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미소2021.11.22.
“대표님? 제가 마지막에 지은 표정은 그냥 제 자신이 한심해서 지은 표정입니다. 대표님을 향한 표정이 아닙니다.”
이게 말이야. 방귀야.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비서는 누가 봐도 의심스럽고 어색한 표정이었다.
“네. 알겠어요.”
그 모습을 보던 시우는 이만 고개를 돌렸다. 가늘게 떨리는 두 뺨을 숨기려 부단히 노력하던 도아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미간을 좁혔다. 뭐지? 지금 비웃은 거 같은데? 조금 더 집중해서 관찰하기 위해 허리를 앞으로 굽힐 때쯤, 시우가 말했다.
“그리고 내일은 월차 쓰세요.”
“아닙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자세를 고친 도아가 반듯하게 대답했다.
“괜찮다는 사람이 지금까지 잠듭니까? 종합감기약 같은 거 먹지 말고, 병원 가서 진료받고 나아서 오세요.”
단호해진 말투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도아는 공손하게 인사를 마치는 것으로 수치스러운 순간을 마무리했다. 어쩌면 도망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오자마자 집무실을 곁눈질하며 다시 한번 뺨을 문질렀다.
“윽. 이게 뭔 창피야.”
정신을 차린 도아는 불이 꺼져 있는 이곳저곳에 스위치를 누르며 조명을 밝혔다. 테라스 스위치를 누르자 정원에 밝은 빛이 아름답게 스며들었다. 조명이 켜진 로비와 복도, 정원은 꿈결처럼 몽환적이었다. 텅 빈 로비에서 조용히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단정한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들렸다. 도아는 빠르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는 시우를 기다렸다.
“퇴근하십니까?”
“네.”
실수를 만회하고자 최대한 상냥하게 말하는 비서를 향해 대표는 차갑게 대답했다.
“도아 씨. 법인카드 있죠?”
“아니요. 아직 못 받았습니다.”
띵.
“안녕히 가십시오. 내일 모레 뵙겠습니다.”
시우는 비서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한 채 칼 같은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도아가 굽혔던 허리를 들자, 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 보는 상황이 됐다. 어두운 눈동자가 도아를 응시했지만, 평정심을 찾은 그녀는 가볍게 눈웃음을 짓는 것으로 받아쳤다. 짧지만 강하게 흐르는 정적 사이로 시우가 말을 건넸다.
“책상 위에 카드 올려두었으니 택시 타고 가세요.”
시우는 말을 끝내며 핸드폰을 만지기 위해 시선을 떨궜고, 문은 순식간에 닫혀버렸다. 시우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그의 대표인생을 통틀어 제일 당황한 직원의 표정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도아는 문 닫힌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답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뭐지? 정신을 차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 아.”
목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한 번 더 소리를 냈다. 통증과 이물감도 모두 사라진 상태이었다.
“아이고. 어지간히도 푹 잤나 보네.”
감기에 취해 회사에서 잠들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며 도아는 정원으로 나왔다. 물에 젖어 있는 자신을 바라보던 그 뾰족한 눈빛이 떠오르자 목덜미가 뻣뻣해지면서 등줄기에 소름이 끼쳐왔다. 그래도 늦었다고 택시 타라고 하는 것을 보니 역시 소문만큼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야만 했다.
“다 나았는데 내일 그냥 출근할까?”
정원에 있는 의자에 앉은 도아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녹색 잎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일 일정이 뭐였지?”
혼잣말로 가만 내일 일정을 되짚던 도아는 무언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찬 모임 후 1호점 방문일정.
“하 그럼 그렇지. 내일 전부 다 외부일정이잖아. 애초에 내일 와서 할 일이 없었네.”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끼고 정원을 서성거리다 한편에 자리 잡은 작은 꽃 뭉치를 발견했다. 길쭉한 꽃잎이 예쁘게도 달려 있었다. 그 안에 암술, 수술 야무지게도 담고 있는 모습이 귀엽게 보여 새삼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시우가 왜 정원을 볼 때면 표정이 부드러워지는지 알 것도 같았다. 비서를 그 반의반만이라도 다정하게 바라봐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저지른 실수들을 생각하니 조금 염치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기분 좋게 바람이 불어오고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니 긍정적으로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노력해야지. 칭찬받는 날까지. 대표님은 좋은 분……일 거야. 아마.”
