깨는 조각상처럼 매끈했다. 하지만 그가 아름답건, 멋있건, 잘생겼건 상관없었다. 그저 성격 까다로운 상사 정도로 정의 내리면 딱 좋지 않을까 싶었다.

16548711467157.jpg“진짜 대표님이 안 괴롭혀요? 소문으로는 막 물건도 던지고, 엄청 크게 소리 지르기도 한다고 했잖아요. 나한테만 말해 봐요. 비밀 딱 지킬게.”

도아의 심드렁한 표정을 눈치챈 주혜가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몸을 기울였다. 대표를 떠올리자, 자신을 바라보는 무감한 시선이 선명해졌다. 괜찮냐는 말 한마디 안 하는, 넘어지는 것에 밥맛이 없어졌다는 말이나 하는 상사. 밤새워 회의록을 정리해 보고해도 수고했다 말 한마디 안 하는 상사. 생각할수록 인상이 구겨졌다. 하지만 시우가 그렇게 대할수록,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기분이었다. 오기인지, 미움인지 구별이 가지는 않았다.

16548711467157.jpg“언니. 어서요!”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은 애교 섞인 표정을 보자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그건 안될 말이었다. 동기들은 주혜에게 말하는 순간, 다음 날이면 회사 사람들이 모두 다 알게 된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16548711467163.jpg“그건 헛소문이지.”

16548711467157.jpg“언니. 사실 회사 사람들 다 알아요. 비서실 올라간 날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엘리베이터 탔다면서요. 대표님이 화나서 물 끼얹은 거 같다고, 에이스도 올라가면 별수 없다 하던걸요. 저한테만 어서 말해 봐요.”

예상했던 바였다. 시우가 준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그 위에 코트를 걸쳤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들은 힐끔힐끔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16548711467163.jpg“그건 내가 실수로 넘어지다 그런 거야. 대표님 뭐 어떻게 한 게 아니라.”

도아는 작게 웃으며 별일 아니었다는 듯 변명했다. 하지만 그날의 잔상은 떠나지 않고 수시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긴 속눈썹 끝에 이어진 새까만 눈동자가 몹시 잠잠해서 마음을 더 요란하게 만들었다. 가끔 후회도 되었다. 만약 자신이 주혜 같은 성격이었다면 같은 상황일 때 물티슈를 들고 밝은 모습으로 시우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그리고 실수로 넘어졌을 때 엉엉 울며 왜 물을 뿌리냐고 화를 내고, 수건을 받았을 때 고맙다며 환하게 웃었겠지 싶었다.

16548711467157.jpg“그런데 왜 이렇게 안 마셔요? 소주는 못 마셔도 맥주는 한두 잔 먹었잖아요?”

16548711467163.jpg“몸이 좀 으슬으슬해서. 조심하고 있어.”

16548711467157.jpg“치, 그래도 이렇게나 많이 남겨요? 내 맥주잔에 버려요. 언니 원래 얼굴 잘 빨개지는데 지금은 조금 마셔서 완전 멀쩡하네. 우진 씨 온다고 이미지 관리하는 중?”

16548711467163.jpg“푸하하. 그런 거 아니야.”

16548711467157.jpg“아, 언니가 올라가면서 전략팀 비었잖아요. 그래서 우리 기수 중에 한 명을 그 자리로 보낸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둘의 이야기가 웅웅 거리는 가게 손님들 소리 속에 섞여 들어갔다. 퇴근 후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16548711467163.jpg“그럼 역시 지헌 오빠가 가려나?”

16548711467157.jpg“근데 들어보니 스펙 순은 아닌 거 같아요. 제가 갈 수도…….”

짧은 추리가 끝나갈 무렵 비서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도아는 첫 번째 진동이 끝나기도 전에 번호를 확인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16548711467163.jpg“안녕하세요. 박 상무님. 비서실입니다.”

16548711497694.jpg-이 비서, 대표님께 연락드려야 하는데, 전화를 안 받으시네? 급한 일인데. 따로 번호 아는 거 있어?

16548711467163.jpg“아니요. 핸드폰은 하나만 사용하십니다. 많이 급하신가요?”

