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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지금 무슨 짓을 (8/85)

제8화. 지금 무슨 짓을2021.11.26.

복도를 지날 때 본 비서실이 전보다 더 깔끔해진 거로 봐서 아마 대청소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날로그를 찬양했던 월튼이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들었다던 자료는 시우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후임 비서의 손에 들어간 순간 꽃가루 바람에 날리듯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 후 비서들에게 녹차를 부탁했을 때 다른 찻잔에 담거나 티백 녹차를 우려서 가져오곤 했었다. 이도아 사원이 아무리 뛰어나도 녹차를 준비하는 것까지일 것이다. 월튼의 방식으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자료를 발견했으니 자신의 근무 환경도 조금은 편해질 것을 의심하지 않은 시우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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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동안 도아의 업무도 안정을 찾아갔다. 도아는 시우의 출근 시간과 관계없이 늘 새벽같이 출근했다. 머리는 언제나 단정했으며, 의상은 주로 블라우스와 슬랙스 같은 깔끔한 차림이었다. 로비 안내 데스크에서 신문을 챙겨 들고 제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보안 카드로 정원을 비롯한 이곳저곳의 문을 열고, 주인과 똑 닮은 대표실을 정리하고, 비품을 채우고, 몇 가지 업무를 하다면 어느새 뚜벅뚜벅 일정하게 울려 퍼지는 시우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얼마 전에 택배로 견과류 박스가 배달왔는데 그때부터 아침에 들어가는 다과가 물, 녹차, 견과류로 바뀌었다. 오전에 일정 보고를 마쳤을 때, 점심 직후. 이렇게 두 번 시우가 몇 가지 지시사항을 말했는데 그것들을 처리하고 나면 퇴근 시간이었다. 불행히도 칭찬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한 달 안에는 저 입에서 좋은 말 나오게 하리라 다짐했지만,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더럽게 인색했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도아에게 부적 같았던 월튼의 자료집이 조금씩 신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대표님은 비서와 식사를 자주 하는 편이니, 메뉴를 늘 생각해 둘 것을 추천한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매일 샐러드 아니면 샌드위치만 먹는 사람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것은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대표님은 눈치가 빠른 편이니 섣불리 잔꾀를 부리지 말 것.] 눈치가 빨라? 비서가 11시까지 잠들어 있던 것도 몰랐던 사람이 눈치가 빠르다니. 이것도 무시했다. [건강검진은 꼭 받도록 설득해야 한다.] 안겼을 때 느껴졌던 단단한 감각으로 봐서는 운동을 굉장히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도아는 이것 역시 무시했다. 그날도 평범한 하루였다. 업무를 보다 시간을 확인하고, 안내 데스크로 연락해 5시에 손님이 온다는 내용을 전했다. 이어서 리셋 버튼을 누르고 제일 상단에 있는 메모리 버튼을 눌렀다. 알림판에 대표실 번호가 떴다.

16548713061679.jpg-네.

16548713061683.jpg“대표님. 권아람 님 어디로 모실까요.”

16548713061679.jpg-집무실로요.

뚝. 뜻밖의 대답이었다. 여태까지 미팅은 응접실과 회의실에서 이루어졌었다. 처음으로 시우가 자신의 영역으로 오는 것을 허락한 사람은 누구일까. ‘권아람’의 존재가 도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나자 도아는 흠칫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우가 샐러드나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했기 때문에 자신 역시 비슷한 메뉴로 점심을 먹곤 했는데, 조금, 아니 꽤 양이 부족했다.

16548713061683.jpg“삼겹살 먹고 싶다.”

머릿속에 불판 위에서 자글자글 숯불 향이 잘 밴 고기가 그려졌다. 알맞게 구워진 고기는 상추 위에 파무침과 함께 올라갔고, 마늘까지 얹은 후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안 되겠다 싶었던 도아는 퇴근하고 시간이 되는 동기들과 저녁을 먹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 메시지를 보내려던 손이 돌연 멈췄다. 저녁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시우의 이야기가 나오게 될 것이 분명했다. 조심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결국, 탕비실에 있는 비스킷을 먹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몇 주 사이에 정원은 더욱더 푸르러졌다. 첫날 이후로 시우가 정원에 물을 주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이따금 나와서 나무들을 살폈다. 쓸데없는 짓인 걸 알면서도 식물 관련 앱까지 깔고 나무에 대해 공부했다. 시무나무, 귀룽나무, 구상나무, 블루바드, 무늬캐키버들. 다 비슷해 보이던 나무들도 휘어지고, 뻗어가고, 피어난 모양이 달라 나름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다. 덕분에 좀처럼 구별이 되지 않던 나무들도 하나둘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도아는 평소보다 더 싱그러운 정원에 넋이 나가 탕비실을 지나쳐 로비까지 나왔다. 초록 물결이 이는 바람 속에서 유독 잎이 노랗게 변한 작은 나무를 발견하고는 허리를 굽혀 축 처진 나뭇잎을 만졌다. 끝부분이 주글주글하고 얇았다. 호스는 대표실 쪽과 로비 쪽 두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고 팔짱을 낀 채 잠시 고심하다가 호스를 가져와 손잡이 부분을 누르고 나무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16548713061683.jpg“살아남아라. 나무야.”

