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운명이라고2021.11.29.
“안녕하세요. 대표님과 약속이 되어 있는데요.”
아담한 키, 짧은 단발머리의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우진에게 말을 걸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옷과 액세서리가 심상치 않았다.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에이미 권. 아니다. 권아람. 권아람이에요.”
작은 체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여자였다.
“여기에 개인 정보 작성해 주시고…….”
우진이 아람을 빤히 바라보며 설명을 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글씨를 쓰다 말고 눈동자를 올려 그를 향해 씩 미소지었다.
“왜요? 제가 예쁜가요?”
“아. 예! 미……미인이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당황한 모습에 아람은 만족한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우진은 이 비서님이 훨씬 예쁘다며 뒤늦게 마음속으로 소심한 반박을 하고는 제 일에 집중했다. 아람의 흥얼거림은 우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귀여운 직원분. 대표님은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저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제대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
“흠. 저도 오랜만에 만나서 기대되네요. 똑같을지. 변했을지.”
그녀는 점점 위로 올라가는 층수를 확인하며 오랜만에 만나는 시우를 상상했다. 띵. 승강기 문이 열리고, 고급스러운 로비와 야외 정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나란히 서 있는 남녀의 모습도 고스란히 들어왔다. **
“대표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평소보다 눈이 커진 도아가 덥석 시우의 셔츠 소매를 붙들었다. 시우가 그 손길을 뿌리치기 위해 팔을 아래로 세게 내리자 도아의 손이 그의 손목 아래에 스치듯 닿았다. 시우의 손을 움켜쥔 날의 감촉이 떠올라 자신이 먼저 잡았단 것도 잊은 채 소스라치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들은 그대로입니다. 지금 이의 제기하는 건 저와 같이 점심 먹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 아닌가요. 제가 같이 먹으니 시간에 쫓길 필요도 없고, 많이 먹을 수 있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도아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제가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닙니다.”
도아는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며 급한 대로 의견을 전했다.
“그럼요?”
“그게.”
도아는 말을 이으려던 차에 로비가 평소보다 어둡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을 때, 우진과 손님이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지?’
유리창을 살피던 비서의 표정이 안 좋아진 것을 알아차린 시우도 시선을 틀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아람이 반갑게 손을 흔들자, 턱 끝을 내려 짧게 끄덕이고는 다시 도아를 바라보았다.
“도아 씨. 점심과는 별개로,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하세요.”
마침내 지독한 시간을 끝내는, 마침표와 같은 발언이 나왔다.
“네. 알겠습니다.”
몸을 돌려 정원 사이로 사라지는 시우를 원망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원래 이렇게까지 혼난 적은 없었는데. 하필 그 순간을 들키다니. 억울함, 후회, 분노, 창피. 도아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감정의 낱알들을 정리했다.
“음. 똑같네.”
시우가 나무들 사이로 사라지자 아람의 입매가 재미있다는 듯 호선을 띄었다. 그 사이, 도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상냥하게 웃으며 문을 열고 나와 손님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권아람 님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우진 씨, 손님 모셔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표에 관한 소문이 진짜였구나 싶었다. 그동안 매일 이렇게 고생했을 도아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답답한 기분이 들어 앞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손님과 비서가 복도로 들어간 후에도 걱정되는 마음에 한동안 로비를 서성거렸다. ** 도아는 물기를 머금은 잎들이 그림처럼 펼쳐진 복도를 걸었다. 비서가 무참히 혼나는 것을 본 아람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뒤따라 걸었다. 저 비서는 무엇을 거슬러서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을까. 불쌍해라. 시우가 비서에게 차갑고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을 볼 때마다, 친구인 자신이 한없이 특별해지는 기분이었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화낸 것은 처음 보았다.
“고생이 많아요. 우리 시우가 성격이 좀 유별나죠?”
아람은 비서를 동정하며, 거짓 위로를 건넸다. 도아는 불쑥 물어온 질문에 고개를 돌려 작게 웃어 보였다. ‘당신한테나 우리 시우겠지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감추며.
