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독감이 확실해2021.11.15.
독감인 게 확실했다. 열이 올라서, 그래서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서 크게 들리는 것이 분명했다.
“어어. 대표님, 죄송합니다!”
자신이 멋대로 안겼던 가슴을 되레 밀치며, 뒷걸음질 쳤다. 유약한 몸짓이었다. 떨어지는 순간 도아는 저 품이 꽤나 포근하고, 풀냄새 같은 상쾌한 향이 한가득하였단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홀려 있을 틈이 없었다. 도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바로 뒤에 자신이 방금 빠져나온 인공 수로가 있다는 것도 잊었다. 그대로 다시 빠질 수 있다는 사실도. 당황함에 발을 계속 뒤로 떼며 걸었기에 당연한 순서로 몸이 중심을 잃으며 다시금 휘청거렸다. 미래를 예감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아의 가는 손을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꽉 감싸 쥔 것은 순간이었다. 급히 뜬 갈색 눈동자 안에 시우의 얼굴이 선명히 들어왔다. 기울어지던 몸은 삽시간에 시우의 손끝을 동아줄 마냥 의지하고 있었다
“분수대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만, 두 번이나 들어갈 정도로 수질이 좋은 곳은 아닙니다.”
“……일단 당겨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생각지 못한 조롱에 도아는 어금니를 깨물며,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시우의 팔목을 꽉 움켜쥐었다. 단단한 팔뚝 위로 앙칼진 악력이 전해졌다. 같이 빠지기라도 할 작정인지. 아니면 내가 정말 이 손을 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짙은 눈동자를 내려 제 손목이 잡힌 것을 확인한 시우는 흐릿하게 떠오른 비소를 지우곤, 짧게 힘을 주어 도아를 끌어당겼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도아는 원망의 눈빛을 차마 대표에게 보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조명이 예쁘게 들어온 수로에는 물이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몸은 제자리를 찾았지만, 정신은 물속에 빠트린 기분이었다. 도아가 시우의 손을 뿌리치기 전에 그가 먼저 손목을 풀어주었다.
“대표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제 정말 가보겠…….”
“따라와요.”
도아가 쥐었던 손목을 한 번 더 새겨 본 시우가 돌연 지시했다.
“네?”
“그렇게 젖어서 어떻게 가려고. 택시도 승차 거부합니다.”
비서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시우는 이미 몸을 틀어 건물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목표물이 저만치 멀어진 것을 보고는 힘없이 떨어뜨렸다. 첫날 정원에서 넘어진 이후로 악착같이 조심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다. 왜 또. 그날도, 지금도, 왜 두 눈 가득 들어와서. 바보처럼 주변을 살피지도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뱉고는, 잰걸음으로 시우의 뒤를 따랐다.
** 띠릭.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이 밝아졌다.
“들어오세요.”
선선한 안내에 입술을 잘근 깨문 도아가 주춤거리며 문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이라도 그냥 간다고 말할까.’
명령에 가까운 권유에 포기한 듯 따라왔지만, 민폐만 끼치는 이 상황이 너무나 불편했다. 또 점수를 깍일 행동을 해서? 아니면 잘 모르는 남자의 집이라서? 초조한 표정으로 가방 손잡이를 움켜쥐는 사이, 대리석 바닥을 때리는 일정한 걸음 소리가 몇 걸음 더 나아갔고, 닫혀 있던 중문마저 열렸다. 시우의 뒷모습을 쫓던 눈길이 복도에 걸려있는 80호 정도의 큰 사이즈의 미술 작품 앞에서 멈췄다. 도대체 뭘 그린 건지 모르겠으니 현대미술인가보다 추측했다. 미술에 문외한이면서도 소용돌이치고 있는 듯한 푸른 결의 그림이 꼭 자신의 마음 같아 마음에 들었다. 미술 작품 앞에서 짧은 감상평을 남긴 후, 고개를 들어 아득하게 느껴지는 복도를 곁눈질했다. 머리를 때리는 것 같은 쿵쾅거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거실에 도착한 도아는 눈앞에 펼쳐진 야경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3면 창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마천루와 스카이라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긴장감에 죽을상을 하고 있던 도아가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시우가 방에서 나왔다. 손에는 잘 접힌 옷이 들려 있었다.
