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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무슨 짓을 해도 (13/85)

제13화. 무슨 짓을 해도2021.12.13.

안개 같은 침묵이 정적을 이루다 눈 뭉치 떨어지듯 툭 대답이 전해졌다.

16548714056047.jpg-반말하시네요?

16548714056052.jpg“어. 왜? 너도 하면 되잖아. 너랑 나랑 나이 차이 많이 안나.”

비서의 흐트러진 모습에도 동요하거나 흥분된 기색 없이 단정한 목소리가 오히려 귀를 쫑긋거리게 했다.

16548714056047.jpg-술 마셨습니까?

16548714056052.jpg“조금.”

도아가 살짝 헝클어진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노란 가로등 불빛 위로 벚꽃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16548714056047.jpg-취하셨네요. 나중에 이야기하죠.

16548714056052.jpg“야! 안 취했다고!”

도아는 감겨 있던 눈을 홉뜨며 언성을 높였다.

16548714056047.jpg-그럼 취한 척하는 겁니까?

16548714056052.jpg“하, 진짜. 그래 취했다. 왜? 또 기본 중의 기본인 신뢰가 무너지셨어?”

16548714056047.jpg-취해서 반말하는 직원과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군요. 이만 끊겠습니다.

시우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게 느껴지자 도아는 잠겨 있던 목에 힘을 주며 외쳤다.

16548714056052.jpg“야! 너도 반말하면 되잖아!”

16548714056047.jpg-도아 씨.

이름을 부르는 상대방의 목소리는 겨울바람처럼 차가워서 흥분된 도아의 음성을 더욱 불안해 보이게 만들었다.

16548714056052.jpg“반말해!”

다시 한번 침묵이 흐르고 짧은 한숨 소리가 도아의 맨질맨질한 귓가를 간지럽혔다. 비서의 외침에 묵언을 유지하던 시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뗐다.

16548714056047.jpg-그래. 반말할게.

타인의 술주정은 보통 시끄럽고 거슬리지만, 도아의 투정은 적당히 마음에 들었다. 결국, 시우는 포기한 듯 대답을 내뱉게 되었다.

16548714056052.jpg“그래. 이제 우리 말 놓는 거야. 알았지?”

16548714056047.jpg-알았어.

긍정적인 단어가 들리자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16548714056052.jpg“왜 전화했어? 할 일 있어?”

16548714056047.jpg-아니야. 별일 없어. 그냥 전화한 거야.

16548714056052.jpg“야.”

16548714056047.jpg-응.

16548714056052.jpg“회사 사람들이 너 엄청나게 궁금해 하는데, 내가 한마디도 말 안 해줬어. 잘했지?”

16548714056047.jpg-글쎄.

알랑거리는 법이라고는 없는 그의 말솜씨에 밝게 웃던 얼굴이 사늘해졌다.

16548714056052.jpg“얼른 잘했다고 해!”

16548714056047.jpg-당연한 일 아닌가?

16548714056052.jpg“잘했다는 한마디 하는 게 뭐가 힘들어. 속 좁은 인간아. 어떻게 칭찬 한 번을 안 해?”

16548714056047.jpg-잘한 게 있어야지.

왼손으로 핸드폰을 넘겨 보낸 도아는 남은 손을 쫙 피고는 촉촉해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16548714056052.jpg“왜 없어? 내가 첫날 이후로 네가 일정 물었을 때 제대로 말 못 한 거 있어? 스케줄 잡는 것도 교통상황까지 생각해서 말이야 딱딱. 경조사 챙기는 거 펑크낸 거 봤어? 화환도 기가 막히게 보내고.”

자신이 잘한 일들을 말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얇은 입술을 쉴 새 없이 달싹거렸다.

16548714056052.jpg“네가 참여하는 모임 회원들 핸드폰 번호까지 다 외웠어. 골프도 인코스 아웃코스 좋은 시간에 예약하기는 뭐 쉬운 줄 알아? 그리고 부서에서 올라오는 보고자료 정리도 내가 해놓은 거 잘만 보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해? 고생했다. 수고했다. 이 정도 말도 하지 않는 이유가 대체 뭐야?”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고도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렸다. 속상함을 토로하는 이야기가 끝나자 또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지나가는 시간은 시우의 정원처럼 잔잔했다. 도아는 시우가 없는 시간에는 대표실 문 앞 프런트 데스크에서 비서실로 굳이 자리를 옮기곤 했다. 번거롭긴 했지만,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잔가지들이 살살 흔들거리는 모습이 좋았다.

16548714056047.jpg-오늘.

16548714056052.jpg“뭐?”

그렇게 푸른빛 정원이 떠오를 때쯤, 시우의 음성이 살살 도아의 마음을 흔들었다.

16548714056047.jpg-오늘 많이 마셨어?

따사로운 가을볕 같은 다감한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 나긋한 분위기에, 달막이던 도아의 어깨가 가만 멈추었다.

16548714056047.jpg-누가 일부러 먹게 했어?

이어지는 질문에 있는지도 몰랐던 꽃잎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16548714056052.jpg“아냐, 내가 마셨어. 오늘 너 때문에 짜증 났거든.”

16548714056047.jpg-맞아. 내가 심했지.

투정을 부리듯 퉁명스러운 대답에 시우가 수긍해주자 핸드폰을 감싸 쥔 가느다란 손이 살살 떨렸다.

16548714056052.jpg“나 이제 너 싫어할 거야. 내가 정말 너 좋게 보려고 노력했거든? 이제 무슨 짓을 해도 싫어할 거야. 오늘 결심했어.”

