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화. 듣고 있어 (12/85)

제12화. 듣고 있어2021.12.10.

16548713878796.jpg“이도아 씨. 말을 어떻게 전했길래 대표님이 나를 불러?”

늘 바빠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인사팀장은 호출한 지 3분 만에 15층에 올라왔다. 조금 전, 시우가 인사팀장을 부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내용을 전한 순간부터 수화기 너머로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살살 굴릴 때와는 전혀 달랐다. 눈가에 근육이 잔뜩 뭉친 험악한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16548713878802.jpg“결제확인 요청드렸을 뿐입니다.”

프런트 데스크에 앉아서 경영인의 밤 사무국에 회신 메일을 보내고 있던 도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서를 무섭게 노려보던 민 팀장은 집무실 문을 열며, 낯짝을 순식간에 바꾸었다.

16548713878796.jpg“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팀장이 인사를 건넸다.

1654871387881.jpg“네. 자주 뵙네요. 민 팀장님.”

팀장직급이 대표를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민 팀장은 수행비서였던 월튼이 관두며 비서 채용 건 때문에 의도치 않게 시우와 독대를 하는 일이 자주 생겼다. 불행하게도 들어오는 비서마다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켰고, 그 책임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본인 탓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비서가 관두는 것이 시우의 성격이 문제인 것처럼 소문이 날 때도 굳이 변론하지 않았다. 나이도 어리면서 대표라고 앉아 있는 것도 내심 마음에 안 들었을 뿐 아니라, 성격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1654871387881.jpg“왜 비서실에 그런 전화를 하신 거죠?”

민 팀장의 가식을 가볍게 무시한 시우는 본론을 말했다.

16548713878796.jpg“첨언 없이 반려를 하시고, 그 후에 다시 올려도 확인을 안 하셔서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준비한 답변은 술술 나왔다.

1654871387881.jpg“이도아 씨가 신입사원 중에 가장 뛰어났죠. 입사 점수나. 교육점수나.”

16548713878796.jpg“네, 맞습니다.”

완벽한 이유였다.

1654871387881.jpg“그런 사원을 비서실로 보낸 이유가 뭡니까. 전략팀 프로젝트에 참여시켜 회사를 발전시켜도 모자랄 판에.”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이유였다. 그래서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16548713878796.jpg“저는 훌륭한 인재가 옆에 있는 게 좋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1654871387881.jpg“인사팀에서 채용한 비서들이 그동안 문제를 일으켰던 걸 크게 나무라지 않은 건, 사람을 채용하는 게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넓은 어깨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는 좌우대칭이 완벽해 상대를 더욱 압도시켰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 위축되고 있었다.

1654871387881.jpg“이도아 사원은 비서실로 보내고, 당신 조카 민주혜 사원을 그 빈자리로 인사 이동시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이어지는 시우의 날 선 채근에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1654871387881.jpg“제가 보기엔 지금 있는 홍보팀도 과분하던데요.”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대답이 없는 직원을 향해 시우가 계속 말을 이었다.

1654871387881.jpg“반려 사유가 되었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스스로 결정하세요.”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인사팀장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16548713907549.jpg

  ** 데스크에 앉아 있는 도아의 귀에 시우의 목소리가 뭉개져서 들려왔다.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더는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왼쪽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민주혜.’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대표실 문을 한번 흘깃거리고는 전화를 받았다. 밝은 목소리의 주혜는 직원들끼리 끝나고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도아가 오기를 모두 기다린다는 내용을 전했다. 평소처럼 거절하려는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얼른 한마디를 더 얹었다. 오늘은 특별히 보안팀도 오니 더 재미있을 거라고. 솔깃한 이야기였다. 수행 기사가 있으면 보스가 올라갈 때 전화를 주었겠지만 직접 운전을 하다 보니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우를 맞이할 때가 많았다. 오늘만 하더라도 그가 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침에 그렇게 엉망인 상태로 맞이하는 일도, 인사팀장과의 전화를 들키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시우의 차가 건물로 들어올 때 보안팀에서 알려만 준다면 지금보다 더 완벽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 두고봐라, 한시우. 속상한 와중에도 다시 일하겠다고 이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실소가 나왔다. 나는 정말 대감집 노비인가. 주혜는 보안팀에 잘생긴 사람이 많아서 재미있을 거라고 했지만 도아는 다른 이유로 회식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

16548713878796.jpg“이 비서님! 더 안 있고 가시는 건가요?”