“감탄은 그만하고, 욕실은 저쪽. 옷은 일단 이거로 입으세요.”
수건을 건네던 시우의 모습이 또렷하게 겹쳐졌다. 도아는 주인처럼 풀이 죽은 가방을 벽에 급히 내려놓고 삐그덕 거리는 손을 뻗었다.
“감사합니다.”
물에 빠진 부하 직원을 위해 옷과 욕실까지 내어주는 상사. 내용을 요약하면 정말 고마운 상황인데, 시우의 냉랭한 표정과 감정 없는 말투 때문에 도무지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몸도 안 좋은 것 같고, 빨리 옷만 갈아입고 이곳을 나가야지 싶었다. 하지만 세면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한 도아는 왜 시우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깨달았다. 엎어지면서 튄 물을 닦다가 번져버린 화장, 술 때문인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달리듯 걷느라 반쯤 풀려버린 머리. 이곳까지 오는 중에는 주로 바닥을 내려보거나 시우의 넓은 등만 주시했기에 미처 몰랐던 모습이었다.
“이게 뭐야? 추노가 따로 없네. 하. 진짜.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이 모습으로 얼굴을 마주 봤다니. 생각할수록 수치스러웠다. 잘하는 모습만 보여도 모자랄 판에, 왜 이런 상황이 되는지. 도아는 때리듯 수전을 힘껏 쳤다. 콸콸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물을 양손 가득 받아 얼굴을 적셨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싱숭생숭한 기분도 함께 씻겨 내려가기를 바라며. ** 축축한 옷을 벗고, 더러워진 살갗을 닦아냈다. 시우가 준 옷들은 모두 새 옷이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나온 도아가 머리가 잘 묶였는지 한 번 더 만지고는 인사했다.
“대표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시우는 부엌에서 들고 온 컵을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시세요.”
이어 한 손을 권유하듯 기품 있게 내밀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투명한 유리잔 안에 탄산수의 기포가 조용히 올라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소파로 온 도아는 푹신한 안락감에 당황하긴 했지만, 이어 경직되고 바른 모습으로 자세를 잡았다. 시우는 적당히 편해 보이는 자세로 기대어 태블릿을 확인하고 있었다. 꼴깍. 한 모금 넘긴 탄산수가 목에 작은 따끔거림을 선사하며 넘어갔다. 휑한 거실을 관찰하며 또 한 모금. 창밖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 모금. 시우가 자신의 존재를 지운 듯 별다른 말이 없자, 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옷이 더러워지셨죠. 죄송합니다. 세탁하면 지워질까요?”
아까부터 시우의 와이셔츠에 저가 묻혀 놓은 물 자국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물이 생각보다, 너무. 더러웠다. 이런 곳은 관리비도 백은 넘을 텐데. 청소 좀 하라고 컴플레인을 넣고 싶은 마음이었다.
“제 옷이니. 도아 씨가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시우는 이만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도아와 눈을 맞추었다. 저 표정을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생각을 하던 도아는 마침내 기억해냈다.
“모니터…….”
“모니터요?”
“아, 아닙니다.”
자신이 오전에 일정 보고를 할 때 모니터를 보는 그 시선이었다.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거리야? 나 사람이라고. 라며 따지고 싶었지만 도아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입매를 호선으로 만들었다. 한시우는 어떤 시선과 표정이 상대방을 매료시키는지 아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신입사원 환영사를 해주던 모습. 좋아하는 연예인 한 명 없었던 도아는 살면서 그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보았다. 신뢰가 가는, 과하지 않은 미소와 총기 넘치는 눈빛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거기다 묵직한 목소리는 귀를 간지럽혔고 일목요연하게 말을 전하는 어투는 아나운서의 강연처럼 전문적이었다. 그것은 대외용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했다. 바로 나무를 바라보는 모습. 웃지 않아도,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어도. 정원에 서서 편안한 눈빛을 보내는 모습이 너무나 근사했다. 그래서 어제는 비서실에서 넋을 놓고 보기도 했다.
“공장에 불이 났는데, 지금은 소강상태인 모양입니다. 내일 오전에 현장 방문해야 하니 전략팀에 말해서 스케줄 잡아두세요.”