꼭 저를 보는 것 같았다. 도아는 혼자 죽어가는 나무가 다시 생기를 되찾기를 바라며 잎과 뿌리에 정성스럽게 물을 주었다.

16548713061679.jpg“이도아 씨.”

그때, 강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도아가 고개를 돌리자,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겨내는 시우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필요 없는 물건쯤으로 바라보는 눈빛에 또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6548713061679.jpg“지금 뭐 하는 겁니까?”

도아의 손에서 거칠게 호스 헤드를 가져간 시우가 건조한 말투로 물었다.

16548713061683.jpg“그게, 나무가 말라 있어서 물 주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호스를 보니 갑자기 몇 주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 몸 끝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도아는 손을 가지런히 맞잡으며 떨림을 숨겼다. 그리고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16548713061679.jpg“제가 분명히 첫날 말했을 텐데요. 업무 분장에 나와 있는 일만 해 주면 된다고. 거기에 나무 물 주는 업무가 나와 있었습니까?”

16548713061683.jpg“아니요. 안 나와 있었습니다.”

16548713061679.jpg“그럼 왜 준거죠?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 쉬운 것 하나 제대로 못 합니까?”

얼음 같은 목소리에 칼이라도 매달아 놓은 듯 가슴을 푹푹 찔렀다.

16548713061683.jpg“죄송합니다. 대표님이 이 나무까지는 못 보신 것 같아서.”

도아의 대답에 시우의 미간이 한층 어그러졌다. 시우는 말없이 그녀의 옆을 지나 호스를 자리에 가져다 두었다. 어이없게도 그가 지나자 여전히 기분 좋은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가 시우의 몸에 닿는 것이 싫어 한 발짝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16548713061679.jpg“도아 씨. 여기 있는 나무는 제가 직접 고르고 키운 나무들입니다. 보지 못한 나무는 없어요.”

16548713061683.jpg“네. 죄송합니다.”

차라리 평소처럼 칭찬을 받고 싶어 오지랖을 부린 행동이었다면 이렇게 기분이 찹찹하진 않았을 것이다. 물을 주었던 것은 정말 나무를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

16548713061679.jpg“이 나무는 과습으로 잎이 이렇게 된 겁니다.”

한숨을 깊게 내 쉰 시우는 도아에게 화가 난 이유를 설명했다. 됐다. 여기서 죄송하다고 한마디만 더하면 저 잔소리가 끝날 것이었다. 도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억울한 마음이 들어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속상한 마음에 변명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신경이 곤두선 사람 앞에서 오히려 더 큰 화만 불러일으킬 것 같아 포기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마지막으로 사과하기 위해 입을 살며시 연 순간. 꼬르륵. 불행하게도 소리를 먼저 낸 것은 입이 아닌 굶주린 배였다. 깊게 반성하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도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16548713061679.jpg“지금 배고프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나요?”

시우의 입술이 씰룩 움직였다. 오후의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에서 그 움직임은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16548713061683.jpg“죄송합니다.”

도아는 조금 전보다 더 겸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 어차피 잔소리가 끝날 타이밍이었으니 제발 이대로 대화가 끝났으면 하는 마음을 간절히 담아서. 조금만 참자. 흐릿한 눈동자에는 어느 정도의 체념도 담겨 있었다. 가보세요. 낮게 움츠리고 있는 잔디들을 바라보며 그 말을 기다렸다.

16548713061679.jpg“하. 도아 씨.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요.”