“괜찮습니다. 좋은 분입니다.”
그러고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지금 도아의 입장에서 시우는 그저 권력에 취해서 사람에 대한 존중을 모르는 쓰레기일 뿐이었다.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을 한없이 하찮게 대하는 것이 느껴질 때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여기 나무들은 언제 봐도 예뻐요. 시우 집에도 식물이 엄청 많아요. 안 가봐서 모르죠?”
흥건하게 젖어 있는 잎들을 구경하던 아람은 발걸음을 빠르게 바꾸어 비서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식물들이 없었습니다. 아마 최근에 치우신 모양입니다.”
평소라면 그저 네, 하며 짧게 대답했을 도아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우를 향한 분노를 잠재우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지라 있는 그대로 술술 대답이 나왔다.
“어……. 어. 그래요? 집에 가봤다고요? 그럼, 그림도 봤어요?”
“그림이요?”
야경이 인상적이고, 더 나아가 시우의 얼굴이 정신을 빼놓았기에 도아는 그림을 한 번에 떠올리지 못했다.
“마커 폴 작품이요.”
비서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아람이 풉, 작은 웃음과 함께 말해주었을 때,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분위기의 그림이 번뜩 생각났다.
“아! 파란색 그림 말씀하시는 건가요? 봤습니다.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아의 대답과 동시에 아람의 걸음이 일순 멈추었다.
“정말 들어갔어요? 어떻게? 몰래 간 건가?”
“아뇨. 그게……. 들어와도 된다고 하셔서 들어갔습니다.”
손님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린 도아가 서둘러 몸을 돌렸다. 눈앞에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아람이 들어왔다.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 길이 없었다.
“괜찮으세요?”
도아가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안색을 살피자, 그녀는 추켜세웠던 눈썹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 괜찮아요. 노크해도 돼요.”
“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손님의 안색을 재차 확인한 후, 노크와 함께 문을 달칵 열었다. 문이 열리며 시우와 짤막하게 눈이 마주쳤다. 도아는 아무 일 없었던 듯 가볍게 미소 지은 후 방에서 나갔다. 아람의 환한 목소리가 조용하던 집무실을 채웠다.
“우리 만난 게 얼마 만이지?”
“1년 정도 된 거 같네. 공부는 잘 마쳤어?”
시우가 책상 위를 정리하며 나지막이 물었다. 경계심 없는 그의 목소리는 따뜻한 물결처럼 귓가에서 찰랑거렸다.
“응. 재미있었어. 누구랑 연락이 잘 안 돼서 그건 좀 아쉬웠지만? 일은 할 만해?”
“아버지랑 약속한 게 있으니깐 최선을 다해야지.”
시우는 이리저리 움직이던 손을 가만 멈추고는 체념 조로 말했다.
“나 근데 목말라. 비서한테 물 좀 달라고 해줘.”
“저 생수 안 뜯은 거야. 저거 마셔.”
“비서한테 너무 한 거 아니야?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렇게 화를 내?”
“별일 아니었어.”
“내가 같은 실수 했어도 그렇게 화냈을 거야?”
“넌 잘 아니깐 그런 실수는 안 하겠지.”
만족스러운 대답에 아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맞아. 내가 널 잘 알긴 하지?”
물병을 집어 든 아람은 조금 더 짓궂은 말투로 장난을 걸었다.
“식물에 대해 잘 안다는 소리였어.”
“아. 뭐야. 괜히 설렐 뻔?”
“친구끼리 설렐 게 뭐 있어. 뭐, 이젠 의사와 환자가 더 잘 어울리네.”
