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엮이지 맙시다2021.11.19.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차분한 목소리에 움찔 멈추었다. 도아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어 빳빳한 고개를 겨우 들어 눈을 맞추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를 흘릴 수 있으니깐요.”
손에 가볍게 쥐고 있는 약상자를 건네며 시우가 뒤 내용을 이어 말하자, 도아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스스로도 조심하려고 했던 부분이었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공손하게 약상자 받아든 도아는 곧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 시우의 눈에 거슬렸을 행동들을 떠올리니 혈관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렇게 도망치듯 집을 빠져 나왔다. 방해하지 말라. 거슬린다. 오지 말아라. 뭐 이정도 쯤이야. 전 직장에도 말을 곱게 하지 않는 사람 정도야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이렇게까지 동요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상처받는 기분이 드는 건지. 샛바람이 거셌다. 찬바람에 정신이 맑아진 도아는 이만 뿌연 생각을 끊어냈다. ** 콜록. 참으려고 붉은 입술을 꾹 눌러보아도 기침이 간질거리며 푹푹 튀어나왔다. 도아는 버스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첫날 물벼락을 맞은 이후 몸이 으슬거려 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번 주 금요일에 물에 빠진 것이 결국 감기로 이어졌다. 한 달 안에 칭찬을 받겠다 결심했는데, 이건 뭐 점점 길을 잃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알약 두 개 입에 털어 넣으니 견딜 만했다. 미화 팀이 들어 올 수 있는 곳은 비서가 앉는 프런트 데스크까지였기에,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부모님의 가게 일을 도와주었던 솜씨를 십분 발휘하여 깔끔하게 청소를 마쳤다. 이만 집무실을 나가려던 도아가 놓친 부분은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에이치 코리아의 특징인 심플한 디자인의 가구들이 정원과 어우러져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저 제품 심플라인인데, 여기 있으니깐 엄청 비싼 제품처럼 보이네.”
자세히 보니 다리 마감이 조금 달랐다. 콜록. 한동안 소파를 유심히 관찰하던 도아는 자신의 기침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시우가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맑은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한 집무실을 빠르게 훑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우편물 정리와 태블릿에 회의자료를 옮겨 담는 일이 막 완료되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아는 무릎에 올려두었던 종이들을 모아 한쪽으로 밀고 재빨리 복도로 나갔다. 사부작거리는 소리에 정원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비서에게로 향했다. 시우의 걸음은 완벽했다. 좁거나 넓지도 않은 보폭, 적당한 팔의 흔들림, 반듯한 자세까지. 그의 행동에 불필요한 부분은 단 한 부분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완벽했던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마스크는 왜 썼습니까?”
“기침이 조금 나와서 착용했습니다.”
말할 타이밍을 놓친 도아는 대답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시우는 턱 끝을 가볍게 까딱하고는 비서를 무시하다시피 지나갔다. 괜찮냐고 물어나 좀 보세요. 대표님. 금요일에 젖은 거 보셨잖아요? 눈을 가늘게 만들어 시우의 뒤통수를 찔렀지만, 공격받는 사람은 아무런 타격이 없었고, 공격하는 사람의 기분도 그다지 통쾌하지 않은 허무한 결과만 얻었다. 큰 발걸음 소리 사이에 작음 발걸음 소리가 불규칙하게 겹쳐졌다. 시우는 그것이 나름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입술을 저도 모르게 끌어올렸다. 종종거리며 뒤따르던 비서가 재빠르게 문을 열어주자 대표는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집무실로 들어갔다.
“문 열고 닫는 것, 앞으로 하지 마세요.”
책상을 향해 서너 걸음 걸어갔던 시우가 몸을 틀어 점잖게 한마디 했다.
“네. 알겠습니다.”
인수인계받았던 인쇄물이나 자신이 공부했던 자료에는 의전 시 문을 여닫는다고 적혀 있었다. 생각해보면 한 대표는 그런 종이 쪼가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사가 아니었다. 준비해 두었던 생수와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시우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뚜껑을 따고는 고개를 젖혀 물을 삼켰다. 도아는 고작 자신이 가져온 물을 마시는 것에 뿌듯함이 들곤 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의 일정을 보고했다.
“전략팀 회의는 오전 9시, 온라인 1팀 발표는 오후 2시, 홍보팀 통해서 진행하는 인터뷰는 4시 예정되어 있습니다.”