40대쯤 되어 보이는 보안팀장은 풍채만큼이나 큰 목소리로 호탕하게 말했다. 골목은 가게를 옮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16548713878802.jpg“네. 내일 일정도 있고 해서요. 오늘 이야기 나눠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16548713878796.jpg“저도 재밌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거 말고도 혹시 저희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우진이 녀석이 입만 열면 비서님 걱정이라니까요? 그때 정원에서 혼나는 거 봤다고 얼마나 울상이던지.”

보안팀장이 혀를 쯧, 차며 고개를 우진 쪽으로 까닥였다.

16548713907566.jpg“아, 팀장님! 그 얘기 그만 해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도아를 힐끔거리던 우진은 제 이야기가 나온 것을 알아차리고는 불쑥 끼어들며 대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강아지같은 귀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결국 정원에서 본 것을 다 말해 버린 우진을 보며, 도아는 그의 입이 참새 깃털 같다는 생각을 했다.

16548713907566.jpg“아, 비서님.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165487139347.jpg“언니! 세상에! 괜찮아요? 얼굴이 너무 빨게요. 오늘 많이 마신 거 같은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우진이 쭈뼛 거리는 사이 주혜가 도아의 두 뺨을 감싸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많이 마시긴 했다. 하루가 너무 고단해 술이라도 삼켜야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리고 도아는 술을 좋아하는 보안팀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량이 넘어가 버렸다.

16548713878802.jpg“괜찮아. 적당히 마셨어.”

165487139347.jpg“그래도 언니 오니깐 다들 너무 좋아해서 나도 좋아요. 히히.”

다들 도아를 좋아했다. 도아는 오늘, 자신의 존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주 다른 사람들의 입밖에 오르내리고 있단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라고 정정을 했음에도 여전히 대표한테 물벼락을 맞은 사람이었고, 정원에서 미친 듯이 욕을 먹은 비서로 부풀려져 있었다. 맞았냐고 물어보는 직원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마지막 화제는 결국 ‘대표님’이었다.

16548713878796.jpg‘대표님은 정원에 있는 나무들 직접 관리해?’

16548713878796.jpg‘식사는?’

16548713878796.jpg‘업무 스타일은 어때?’

도아는 그저 아직 잘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시우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16548713907566.jpg“이 비서님 너무 취하신 거 같은데요?”

165487139347.jpg“맞아요. 언니. 혼자 집에 갈 수 있겠어요?”

우진과 주혜가 살짝 비틀거리는 도아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16548713878802.jpg“괜찮아. 택시 타면 돼. 오늘 불러줘서 고마워. 덕분에 기운이 좀 난다. 나 먼저 들어갈게.”

사실 세상이 빙빙 도는 기분이었지만 몸을 주체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손바닥을 그들의 얼굴쯤에 올려 보이며 괜찮다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에게도 공손하게 인사를 마치자 임무를 완수한 듯 뿌듯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몸을 돌려 가게들이 빽빽하게 즐비한 골목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속이 뜨겁고 어지러운 상태임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걸음걸이는 단정했다.

16548713934747.jpg

16548713907566.jpg“비서님. 제가 정류장까지 데려다…….”

165487139347.jpg“우진 씨, 괜찮아요. 언니 걷는 거 보니깐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얼른 2차 장소로 가요.”