하지만 비서가 기다리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시우는 시선 안에 도아의 모습을 그대로 담으며, 말을 이었다. 본인도 알았다. 눈앞에서 죄송하다는 말만 기계처럼 내뱉는 비서에게 속 좁은 사람처럼 안 좋은 말을 이어가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15층 정원은 직원들도, 손님들도, 누구나 방문하게 되면 한 번씩 들여다보고 가는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날을 세워야 하는 때도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오도카니 서 있는 여자의 존재가 그랬다. 이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어떠한 이유로 첫날 그렇게 결론을 내렸던 시우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차갑고, 업무적이게 비서를 대하고 있었다. 더는 도아와 정원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자연과 비슷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장소이지만, 붐비는 일상 속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해 주는 공간이었다. 자신이 가장 풀어지는 공간이니 더욱이 경계해야 했다. 이 정도 했으니 더러워서라도 정원에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긴 한숨을 내뱉으며 돌아서려고 마음을 먹었을 무렵, 도아가 짜증이 가득 담긴 눈동자를 치켜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16548713061683.jpg“대표님. 진짜 너무하세요.”

목에 힘을 잔뜩 주며 시우를 향해 꺼낸 말은 단순했다. 하지만 늘 참기만 하던 비서가 그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도아 본인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끝날 것 같았던 대화가 이어졌던 순간 그녀의 마음에 욱하는 감정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 마른 흙에 물을 준 것이 다였다. 비가 왔으면 하늘에다가 저렇게 화를 내었을까? 자신이 만만하니 감정받이로 이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첫날 정원에서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했던 순간이 떠올라 더 화가 났을지도.

16548713061683.jpg“나무에 물 준 건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배고파서 소리가 나는 것까지 뭐라고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나무도! 누가 보면 제가 뭐 도끼질이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진짜.”

시우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똑같이 쓸모없는 물건을 보는 그런 눈빛을 그대로 재현하며 말을 이었다.

16548713061683.jpg“대표님이야 워낙 소식가니깐 샐러드나 샌드위치 드시고 하루가 버텨지시나 보죠. 저는 아닙니다. 저는 대식가예요.”

도아는 대표고 사원이고 직급 따위는 잊은 채 또박또박 억울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16548713061679.jpg“제가 점심을 먹는 것이 도아 씨 점심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죠? 알아서 먹으면 될 일 아닌가요.”

시우는 도아의 머리카락, 눈동자의 흔들림, 입술의 옴짝거림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두 눈 가득 담으며 대답했다.

16548713061683.jpg“대표님 식사 챙겨드리고 나면 20분도 안 걸려서 그릇 치우라고 하시잖아요. 그래서 들어가면 또 업무 지시하시고요. 결국엔 저도 대표님처럼 빨리 점심을 해결해야 하거든요?”

흥분한 나머지 귀가 점점 빨갛게 물들어갔다.

16548713061683.jpg“처음에는 업무지시 별로 없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근데 은근 많이 시키시는 거 아세요?”

도아는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른 채 시우를 향해 쏘아붙였다. 말을 하면서도 이상했다.‬ 이전 회사에서 이보다 더 화나는 일들이 많았는데, 그때는 그저 눈 딱 감고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시우가 내뱉는 말은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억울해서 미칠 것처럼 마음을 짓눌렀다. 싫어도 참는 편이었다. 부모님에게 칭찬받기 위해 그렇게 자랐기에 어느새 그것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답답해서 이제 할 말은 하고 지내야겠다 싶었다. 이런 결심을 하게 해 주다니, 정말 아주 대단하신 분인 건 확실했다.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이야기를 듣던 시우는 다른 팔로 자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상대는 분명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듯한데 전혀 위협적이지가 않았다. 새가 지저귀거나, 병아리가 삐약거리거나, 고양이가 애옹거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다. 거리를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모습이 어이없고 재미있어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16548713061679.jpg“좋아요.”

땅을 응시하던 시우는 느긋하게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일로 만난 사이이기에 사적인 친밀도를 높일 필요는 없었지만 아주 조금 알아가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16548713061683.jpg“네?”

도아는 뭐가 좋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16548713061679.jpg“그럼 이제 점심 같이 먹으면 되겠네요.”

부드럽게 감겨 있던 눈꺼풀을 올리며 시선을 도아에게 맞추었다.

16548713061683.jpg“네?”

어떻게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는 거지. 도아는 넋이 나가버린 표정이 되어 인형처럼 되물었다. 이게 아닌데. 난 그냥 담아두면 화병이 날까 봐 대든 건데. 그리고 한 사람을 애타게 찾았다. 월튼. 저는 지금 무슨 짓을 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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