뒤숭숭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목소리를 낮추며 태블릿을 시우에게 건넸다
“회의실 장소는요?”
“9층 A 회의실입니다.”
“참석자 명단은요?”
“제일 첫 페이지에 추가해 두었습니다.”
그래도 며칠이 지났다고, 이제는 제법 정상적인 대화들이 오고 가는 집무실이었다. 콜록. 도아는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기침에 놀라 목을 가다듬었다. 약을 먹었지만, 불행하게도 열은 점점 오르고 있었다. 회의자료를 살피던 시우가 그 소리에 검은 눈동자를 선선히 들어올렸다.
“많이 아픈가요?”
지금 걱정해 주는 건가? 대표님이? 건조한 말투였지만 염려 섞인 질문에 비서의 마음이 찡하며 따뜻해지려고 했다.
“아닙니다. 큼큼. 괜찮습니다”
한 번 더 이어진 잔기침에 시우의 눈썹이 살짝 어그러졌다.
“건강관리 신경 쓰세요. 아픈 사람과 일하고 싶지는 않군요.”
지난주의 일을 잠시 망각했던 도아에게, 그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아서 툭 얄미운 말을 내뱉었다.
“네. 유의하겠습니다.”
하, 그럼 그렇지. 의지와는 상관없이 새어 나오는 기침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한 도아는 지금 내려가야 한다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시우는 비서가 챙겨준 태블릿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아는 자연스럽게 움직이려는 발을 가까스로 멈추었다. 네네. 이제 문 안 열겠습니다. 대표님 혼자 잘 다니십시오. 어차피 마스크 때문에 안 보일 것이니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비소를 띄운 채 인사했다. 도아는 미워하는 마음이 삐죽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온 힘을 다해 그것을 꾹 눌렀다. 넘어진 것도, 감기 걸린 것도 따지면 자신의 잘못이었다. 저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다. 배워야 할 부분이 많은 사람이다. 알싸한 마음을 가만가만 달래며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잘한다.’
그 한마디면, 다 잊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렇게 시우가 집무실을 떠나 있는 동안 도아의 몸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오후 홍보팀 인터뷰까지 끝났을 때는 그냥 어디든 상관없으니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응접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봄바람이 도아의 이마를 부드럽게 짚어 주었다. 푹신한 소파에 걸터앉아 테이블에 놓여있는 물병들을 트레이로 옮겼다. 종일 열이 올라 어지러웠던 찰나,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평온한 울림으로 적막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미 정신이 몽롱해진 도아는 그 포근함에 취해서 딱 오 분만 쉬기로 했다. ** 시우의 눈에 찡그린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도아가 들어왔다. 프런트 데스크에 없어서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서 고양이처럼 쪽잠을 자고 있었다. 손바닥만 하게 열려 있는 창문 틈으로 바람이 불어오자, 도아는 잠결에 잔기침을 내뱉었다. 잠시 생각하던 시우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는 소리가 낮은 종소리처럼 공간을 울렸다. 동편 하늘은 이미 노을빛마저 흔적 없이 사라진 후였다. 방 안에는 파란 어스름이 내려앉아 있었다. 창문을 닫자 방 안은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시우는 팔걸이에 가볍게 걸터앉아서 등받이에 기대 잠든 도아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모든 행동이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지켜보는 눈빛마저도.
뻗은 손은 이마 앞에서 짧게 멈췄지만, 곧 원래 가려던 목적지를 향했다. 땀이 맺혀 있는 이마는 적당한 따뜻함만 느껴졌다. 그는 열이 내렸음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하루종일 기침을 하면서도 뭘 그렇게 열심히 아등바등하는지. 하지만 그런 태도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케줄 관리나 전화응대 같은 기본적인 일 처리도 깔끔하고, 업무적인 실수도 거의 없다. 자신 앞에서는 가면을 쓴 것처럼 웃는다. 그래서 당황하거나 놀랄 때 나오는 솔직한 표정에 더 눈길이 간다. 푸른 그늘 속에서 도아의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 그녀가 자신의 품에 와락 안겨 오던 감각이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밀치려고 했는데, 물방울처럼 투명한 두 눈을 보니 그러지 못했다. 반짝이고 맑은 것이 흩날리며 정신을 흔들어 놓았다.