잠시나마 따뜻했던 목소리를 감추고 다시 무미건조하게 대답을 이었다. 위대한 예술가가 정성스럽게 조각하고 세심하게 다듬은 것 같은 그의 얼굴은 방향을 바꿀 때마다 다른 분위기를 품기며 사람을 매혹시켰다. 아람은 시우가 자신을 찾아온 그날이 다시금 떠올랐다. 의대에 재학 중일 때 시우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그가 돌연 자퇴를 하며 연락이 끊겼고, 만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무료하게 보내던 나날들. 그의 소식을 매스컴을 통해 접했을 즘, 기적이라도 찾아온 건지 그가 자신의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왔다. 운명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조금 전 비서의 대답이 더 충격적이었다. 시우가 월튼이 아닌 다른 사람을 집에 들어오라고 했다니. 자신도 우연히 문 앞까지 간 것이 다였다. 그림도 그때 보았던 것이고, 식물이 있을 거란 건 그저 허술한 추측일 뿐이었다.
“난 널 환자라고 생각한 적 없으니깐 그렇게 정의하지 마. 친구한테 고민 털어놓는다고 생각해.”
“그래. 알겠어.”
“요즘 컨디션은 어때? 잠은?”
“정원으로 나가서 이야기하자.”
시우가 정원으로 연결되는 유리문을 가볍게 밀었다. 아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귀걸이가 요란스럽게 반짝거렸다. ** 도아는 복도 벽에 등을 대고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런트 데스크에 앉으면 바보 같은 생각만 들 것 같아 선택한 방법이었다. 나무들이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저 식물보다 못한 존재인 것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우진과 아람이 재미있는 영화를 보듯 구경하고 있던 표정에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시우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은 무능한 비서로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끝난다면 다행이겠지만, 우진이 소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건 비밀인데.’라는 말을 앞에 달고 여기저기로 퍼져나갈 것이었다. 결국 물 뒤집어쓰고, 대표에게 무참히 깨지는 비서가 되었다 생각하니 씁쓸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물에 침이라도 뱉어 버릴까.”
탕비실로 가 컵을 꺼내던 도아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가 예쁘다고 설거지까지 정성스럽게 한 걸까. 쓸데없는 성실함 덕분에 동그란 곡선의 유리컵은 지문 하나 없이 반질반질했다. 띠리리리. 그런 나쁜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때마침 전화벨이 매섭게 울렸다. 번호는 대표실이 아닌 국제전화.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미국 본사 비서실이었다. 전화는 회사의 얼굴이다. 근무 첫날 읽었던 비서직무설명서에 나와 있던 내용을 떠올리며 빠르게 수화기를 들어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전화선 너머로 다급한 영어가 들려왔고 도아는 자연스럽게 대답하며 빠르게 메모하기 시작했다. 5분 정도의 전화 내용을 담은 메모지를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똑똑.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대표님. 들어가겠습니다.”
대답 없는 문 앞에서 최대한 큰 목소리로 내용을 전하고는 조심히 문을 밀었다. 시우가 식물들에 햇빛을 씌워주기 위해 블라인드를 천장까지 올려둔 덕분에 강한 눈부심이 도아의 눈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일부러 이런 거 아냐? 이젠 별것이 다 의심스러웠다. 눈살을 찌푸리게 된 것이 빛에 의한 본능적인 반응인지, 의구심에 의한 행동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손을 올려 눈그늘을 만들었다. 눈앞을 가득 채우던 잔상이 없어지자 고개를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훑으며 시우를 찾았다.
“정원으로 나가셨나?”
지금은 정원에 발을 내딛고 싶지 않았다. 발은 집무실에 둔 채, 유리문을 열고 시선을 멀리까지 보냈으나 사람의 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가신 거야?’
그냥 전화해야겠다 결심하며 문을 닫으려는 찰나, 작은 목소리가 도아의 귓가를 톡톡 두드렸다. 손에 들려 있는 메모지를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정원의 안쪽으로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귀가 쫑긋 서며 큰 나무들 뒤에서 들리는 이야기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뭉개져서 들리던 아람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시우의 건조한 말투가 툭 던져졌다. 그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어차피 난 곧 죽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