16548713878796.jpg“그래그래. 걱정할 필요 없어 겨우 소주 한 병 마셨는데 집에 못 들어가려고?”

학생 때부터 보안요원 아르바이트를 해오던 우진은 취한 사람을 수없이 봐왔기에 그녀가 지금 많이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주혜와 보안팀장에게로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무심한 비서는 어느새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무 감흥 없던 식사 자리도 도아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특별해졌다. 가게에 들어온 순간부터 사라져버린 지금까지 모두 고스란히 마음에 담아두었다. 하지만 그녀가 계속 이야기를 나눈 상대는 보안팀장이었고, 자신이 기회를 잡았다 싶으면 앞에 앉은 주혜가 끼어들었다. 연락처도 교환하고 싶었고, 좋아하는 영화는 뭔지, 쉬는 날에는 무얼 하는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정원에서 자신이 본 일이 회사에 퍼진 것도 사과하고 싶었다. 너무 걱정되어 팀장에게만 말했는데 하필이면 보안팀에서 가장 소문을 좋아하는 직원이 들어버렸다. 우진의 커다란 눈에는 허무함과 아쉬움이 나란히 자리 잡았다. 그는 도아가 사라진 골목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 도아는 뒤를 돌아 회사 사람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긴장이 풀리니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웠다. 단정하게 묶고 있던 머리를 푸르고는 시선을 땅에 내린 채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차를 타는 것보다 바람을 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16548713878802.jpg‘혹시 대표님 차가 들어올 때 비서실로 전화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갑자기 오셔서 제가 당황스러울 때가 많아서요.’

16548713878796.jpg‘아, 그럼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보안 팀장과 나누었던 대화가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가늘게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목표는 이뤘다. 도아는 관둘 생각까지 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의욕이 넘쳤다. 대표님, 아니 한시우를 상대로 한 달은 너무 짧았어. 칭찬받는 건 때려치우고 일이나 열심히 하자. 괜히 움츠러들지 말자. 술은 썼지만 달콤했다. 차가웠지만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가만가만 땅을 보며 걸어가는 동안 차들이 화살처럼 매서운 속도로 지나갔다. 빨갛고 하얀 불빛 속에 숨어 있던 바람이 도아의 볼을 때리며 지나갔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도아는 그 바람도 견디기 힘들었는지, 마침 보이는 작은 공원으로 목적지를 바꿨다. 나무 몇 그루, 벤치와 가로등 몇 개가 전부인 곳은 공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오래된 벚나무 하나가 공원을 화사하게 메우고 있어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어 보였다. 조금만 쉬다가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벤치에 오도카니 앉아 멀리 떨어진 도로를 바라보았다. 자동차 불빛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길게 늘어지고 아득해져 갔다. 지이이잉. 차들 지나가는 소리가 점점 희미해 지고, 세상이 컴컴해졌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집처럼 편안하다고 느낄 때쯤, 그 평온을 깨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16548713878802.jpg“…….”

1654871387881.jpg-도아 씨.

연결음이 멈추고 화면에는 이미 통화 시간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전화를 받은 사람이 말이 없었다. 결국, 시우가 먼저 이름을 불렀다.

16548713878802.jpg“…….”

비서는 여전히 조용했다.

1654871387881.jpg-듣고 있습니까? 내일 오전에 캐나다에서 사람이 들어올 건데. 도아 씨?

16548713878802.jpg“하. 진짜. 쪼알쪼알.”

짜증 석인 긴 한숨 소리와 살짝 무너진 발음이 시우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쪼알쪼알? 쫑알쫑알? 시우의 눈썹이 어그러졌다. 자신이 제대로 전화를 건 게 맞는지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는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지금 내가 주정뱅이랑 통화를 하고 있구나 판단될 즘, 밝은 척 목소리를 올리지 않은 도아의 건조한 음성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16548713878802.jpg“어, 듣고 있어. 말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