‘이도아라고 합니다. 대표님의 비서로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게. 대표님 손에 흙이 묻었길래 물티슈를 드리려고.’
‘다음부터는 더 신경 쓰겠습니다.’
‘대표님. 늦게 안녕하십니까. 회사에 급한 일이 있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 직접 왔습니다.’
‘아닙니다. 아픈 게 아니라 우진 씨, 아니 보안요원분이 주셔서…….’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도아의 목소리에 시우는 미간을 좁혔다. 도아는 차가운 손의 감촉이 좋은 듯, 어느새 표정을 느른하게 풀어버렸다.
“도아 씨.”
한숨과 함께 불러 본 이름은, 상념만큼 길게 늘어졌다.
“우리……. 엮이지 맙시다.”
“……. 싫어…….”
비서의 잠꼬대에 시우가 입꼬리를 짧게 올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히터를 켜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
“!!!”
식은땀이 이마에 몽글 솟아오를 때쯤, 도아가 눈을 번쩍 떴다.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 사이로 심장 소리가 머리를 퉁퉁 치고 있었다.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 집인지 회사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잦아들자 시계 소리가 들리고 주변에 있는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탐색하듯 또렷하게 드리우는 도시의 불빛. 그 앞에 놓인 화분. 이어서 소파와 테이블. 꽉 닫혀 있는 문과 창이 감옥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제야 도아는 자신이 잠에 들었단 것을 기억해 냈다.
“망했다.”
벌떡 일어나 응접실 문을 열었다. 불빛도 소리도 휘발된, 차라리 꿈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둠속에서 도아의 발소리가 다급하게 허공으로 뻗어 나갔다. 집무실로 향하는 동안, 유리 너머 정원에 있는 나무들이 무섭게 흔들렸다. 도아의 마음 역시 천둥 치듯 요란스러웠다. 초조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을 때, 프런트데스크와 빛이 새어 나오지 않는 대표실의 입구가 보였다.
“퇴근하신 건가……?”
비서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제발 퇴근했기를 바라며, 꼭 그래야만 한다 생각하며 손잡이를 돌려 문을 밀었다. 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가 집무실 전체 조명을 꺼두고 책상 위 스탠드만 켜두어서 문틈으로 빛이 보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 망했다.”
작게 중얼거리는 입술은 바짝 타들어 갔다.
“무슨 일이죠?”
벌컥 들어온 도아가 아무 말 없자, 시우는 쓰고 있던 얇은 안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시우의 뒤에 있는 가습기에서 하얀 수분 입자들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자신이 오후에 틀어 놓은 것이었다. 그 뒤로 나란히 놓여 있는 대형 식물들은 휘어진 잎을 늘어트린 채 촉촉한 수분을 맞으며 노래하듯 흔들거렸다. 노란 스탠드 불빛이 닿은 식물과 가구들은 그림자의 선명한 대비 속에 그림처럼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그림의 주인 같은 시우가 앉아 있었다. 그는 식물들 사이에 피어난 꽃처럼 맹렬한 색으로 도아를 바라보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몽롱하게 서 있던 도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말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자신을 원망하며.
“뭐가 말이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앉아 있던 시우가 의자에 기대며 나긋하게 물었다.
“제가 잠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아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지금까지요?’
정말 몰랐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되묻는 시우는 여유롭기까지 했다.
“네.”
“11시가 넘었는데 지금까지 잔 건가요?”
도아의 실수에 쐐기를 박듯 시우는 한 번 더 물었다.
“11시요?”
어둡긴 했지만 11시라니 믿을 수 없었다. 당황한 도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갔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도 그렇지. 이 시간이 될 때까지 비서가 없는 걸 모를 수 있는 걸까 싶었다. 참나. 똑똑하다는 분이 비서가 잠든 것도 모르고 말야. 다소 어이없는 마음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비서의 반성을 감상한 대표는 잠시 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마스크, 안 쓰셨는데.”
“마스크요?”
눈을 토끼처럼 뜨고선,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뺨에 가져다 대었다. 맨들거리는 자신의 피부가 느껴졌다.
“네. 하루종일 쓰고 있던 마스크요. 지금은 표정이 너무 잘 보입니다.”
도아는 그제야 자신이 잠결에 마스크를 벗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하고, 놀라고, 긴장하고, 조소했던 모습까지 그대로 시우에게 들켰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