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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좋은 사람일 리 없다. (11/85)

제11화. 좋은 사람일 리 없다.2021.12.06.

시우는 수 분 전에 도착했지만,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 대신 문 앞에서 비서를 관찰하는 쪽을 택했다. 기다림 끝에 마주한 표정은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다. 자신을 발견한 비서는 그대로 굳어버린 채 인사도 하지 못하고 커다란 두 눈만 깜빡거렸다.

16548713660985.jpg“도아 씨. 오전 청소는 9시 이전에 끝내야 하지 않나요?”

16548713661041.jpg“아…… 안녕하세요. 대표님. 죄송합니다. 얼른 마무리하겠습니다.”

16548713660985.jpg“천천히 해요.”

시우가 고개를 까닥이며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집무실을 넓은 보폭으로 걸어 들어왔다. 파쇄기 뚜껑에서 떨어진 종이 먼지가 책상 위에 벚꽃잎처럼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다. 시우는 대수롭지 않게 물티슈를 꺼내 자리를 훔친 후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이! 도아를 더 다급하게 만들었다. 전화벨 소리 정도라면 청소 중에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겠지만, 발걸음 소리는 청소기 소음에 묻히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시우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뛰다시피 한 걸음으로 분주히 움직인 도아는 리모컨 버튼을 눌러 적당한 빛이 들어오도록 블라인드를 조정하고, 청소하던 도구들과 교체하지 못한 디퓨저까지 양손 가득 챙겨 들었다. 두 번에 나누어서 했을 일이지만 빨리 시우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무리했다.

16548713660985.jpg“도아 씨.”

대표가 나가는 비서를 불러 세웠다.

16548713661041.jpg“네. 대표님!”

16548713660985.jpg“오늘은 녹차 말고 물만 준비해요.”

16548713661041.jpg“네. 알겠습니다.”

다행이다 싶었다.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녹차까지 우려내는 건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기에. 대답을 마친 도아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건 그때였다. 시우의 대화에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들고 있던 디퓨저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쨍그랑 떨어졌다. 대리석으로 견고하게 마감된 바닥에서 용기는 힘없이 부서졌다. 달갑지 않은 머스크 향이 도아를 에워싼 후 점점 방 안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 미치겠네.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가지고 있던 짐을 꽉 움켜쥐었다.

16548713661041.jpg“죄송합니다. 바로 환기하고 치우겠습니다.”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도아를 바라보던 시우는 하던 일을 멈추고 묵직하게 낮은 음성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16548713660985.jpg“조심하세요.”

더 거슬리지 않게 조심하라는 건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든 어깨를 다독였다.

16548713661041.jpg“네. 알겠습니다.”

자책의 기운이 가득한 대답을 들은 시우는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칭찬이고 나발이고 오늘은 몸을 사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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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부터 일이 잘 안 풀린다는 생각이 들어 더 날을 세우고 업무에 임했다. 그래서인지 시우가 외부일정으로 회사를 나갔을 때 평소보다 더 큰 피로감이 몰려왔다. 4시. 아직 퇴근하려면 2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평화로운 듯 불안한 시간이었다. 어수선한 마음이 도통 가시질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비실 찬장을 열어 진정에 도움이 된다고 들었던 캐모마일을 집어 들었다. 향긋한 향이 감도는 티백을 찻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렸다. 띠리리리. 시든 꽃처럼 비실거리는 도아를 놀리기라도 하듯 비서실 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애써 타 놓았던 허브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비서실로 돌아가 전화를 받았다.

16548713661041.jpg“네. 비서실입니다.”

16548713689963.jpg-아, 도아 씨. 안녕하세요. 저 재경팀 양한철 입니다. 예전에 봤었는데 기억하세요?

16548713661041.jpg“아. 네 기억합니다. 안녕하세요.”

메모할 것이 생길까 봐 바로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집중했다.

16548713689963.jpg-세금 관련해서 대표님 주민등록증 사본이 필요한데 보내줄 수 있나요?

16548713661041.jpg“네. 대표님께 허락받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16548713689963.jpg-도아 씨가 처음이라 모르나 본데 전에 비서들은 그냥 보내주고 그랬어요. 괜찮아요.

수화기 너머로 피식, 비서를 비웃는 소리가 전해졌다.

16548713661041.jpg“그래도 제가 처음이라 대표님께 먼저 연락 드린 후에…….”