난간에 양손을 올리고 아름답고 아득한 야경을 바라보았다.
“하, 진짜 바람만 기분 좋게 안 불었어도 잠들진 않았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도아는 무엇이 생각난 듯 그대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로비와 복도를 지나 어둠이 내려앉은 응접실 문을 열었다. 불을 켜자 환해진 공간에 꽉 닫힌 창문이 기억보다 훨씬 크고 뚜렷하게 나타났다. 분명, 자신이 잠들 때는 창문이 열려 있었다. 선선한 바람에 취해 잠들었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했다.
“뭐지? 내가 잠결에 닫았나?”
혼란한 와중에 놀란 제 모습이 창문에 흐릿하게 비쳤다.
‘11시가 넘었는데 지금까지 잔 건가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느긋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자신에게 잤냐고 물어보던 시우의 모습이 도아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아니겠지?”
창문을 직접 닫아줬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닐 거야.”
초조한 마음에 손을 올려 이마를 짚은 도아가 낯설지 않은 감촉에 화들짝 놀라며 팔을 떨어트렸다.
“뭐지? 꿈인가? 대표님이 내 이마에 손을 올렸어……? 설마……. 진짜 왔었나?”
어렴풋한 감각은 꿈처럼 낯설기도, 현실처럼 허무맹랑하기도 했다. 그것을 기억해 내려 할수록 가슴은 조금씩 세차게 뛰었다.
“왜 또, 가슴이…….”
며칠 전, 시우의 품에 안기던 순간부터 요란스럽던 몸이 또 말썽이었다.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도아는 대표가 방에 들어왔을 리 없다고 단정 지으며 자신의 병명도 진단 내렸다.
“그래, 감기가 이렇게 쉽게 나을 리 없지……. 감기 때문이야.”
**
“안녕하세요. 배달 온 신문 좀 주시겠어요?”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에이치 코리아 빌딩 로비를 지나며 도아가 안내 데스크 직원을 향해 밝게 웃었다. 직원은 도아에게 5종의 신문을 건네주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공간은 제법 한가했고, 커다란 유리 벽으로 환하고 밝은 자연광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 비서님. 안녕하세요!”
멀리 있던 우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인사했다.
“우진 씨. 안녕하세요.”
“그건 뭐예요?”
“아. 이거요? 제 비장의 무기입니다.”
도아는 두꺼운 파일을 들어 보이며, 해맑게 웃었다. 그가 여태까지 본 모습 중 가장 밝은 웃음이었다. 도아가 희망을 발견한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월차를 쓰고 컨디션이 완벽하게 돌아온 도아는 시우가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비서실 창문을 열었다. 첫날 보자마자 혀를 내두르게 했던 캐비넷 정리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날이었다. 이전 비서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거 하나 정리 안 한 걸 보면, 일을 제대로 안 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얼기설기 포개진 물품과 파일들은 먼지를 한가득 뒤집어쓰고 있었다. 버릴 것과 필요한 것을 나누는 사이 먼지들이 공기 중으로 뿌옇게 퍼져나갔다. 제법 시간이 흘렀을 무렵, 제일 위 선반 구석에 방치된 파일 케이스를 발견했다. 꽤 두툼한 두께감이 느껴지는 파일을 당겨 빼냈다. 먼지를 닦고 구겨진 부분을 펼쳐 빠르게 넘기며 내용을 확인했다.
“세상에.”
