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작은 의견2021.12.03.
도아의 눈동자가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눈발처럼 흔들거렸다. 이어서 돌멩이라도 박힌 듯 응어리진 것이 가슴 가운데를 짓눌렀다.
‘대표님이 죽는다고? 왜?’
놀랐는지, 손에 쥔 메모지는 아귀힘에 진즉 구겨져 버렸다. 도아는 내용을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귀를 가깝게 보내다 그만 중심을 잃었다. 고꾸라지는 상체를 넘어지지 않게 노력할수록 발은 콩콩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몸은 그대로 기울다 이내 귀룽나무의 탐스러운 잎사귀를 건들고 말았다. 바람이 만들 수 없는 둔탁한 흔들림이 시우와 아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나무에 머리를 부딪치고서야 겨우 중심을 잡은 도아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시우를 불렀다.
“저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평소와 다름없는 차갑고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본사에서 신제품 문제로 연락이 왔습니다. 메모해 두었는데 책상 위에 두고 나갈까요?”
“집무실에서 잠시 기다리세요.”
“……네.”
나무 너머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웅웅 번져서 들렸다. 대표는 정원에서 들어오자마자 비서가 건넨 꾸깃꾸깃한 메모지를 받아 들었다. 이마에 손을 올리고 비스듬한 자세로 종이를 든 모습이 멋있으면서도 피곤해 보였다. 어쩐지 시우의 얼굴이 푸석한 것 같고, 홀린 듯 보게 되었던 그의 몸도 키와 비교하면 너무 마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때? 오래 걸릴 것 같아?”
도아가 걱정을 멈춘 것은 아람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그래 친구가 죽는다는데 저렇게 쾌활하게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아냐. 모르는 일이지?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에 잔가지들이 자라나 그물처럼 얽혔다.
“음. 좀 걸릴 것 같네. 지금 전화한 걸 보면.”
시우는 메모지에서 모니터로 시선을 넘기며 대답했다.
“한시우랑 오랜만에 저녁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아쉽네.”
“다음에 같이 하자. 내가 병원 근처로 갈게.”
아쉬워하는 아람에 시우가 살며시 웃어 보였다. 적당히 기계적인 미소였지만 분명 업무적으로 짓는 것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알겠어.”
“도아 씨. 이분 모셔다드리고 본사랑 통화 연결하세요.”
모니터를 점잖게 내려보던 시우는 아람이 가방을 들자 비서에게로 몸을 돌려세웠다. 자신의 손님에게는 눈길 한번 안 주었으면서 새까만 눈동자가 도아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정원에서 내용을 엿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눈빛을 슬그머니 피했다. ** 벌을 받는 게 분명하다. 시우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적이 워낙 많아서 무엇이 정확한 원인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아무튼 이것은 자신에게 벌을 주는 것이 확실했다.
‘대표님, 제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식사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몇 분 전, 잔꾀를 내어 말하는 것까지는 성공적이었다.
‘아, 속이 안 좋으시군요.’
동의하는 내용의 대답이 나오자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도아의 얼굴에 미묘한 희망이 깃들었다.
‘그럼 같이 죽을 먹으러 가면 되겠네요.’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약속을 미루겠다는 꿈은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달칵. 보안 카드로 문을 잠그는 소리와 함께, 이만 체념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밥 먹고 있는 사람한테 싫은 소리 하지는 않겠지.
“대표님. 엘리베이터 도착했습니다.”
비서의 보고에 대표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시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도아는 종일 모시고 있는 것도 모자라 단둘이 좁은 공간에 있는 이 상황이 몹시 불편했다. 게다가 고장이라도 난 건지 층수를 나타내는 숫자가 유난히 느렸다.
“문 열렸을 때 대표님이 타고 계시면 직원들이 놀라겠어요.”
결국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도아였다.
“안 탑니다.”
“왜요?”
“대표실 전용 보안 카드를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CCTV도 꺼지고, 다른 층에서 눌러도 멈추지 않아요.”
“아, 그렇구나. 다른 층에 안 멈추는 건 좋은데 CCTV까지 끄는 건 왜 그런 거죠?”
“일전에 보안요원 한 명이 제 핸드폰 화면을 확대해서 구경했습니다. 본사 지침이 최근에 바뀌기도 했고요.”