16548713689963.jpg-이도아 씨! 이거 곧 마감이에요. 이전 비서는 부탁하면 바로 보내줬어요.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일이 복잡해진다고요. 정말 사람 답답하게 하네.

쉽게 파일을 보내주지 않는 비서에게 한철은 화를 내며 다그쳤다.

16548713661041.jpg“네. 알겠습니다.”

일전에 만났을 때도 성격이 불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더 시간을 끌어봤자 화만 날 것 같아 정중한 말투로 대화를 마무리 짓고는 곧바로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락만 받으면 될 일이었다. 뒷목을 쓸어내리며 인상을 쓰는 모습이 몹시 초조해 보였다. 통화음만 계속 이어질 뿐 받지를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더 전화하는 것은 실례였다. 제대로 된 인수인계를 받지 못한 도아에게 이런 순간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이전 회사에서 사장 신분증 사본이 필요했던 적이 있었다. 사장의 비서 역시 대수롭지 않게 파일을 넘겼었다. 그래, 전임자도 그렇게 했다고 하니 괜찮겠지. 걱정없이 하늘거리는 연둣빛 풀들을 가만 바라보던 도아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리고 ‘대표님 신분증 사본’ 파일을 보냈다. 받는 사람은 재경팀 양한철 과장. 땡큐. 그의 대답에는 하트까지 붙어 있었다. 그가 보낸 답신에 불쾌함을 느낄 때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시우의 번호였다.

16548713661041.jpg“네. 대표님.”

16548713660985.jpg-전화했었네요. 회사에 급한 일 있나요.

어수선한 소음과 시우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16548713661041.jpg“재경팀에서 대표님 신분증 사본 파일 요청이 있었습니다.”

16548713660985.jpg-아, 오늘이 마감이었나. 네, 괜찮아요. 보내요.

16548713661041.jpg“네. 알겠습니다.”

도아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순서가 조금 뒤바뀌기는 했지만, 대표가 허락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16548713660985.jpg-도아 씨.

16548713661041.jpg“네! 대표님.”

다른 용건이 있는지 한 번 더 자신을 찾는 시우에게 매우 기쁜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16548713660985.jpg-혹시 벌써 보냈습니까?

하지만 그가 비서를 찾았던 이유는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잘못을 묻기 위함이었다.

16548713661041.jpg“아……. 그게…….”

매서운 눈빛과 차가운 말투가 저절로 읽혔다. 도아는 등골이 빳빳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16548713660985.jpg-비서는 신뢰가 기본입니다. 제가 지금 재경팀에 확인할 수 있어요.

16548713661041.jpg“네. 조금 전에 보냈습니다.”

시우는 한 번 더 날카롭게 지적했고, 도아는 포기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16548713660985.jpg-제 허락도 안 받고 보냈다는 말인가요?

16548713661041.jpg“네, 이전 비서들도 그렇게 했다고 해서 보내도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16548713660985.jpg-이전 비서들은 저에게 허락을 맡았으니깐 그렇게 한 겁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도아 씨가 업무를 판단해서 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쉽게 된다고 했으면서.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면서도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보통 이런 때에는 ‘그래. 잘했어 도아 씨.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네.’ 이런 대답을 듣곤 했다. 그러나 원망과 분노는 시우도, 양한철 과장도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

16548713661041.jpg“네. 죄송합니다.”

뚝. 두 번의 전화로 먼지 하나 남지 않을 만큼 탈탈 털린 도아는 눈을 감고 달아오른 얼굴을 뒤로 젖혔다. 아침에 머리가 아프도록 맡았던 머스크 향이 아직도 코끝에서 진동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띠리리리.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일에 집중할 때쯤,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16548713661041.jpg“네. 비서실입니다.”

도아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어두운 목소리를 감추고 전화를 받았다.

16548713689963.jpg-도아 씨. 인사팀장이야. 목소리가 좋네?

16548713661041.jpg“아, 민 팀장님 안녕하세요.”

이곳으로 자신을 던져놓고 간 이후, 한 달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16548713689963.jpg-내가 갑자기 올려 보내놓고 너무 나 몰라라 했지? 일은 할 만해요?

16548713661041.jpg“네. 괜찮습니다.”

16548713689963.jpg-그래. 역시 도아 씨는 잘할 줄 알았어. 덕분에 우리도 편해.