16548711497694.jpg-응. 공장에 문제가 생겨서 지금 바로 보고해야 하는데 큰일이네……. 자택에 계시려나?

16548711467163.jpg“공식적인 일정은 없지만, 자택에 계신지는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16548711497694.jpg-난감하네. 난 자택 주소도 모르고. 참. 내가 직접 가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핸드폰을 고쳐 쥔 도아가 입술을 뗐다.

16548711467163.jpg“그럼,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16548711497694.jpg-그래. 나보다 비서가 가는 게 맞지. 빨리 가 줘. 급해!

뻔한 속셈을 알아차린 비서가 눈치껏 대답하자 박 상무는 지체없이 기회를 이용했다.

16548711467163.jpg“주혜야. 나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16548711467157.jpg“응응. 괜찮지 그럼. 얼른 가봐요!”

통화를 하는 동안 화장을 고치고 있던 주혜가 입술에서 코랄 색 립스틱을 떼며 방긋 웃었다. 윗옷을 챙겨입은 도아는 코트 안으로 들어갔던 머리를 들어 빼내고는 가방을 잡았다. 주혜가 도아를 향해 작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처음엔 가슴팍에서 흔들리던 손은 어느 순간 위로 뻗어가 도아의 어깨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도아는 몸을 틀고서야 주혜가 누구에게 인사를 했는지 알아차렸다. 가게 입구에 우진이 서 있었다. 캐주얼한 옷차림과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가 그를 더 부드러워 보이게 했다. 나가기 위해 출입문으로 걸어온 도아와 눈이 마주치자 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16548711525458.jpg“이 비서님! 가시려고요? 제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16548711467163.jpg“아, 우진 씨. 어쩌죠. 제가 일이 생겨서 급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입구를 가로막은 우진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섞어 말을 내뱉었다.

16548711525458.jpg“비서님, 그러면.”

도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손목이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뒤이어 손안에는 여러 종류의 종합감기약이 쥐어져 있었다.

16548711525458.jpg“감기약이에요. 아프지 마세요.”

순식간에, 거절할 겨를도 없이 이상한 선물을 받아 버린 도아는 감기약과 우진을 번갈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약국에 간 김에 산 거라던가, 쓸데없는 약이 너무 많아서 정리한다던가 뭐 그런 종류의 부연설명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6548711467163.jpg“감사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별말이 없었고, 도아는 감사 인사를 전하며 잡힌 손을 슬쩍 뒤로 뺐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다 마음만 받겠다 말하려 했을 때, 선물을 준 사람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자신을 독촉하던 박 상무의 목소리가 떠오른 비서는 많아도 너무 많은 감기약을 손에 쥔 채 그대로 가게 안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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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객님의 전원이 꺼져있습니다. 음성……. 별일 없을거라고 믿었지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발끝으로 툭툭 자동차 바닥을 치는 자신을 발견하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생각해 보니 퇴근할 때 시우의 얼굴이 창백했던 것 같았다. 오후에 보고되었던 일들이 무엇일까 되짚어 보던 도아는 3호점 흉기 난동 사건 결과 보고가 떠올랐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40대가 흉기를 휘둘렀던 사건이었는데, 큰 피해는 없었지만 현장에 있던 고객 한 분이 놀라 쓰러져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시우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리 만무했다. 마땅한 실마리가 떠오르지 않아 이만 차창 밖으로 시선을 내보냈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봄바람이 두 뺨을 문지르며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여전히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16548711467163.jpg‘나중에 확인하고, 전화 많이 했다고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아니다. 혼나면 좀 어때. 쓰러지거나 큰일 난 것만 아니면 된 거지.’

택시는 점차 속력을 줄여나갔고, 어느새 시우가 사는 몇 층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주상복합아파트가 보였다. 건물이 뿜어내는 불빛이 어쩐지 위협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택시 문이 탁, 닫히는 소리마저 조급하게 다가왔다. 도아는 시우의 집 주소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보안이 철저한 곳이지만 어떻게든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믿어보며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돌계단을 밟았다.