인사팀장에게 받았던 프린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세세하게 작성되어 있는 비서업무분장 자료였다. 단순한 업무 지침뿐 아니라 빛과 소금 같은 개인 코멘트들이 적혀 있었다. 비서로서 보스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는 내용은, 누가 작성했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시우와 3년간 함께 일했던 비서. 그 사람일 것이다. 영어로 작성되어 있지만 도아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 이런 곳에서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모아두었던 이면지들을 폐지 봉투에 담으며 자리에 앉은 도아는 그 정성스러운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나무들을 직접 관리할 때가 있다. 그때는 혼자 생각을 정리할 때니 신경을 안 쓰는 편이 좋다.] [비서가 문을 여닫아주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외부에서는 어쩔 수 없더라도 회사에서는 그런 행동을 삼가할 것.] [커피를 즐겨 마시지만, 아침에는 주스나 녹차를 추천한다.] [직접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수행 기사 없이 다닐 때가 많다.] 글과 함께 시우가 했던 말들이 도아의 머릿속에서 윙윙 울렸다. 이 자료를 미리 알았다면 그때 물을 뒤집어쓰지도 않았고, 감기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뭐 후회는 여기까지. 앞으로 달라질 수 있었다. 대표님께 칭찬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파일을 가슴에 꽉 껴안으며 그 감격의 순간을 회상하던 도아는 무언가 생각난 듯, 우진을 쳐다보았다.
“저 여쭤볼 게 있는데요. 혹시 15층 창문에 자동 개패 장치 같은 거 설치되어 있나요?”
싱글벙글하다 갑자기 차분하게 변하는 모습이 강아지처럼 귀여워, 우진은 따라 웃었다.
“네. 되어 있어요.”
대답을 들은 도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반짝거렸다.
“15층은 보안에 신경 써야 하는 곳이니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9시에 전체적으로 창문이 닫히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습니다.”
도아가 기뻐하는 모습에 신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 대답했다.
“그렇죠? 그런 거죠? 감사합니다!”
도아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기면서도 몇 번이고 인사를 전했다. ** 비서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복도로 나왔다. 오늘 하늘이 이렇게 맑았나. 정원이 언제 이렇게 싹들이 올라왔지? 시우가 창문을 닫아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월튼의 자료집은 도아의 마음에 벅찬 기쁨을 선사했다. 얼굴에는 미소가 넘쳐흘렀다. 삑- 그 기분에 제동을 걸듯, 보안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한가득 피어 있던 미소를 숨기며 서로를 염탐하듯 마주 보았다. 그 어색한 흐름 사이로 도아가 주춤거리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 너머로 옮겼다. 넓은 보폭으로 도아의 옆을 스치자 풀냄새 비슷한 기분 좋은 향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 향을 따라 눈동자가 홀린 듯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막 피어난 어린잎은 유난히 가볍고 윤기가 흘렀다. 그의 머릿결처럼. 거기서 이어지는 긴 목과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적당히 단단하고 탄력 있는 몸체, 그리고 다리.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도아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탕비실로 향했다. 도아는 월튼의 코멘트를 참고해 녹차와 생수를 챙겨 들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무려, 따뜻하게 데워진 다관에 찻잎으로 직접 우려낸 녹차였다.
“회계팀에서 올라온 기안서에서 회원권 손상 관련…….”
모니터를 바라보며 통화를 하던 시우가 도아의 손에 정갈하게 들려 있는 녹차를 보고는 말끝을 흐렸다.
“다시 검토해서 대면 보고하도록 하죠.”
서둘러 통화를 끝내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오후에 재경팀 매니저와 회의 일정 잡아줘요. 시간은 세시 이후로요.”
“네. 알겠습니다.”
“보고할 것 있으면 하세요.”
“점심에 L호텔에서 김 사장과 점심 예정되어 있습니다. 주셨던 명함들은 연락처에 동기화해 두었습니다.”
“더 할 말은?”
“아침에 커피 대신 녹차가 좋을 것 같아서 녹차를 준비했습니다.”
자. 대표님. 어서 칭찬해요. 도아의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거렸다. 하지만 시우의 눈동자는 고요한 겨울밤처럼 잔잔하기만 했다.
“알겠어요. 나가봐요.”
비서가 무슨 짓을 하든 관심 없다는 듯 업무에만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두 눈을 여유롭게 감았다 뜬 시우는 도아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시선을 잠잠하게 트레이 쪽으로 보냈다. 긴 손을 뻗어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는 입안에 퍼지는 향을 기분 좋게 넘겼다.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함이었다.
“월튼이 남긴 자료 봤나 보네.”
시우의 입술 사이로 피식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