생각보다 성실하게 대답해 준 보스의 말에 도아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우보다 반걸음 정도 뒤에 서 있는 도아가 카메라에 정신이 팔린 동안 그의 시선은 그녀의 작고 또렷한 얼굴을 향해 있었다.
“대표님.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도아가 결심한 듯 말했다.
“차가 도아 씨 연봉의 몇 배는 될 텐데, 사고 안 낼 자신 있어요?”
순간 대표의 차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팀원들이 떠올랐다. 사고 나면 노예계약. 10분과 10년의 상관관계를 빠르게 계산했다.
“그냥 옆에 타겠습니다.”
“그래요.”
민트처럼 상쾌한 향을 흩뿌리며 시우의 옆을 쏜살같이 지나 옆좌석 문을 열고는 씩씩하게 자리에 앉았다. 처음으로 타는 시우의 차 안에는 그의 온기가 가득했다. 새싹이 돋아난 듯 부드러운 향기가 도아의 몸과 포개어졌다. 이어 출발했나 싶을 정도로 안정적인 움직임이 몸을 휘감았다. 취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대표님. 창문 열어도 될까요?”
시우는 봄바람 들어올 만큼 차창을 열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건물들 사이로 요란스러운 햇빛이 찬란하게도 쏟아졌다. ** 스케줄 캘린더에 자주 등장하는 L호텔은 역시나 심상치 않았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안내받은 둘은 보스와 비서가 아닌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전복죽 괜찮나요?”
“네. 좋습니다.”
“C 코스로 2인에 식사메뉴를 전복죽으로 변경 부탁합니다.”
메뉴판을 보고 무엇을 시킬지 망설이는 도아를 대신해 시우가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원래 비서가 오면 첫날에 인사도 나눌 겸 함께 식사하는데, 도아 씨와는 좀 늦어졌네요.”
“네. 그날은…….”
“일단 업무 이야기부터 하죠.”
첫날의 일은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끝을 잘라내며 방향을 틀었다. 앞으로 외부 일정이 많아질 예정이라 그것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말했다. 그는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업무지시를 받는 사이 샐러드를 시작으로 군침이 도는 요리들이 하나둘 테이블 위를 오갔다.
“잘 드시네요. 몸 안 좋다고 하시더니.”
시우가 말로 도아를 툭 건드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잘 먹고 있었다. 특히 메인 요리로 나온 전복죽은 이제껏 먹어본 죽 중에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릇의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떠먹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수위를 낮추다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게요. 다 나았나 봅니다.”
시치미를 떼고 수저를 가볍게 놓으며 말했다. 그릇이 치워지고 커피와 디저트가 세팅되는 동안 도아는 대표를 가만 관찰했다. 시우가 핸드폰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렸다. 더욱 짙게 도드라지는 긴 속눈썹과 턱선이 새삼 멋있어 보였다. 만져보고 싶은 생김새와 살빛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제멋대로 올라가려는 손을 가까스로 멈춘 도아는 옆에 보이는 물컵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질문했다.
“대표님. 혹시 어디 아픈 곳이 있으신가요?”
어젯밤, 잠들기 위해 눈을 감으면 시우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휘저었다.
‘어차피 난 곧 죽을 거야.’
벌떡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결국 오늘 점심 걱정과 저 대사로 인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출근한 도아였다.
“제가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이나요.”
시우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차분히 되물었다.
“아니요. 건강해 보이십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어제 권아람 님과 이야기 나누시던 것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죄송합니다.”
대표가 평소보단 덜 날카로워 보였기에, 비서는 기회다 싶어 어제 일을 이실직고했다.
“엿들은 건 알고 있었습니다. 원래 한국인들은 죽겠다고 말하면서, 맛있는 걸 찾아 먹어요. 심각할 필요 없습니다. 일이 많아서 힘들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네요.”
“정말이세요? 혹시 회사 운영 때문에 숨기신다거나…….”
“아팠으면, 일부터 줄였겠죠. 안 그런가요?”
“네, 알겠습니다. 건강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조금 찜찜한 기분을 누르며, 도아는 단정하게 대답했다.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꼭 말씀해 주세요.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대표님이 일을 편하게 맡기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꺼낸 말은 진심이었다. 그와 있으면 마치 중학생 이도아로 돌아간 듯했다. 칭찬이 유일한 원동력이고 삶의 이유였던 순간으로. 시우가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을 생각하면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커져만 갔다. 이야기하는 도아의 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바르게 앉아 웃는 모습이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시우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그 모습을 담았다.