16548711467163.jpg“오늘은 실수하면 안 돼. 용건만 말하고 바로 돌아가자. 실수할 거리도 없어. 여기서 대표님이 나무에 물을 주고 있을 리도 없잖아?”

혼자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옆에서 들으면 마치 주술처럼 들리기도 했다. 빠른 걸음 때문에 시야가 흔들렸다. 그 시선 끝에 시우의 모습이 들어온 것은 머릿속에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할 때쯤이었다.

16548711467163.jpg“대표님?”

정원에서 그를 처음 본 그날처럼, 또다시 도아의 두 눈에 시우가 한가득 들어왔다. 잎이 비죽비죽 돋은 커다란 조경수와 훌륭한 조각작품들이 어우러진 단지 조경 너머였다. 열고 닫히는 유리문 안쪽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한시우였다. 퇴근 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는 기둥 뒤에 가려져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16548711467163.jpg“도대체 누구를 만나길래 전화도 꺼놓고 말이야.”

일이 쉽게 풀려가는 안도감에 걸음은 더욱더 빨라졌다.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인 그와 눈이 마주친 것은 찰나였다. 그 순간, 힘차게 내디딘 오른발이, 땅이 아닌 허공을 밟으며 몸의 균형을 잃게 했다. 어디선가 경험해본 것 같았는데, 내리막 단차가 있는 것을 모르고 발을 내디뎠을 때 느꼈던 기분이었다. 설마. 고개를 발밑으로 내리자 찰랑거리는 물이 도아를 마주하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다 수경 시설을……. 잔디나 심을 것이지……. 도아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수심이 깊지 않아서 옷이 젖지 않는 것. 다치지 않는 것. 행인이 없으면 하는 것. 이 모든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바람은 단 한 가지, 시우와 눈이 마주친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작은 바람을 안고 도아는 체념한 듯 엎어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동그란 파장이 일며, 잠잠하던 수면에 큰 물결 나이테가 만들어졌다. 물에 빠지기 직전에 마음의 준비를 한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다. 수심도 낮아서 팔과 다리만 홀딱 젖었을 뿐, 몸과 머리는 그나마 괜찮았고, 행인도 없었다. 그러면, 마지막 한 가지도 내 바람대로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솔깃 들었다. 놀란 호흡을 정돈한 도아는 이제 그만 저릿한 몸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뚜벅이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아주 작고, 느리게 들려왔다. 모든 감각이 한쪽으로 쏠렸다. 찰랑거리는 물의 움직임조차 그 소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16548711553348.jpg“이도아 씨.”

예의를 갖춘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선명해질수록 도아의 어깨는 잘게 떨렸다. 내리깔았던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한 채 그대로 몸만 엉거주춤 일으켰다.

16548711467163.jpg“대표님. 늦게 안녕하십니까. 회사에 급한 일이 있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 직접 왔습니다.”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공수 자세가 완성되자 최대한 또박또박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시우가 작은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박 상무와 통화하는 와중에도 눈길은 도아를 향하고 있었다. 카랑한 바람을 타고 오는 시우에 눈빛이 어색해 도아는 얼굴에 튄 물을 쓱 닦으며 기다렸다. 길지 않았던 대화가 끝나자마자 도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전했다.

16548711467163.jpg“보고를 받으신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색한 미소 위로 대답 없이 침묵만 흘렀다. 도아가 그것을 알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만 물에서 나오기 위해 한쪽 무릎을 굽혀 올렸다. 동시에 시우가 한 발짝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그 모습을 목격한 도아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몸에 힘을 잔뜩 실었다.

16548711467163.jpg‘왜 피해? 내가 더러워?’

흡사 신경질적이었던 동작은 발끝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나머지 체중을 앞으로 쏠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16548711467163.jpg“어??”

이어서. 쿵. 불안하게 앞으로 쏠린 도아의 몸은 딱딱한 곳에 안정적으로 닿으며 중심을 잡았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끌어안은 것은 맹세코 고의가 아니었다. 고개를 올려 얼굴을 확인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시우의 가슴팍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따뜻한 숨결이 도아의 볼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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