16548713661041.jpg“감사합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어떤 말을 하려고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나 싶었다. 다행히 본론을 말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6548713689963.jpg-우리 팀에서 결재 올라간 게 있는데 그게 대표님 승인이 안 나서.

삑-

16548713689963.jpg-혹시 대표님이 잊으셨을까 봐. 한번만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처리가…….

인사팀장이 구구절절 설명하는 사이 로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가 돌아왔다. 통화를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황을 모르는 상대방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복도를 바라보던 도아는 비서실 쪽으로 시선을 보낸 시우와 눈이 마주쳤다.

16548713661041.jpg“네. 민 팀장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선 전화에 비하면 매우 준수한 부탁이었기에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 짓고는 복도로 나갔다.

16548713661041.jpg“잘 다녀오셨습니까.”

16548713660985.jpg“네.”

일정이 길어져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기어코 다시 회사로 돌아온 대표를 향해 인사했다. 냉장고에서 작은 생수병을 하나 꺼내고, 어제 사두었던 샤인머스캣을 깨끗이 씻어서 동그란 접시에 몇 알 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활기도 생기도 없었다. 힘들다. 한 달만 안에는 좋은 일이 생길 거라 믿으며 일했던 도아는 마침내 한 달이 되어버리자 유독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노력은 하는데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생전 안 하던 바보 같은 실수를 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답지 않게 긴장까지 했다. 왜 시우 앞에서 이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관둘까. 쌓아놓은 스펙과 경력을 생각하면 이곳보다 훨씬 큰 기업도 노려볼 수 있었다. 그동안 시우가 자신의 속을 긁어도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을 했었지만, 날 싫어하는 사람에게 내가 왜 굳이 그래야 하나 싶었다. 칭찬은 무슨. 이제 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16548713661041.jpg“나도 저 사람이 싫다.”

작은 소리로 마음을 내뱉자 기억의 편린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톡. 들고 있던 과일이 떨어져 바닥을 놀이터 마냥 굴렀다. 매끄럽게 굴러가는 알맹이를 보며 시우의 차를 탔던 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억 속 그날은 색다른 경험이었지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를 떠올리면 자신이 분명 간간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미쳤어. 뭐가 좋다고 실실 웃고 있어. 짜증나게. 도아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과일 알맹이를 사납게 집어 들고는 쓰레기통으로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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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종일 햇볕이 따사롭게 들어왔던 집무실은 순노랑 봄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16548713661041.jpg“자리 비우신 동안 경영인의 밤 사무국에서 참석 여부 묻는 전화 왔었습니다.”

16548713660985.jpg“불참으로 통보하세요.”

16548713661041.jpg“네. 그리고 인사팀에서 결재확인을 요청했습니다.”

도아가 책상 위에 쟁반을 올리고 인사팀장이 전해달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신문을 보며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시우가 등을 편하게 기대며 팔짱을 꼈다.

16548713660985.jpg“이도아 씨는 제 비서입니까. 인사팀 비서입니까.”

16548713661041.jpg“당연히 대표님 비서입니다.”

도아는 입 끝을 힘들게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16548713660985.jpg“그럼 알아서 거절할 줄 알아야죠. 뭐 하는 겁니까.”

억울한 표정으로 바꿔볼까 했지만, 그냥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반달 모양 예쁜 웃음을 유지했다. 그래도 장점이 많은……. 좋은 분이야. 마지막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16548713660985.jpg“아까는 멋대로 잘만 판단하더니 지금은 또 남이 해달라는 일을 해주고 있나요.”

좋은 사람이라고.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16548713660985.jpg“대답하셔야죠.”

16548713661041.jpg“죄송, 합니다.”

도아의 표정을 본 시우가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뱉었다. 한심하다는 듯.

16548713660985.jpg“나가세요.”

좋은 사람 이……일 리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저런 사람이 좋은 사람일 수 없었다. 그건 이 땅의 모든 선량한 사람을 모욕하는 짓이었다. 그래. 내가 미친 게 아니고 저 사람이 미친 거야. 별 같지도 않은 거로 트집이야. 대표님, 아니 한시우에게 칭찬을 받겠다고 결심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몸을 틀어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 눈가가 촉촉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싶었다. 누군가 실수로라도 자신을 건들면 그것을 핑계 삼아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떨리는 호흡을 몇 번이고 깊게 내쉬며, 아슬아슬한 감정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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