“네. 더는 실수하지 않길 바랍니다.”
뒤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도아의 진심 어린 포부를 되도록 무감하게 넘겼다. 도아는 이제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 멋쩍게 웃어 보였다.
“대표님은 나무 중에서 어떤 나무를 제일 좋아하세요?”
“도아 씨가 물 준 나무요.”
시우는 다리를 꼬고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대답했다. 도아의 허무한 표정을 못 본 척 하며, 긴 팔을 뻗어 커피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아……. 그러셨……군요.”
“여름에 흰 꽃이 핍니다. 그때 봐보세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해 얼굴이 붉어졌다. 커피를 한 모금 넘긴 도아는 서둘러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대표님. 여기 가구도, 에이치 코리아 제품 맞죠? 집무실에 있는 것처럼 조금 변형된 것 같은데, 레스토랑 인테리어와 잘 어울려 보입니다.”
“맞아요. 5년 전에는 프리미엄 라인이 따로 없을 때라 이런 식으로 타협을 봤죠.”
“에이치 가구들은 심플한 것이 매력이긴 한데, 그걸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이렇게 변형이 되는 게 방침상 가능하다면, 회사 측에서 커스텀 서비스를 한 번 제공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부분 디자인 교체 말인가요?”
시우는 들고 있던 잔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네. 리폼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준비중인 4호점에 커스텀 서비스 파트가 따로 있어서 소파 다리나 옷장 도어 마감 등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디자인은 개인 디자이너와 계약을 맺고…….”
가구를 만지며 열심히 의견을 말하던 도아는 시우의 무심한 표정에 말끝을 흐렸다.
“아, 작은 의견일 뿐입니다.”
“네. 작은 의견이네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했다고 느낀 도아가 급히 대화를 끝내자 시우가 선선히 끄덕였다.
“이만 일어날까요.”
“네. 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대표님.”
회사 대표와의 점심. 도아는 즐거웠다고 거짓말을 했다. 만약 전략팀 이도아였다면 너무나 영광이고, 감사한 자리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은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버린 비서. 스케줄 상 매일은 아니겠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해야 했다. 앞으로도 시우의 눈치를 살피며 점심을 먹을 생각을 하니 첩첩산중이 따로 없었다. 괜찮습니다. 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표는 식사하는 내내 칭찬은 빈말이라도 꺼내지 않았다. 실수는 누구나 합니다. 차차 익숙해 질 겁니다. 격려와 배려 섞인 한마디 역시 오가지 않았다. 한 달 안에는 저 입에서 좋은 말 나오게 하리라 다짐했지만, 이제 5일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 5일 후, 그날은 아침부터 일이 꼬였다. 모처럼 아끼는 목걸이를 차려고 했지만, 고리가 고장 났는지 쉽게 착용 되지 않았다. 하필 버스가 평소 배차 시간보다 빨리 정류장을 지나갔고, 목걸이 때문에 몇 분 늦게 도착했던 도아는 버스를 눈앞에서 놓쳤다. 집에서 나올 때는 하늘이 분명 맑았는데 슬슬 부슬비가 내리더니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급하게 우산을 사기는 했지만 이미 옷이 젖은 후였다. 15층 화장실에 비치되어 있는 핸드 드라이어로 옷을 대충 말리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오전 업무를 시작했다. 분리된 가습기와 새롭게 놓아둘 디퓨저, 뚜껑을 열어 둔 파쇄기까지. 청소 중인 대표실은 어수선했다. 평소라면 업무를 서둘렀겠지만, 오늘은 시우가 조찬 모임이 있기 때문에 11시는 돼야 출근을 할 예정이었다. 모처럼 여유가 생겼기에 평소보다 꼼꼼하게 시간을 들여 공간을 정리했다. 청소기를 다 돌리고 막 몸을 틀었을 때 도아는 문 앞에서 반듯하게 서 있는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어?”
“도아 씨. 오전 청소는 9시 이전에 끝내야 하지 않나요?”
서늘한 목소리가 도아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