“알겠습니다. 의전팀에 연락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달려온 덕분에 박 상무와 통화가 잘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시우가 혹시 ‘고생했다’라는 말이라도 해줄까 기대를 하던 찰나, 칭찬과는 거리가 전혀 먼 대사가 들렸다.
“그 옷은 안 주셔도 됩니다. 그냥 버리세요.”
제가 더러우신가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꼭.”
도아는 힘주어 대답하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탄산수를 마지막 한 방울 까지 탈탈 털어 마셨다.
“대표님께서 나무를 좋아하셔서 자택에도 식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식물이 없어서 조금 뜻밖입니다.”
“어차피 잠만 자는 곳이니깐요.”
“잠만 자더라도 이런 곳에서 지내면 좋을 것 같아요. 야경이 정말 멋있습니다.”
“이제 못 올 테니 지금 많이 봐두세요. 이도아 씨. 오늘같은 실수가 벌써 두 번째죠. 상당히 거슬립니다. 주의하세요.”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 도아야. 회사는 원래 이런 거야. 남의 돈 받는 건 쉽지 않아. 대표님은 좋은 분이야. 봐봐, 옷도 빌려주셨잖아. 버리라고 했지만……. 미워하면 안 돼.
“다음부터는 아무리 급해도 전화를 이렇게 많이 하거나, 함부로 제 집으로 오지 마세요.”
대표의 냉랭한 눈빛과 속을 긁는 대사를 정통으로 맞으며 비서는 다 이해한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볼에 경련이 잘게 일었다. 그렇게 거슬렸으면 왜 굳이 가겠다는 사람 오라고 한 거야? 안돼. 여기서 대들면 칭찬이고 나발이고 끝이야. 참자. 참자.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정말 급할 경우엔 어떻게 할까요? 저는 여기 오면서 대표님이 혹시 쓰러지셨을까 걱정 했습니다.”
“쓰러져서 그대로 죽으면 할 수 없는 겁니다.”
“대표님……. 무슨 그런 세상 다 산 것처럼. 무서운 말씀을 하세요.”
“제 목숨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던 자신의 모습이 스쳤다.
“대표님. 정말 죄송하지만, 급할 경우 자택으로 찾아오는 건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길 가는 행인이 쓰러져도 도와주는 세상인데, 어떻게 비서가 보스의 건강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회사에 지금보다 더 큰일이 날 수도, 또 대표님이 정말 과로로 쓰러지실 수도 있으니깐요.”
캘린더를 확인했을 때 도아는 시우의 빡빡한 스케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일한 것이라면 당장 내일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도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잠잠한 눈빛에 손끝이 간질거렸다. 손안에 쥐어져 있는 애꿎은 유리잔만 문질렀다. 이 거슬리는 심장 소리만이라도 어떻게 해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때쯤 시우가 대답했다.
“비밀번호는 qwe34…….”
“아니요! 그것까지는 안 알려주셔도 됩니다! 그냥 허락만 해주시면 초인종 누르고, 대답이 없으시면 관리실에 연락해서 들어오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것에 대한 안도도 잠시. 갑작스러운 사생활 노출에 도아가 컵을 내려놓으며 손사래를 쳤다.
“도아 씨.”
“네?”
“공동현관 비밀번호입니다. 올 때마다 로비에 신분증 맡기고 손님용 엘리베이터 타고 올 순 없으니.”
“아. 하하. 공동현관!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해서.”
더 이곳에 있다가는 또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도아는 비밀번호를 마저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방문 일정 잡은 후 문자 드리겠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침을 꼴깍 삼킨 도아가 다급하게 가방을 낚아챘다. 그러자 물에 젖어 늘어진 가방은 열려 있던 지퍼 사이로 안에 들어 있던 감기약을 우수수 토해냈다. 그 모습을 소파에서 느긋하게 지켜보던 시우가 머리를 조용히 쓸어 넘기며 일어났다.
“넘어지고, 착각하고, 이제 아프기까지 합니까.”
“아닙니다. 아파서 산 것이 아니라 우진 씨, 아니, 보안요원분이 주셔서…….”
지저분하게 흩어진 약상자들을 주워 담느라 신경이 쏠렸던 도아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도아의 말에 시우의 미간이 부드럽게 구겨졌다. 그리고는 발치에 있던 감기약을 허리를 굽혀 천천히 집어 들었다.
“비서가 다른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는 건 삼가도록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