삐죽 돋아났던 가시 같던 응어리는 결국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16548714056047.jpg-무슨 짓을 해도?

16548714056052.jpg“당연하지. 넌 진짜 나쁜 사람이야. 내가 너 흉 안 보려고 혼날 때도 대표님은 좋은 분이라고, 매번 다짐했는데! 대표는 무슨, 이제 넌 그냥 한시우야. 이름 부르면서 욕할 거야.”

16548714056047.jpg-그렇게 속마음을 다 말해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16548714056052.jpg“한 번만 더 나한테 뭐라고 해봐. 관둘 거야. 잘 먹고 잘살아.”

가로등 불빛이 눈 부셔 눈을 한 번, 두 번 깜빡일수록 차가운 빗물이 모여들 듯 점점 눈물이 솟아올랐다.

16548714056047.jpg-정말 관둘 거야?

처음 전화를 건 사람과 동일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가 깊은 마음 한구석을 어루만졌다.

16548714056052.jpg“아냐. 사실 안관 둬. 비밀인데, 너한테 잘 보인 다음에 다시 전략팀으로 보내 달라고 할 거야.”

도아는 대단한 내용을 말하는 것처럼 소곤거리다 혼자 작게 웃었다.

16548714056052.jpg“한시우.”

16548714056052.jpg“지금 벚꽃잎 떨어지는데 진짜 예쁘다.”

그리고 떨어지는 봄날의 벚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새 붉게 달아오른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스치는 바람, 다정한 목소리, 작은 봄꽃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워 위로가 되었다. 도아는 손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쓱 닦고는 발그레 미소지었다.

16548714056047.jpg-그 좋은곳이 어딘데.

16548714056052.jpg“여기 K 제약 건물 옆에 있는 공원. 알아?”

16548714056047.jpg-알지. 큰 벚나무 있는 공원. 늦게 혼자 있으면 위험해.

16548714056052.jpg“뭐래. 알아서 잘 갈 거니깐 걱정 마시지. 한시우. 내가 영화 얘기해줄까?”

16548714056047.jpg-말해봐.

비서는 자신의 위치를 의심 없이 실토하고는 이어 최근에 보았던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기 시작했다. 비행기 추락으로 섬에 떨어진 생존자들이 그곳에서 괴물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로 너랑 근무하는 것도 그만큼 난도가 높다는 감상평을 내놓았다. 술에 취해 같은 내용을 말하고 또 말하는 주정꾼의 나불거림은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지루한 내색 없이 잔잔히 그 이야기를 들어주던 시우의 입에서 ‘응’이 아닌 새로운 단어가 들렸을 때, 도아는 자신의 구두 앞코 위에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보았다.

16548714056047.jpg“진짜 있네.”

느른하면서도 단정한 음색이었다.

16548714056052.jpg“뭐가 진짜 있는데?”

16548714056047.jpg“고개 들어봐.”

중저음 목소리를 따라 홀린 듯 시선을 올린 도아는 이것이 꿈이라고 믿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우가 그런 표정과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 주는 것을. 그동안 간절히 바랐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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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8714056052.jpg“아. 머리 아파.”

편의점에서 사 온 배 음료를 손에 든 도아가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술 좀 깰 겸 걸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부터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집이었던 것을 보니 귀소본능이 잘 작동되어 준듯했다. 달콤한 음료를 한 모금 넘기고 평화로운 정원을 바라보았다. 과습으로 잎이 노랗게 변했던 나무도 어느새 정돈되어 아무 일 없다는 듯 귀퉁이에서 매끈한 초록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제는 정말 지치는 하루였는데, 오늘은 머리가 아프고 속이 좀 안 좋기는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맑았다. 띠리리리.

16548714056052.jpg“네. 비서실입니다.”

16548714204037.jpg-안녕하세요. 보안팀입니다. 대표님 차량 들어왔습니다.”

보안팀에서 전하는 소식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16548714056052.jpg“네! 알겠습니다!”

두 다리는 가만 서 있지 못하고 춤을 추듯 들썩거렸다. 양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15층 로비에서 복도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보안 카드를 이용하거나 호출 버튼을 눌러야 했다. 방문객이 호출하면 비서실 PC에서 확인한 후 열림 버튼을 눌러주는 식으로 출입이 관리 되었다. 비서는 버튼 위에 달린 보안 카메라를 통해 로비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도아가 카메라 모양의 아이콘을 클릭하자 텅 빈 로비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리고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시우의 모습이 훅 드러났다. 꿀꺽. 화면을 통해 보니 매일 보는 사람인데 괜스레 마른침이 넘어갔다. 평소에도 현실감 없는 외형을 가진 사람인데 화면에 들어가 있으니 허구의 존재를 보고 있는 듯했다. 곧바로 들어올 줄 알았던 시우는 로비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오른손은 주머니에 넣고 반듯한 듯 삐딱한 자세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색으로 표현해본다면, 아마 자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따뜻하고 편안한 그런 색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자니 가슴이 서서히 작은 요동을 만들었다. 이어 시우가 몸을 틀어 다가왔고, 모니터 속에서 점점 선명해지는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화면을 껐다. 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도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나왔다. 자신의 얼굴에 작은 열기가 묻어 있는 것 같았지만, 시우가 신경 쓰지 않을 걸 알았다.

16548714056052.jpg“안녕하십니까.”

고개를 끄덕. 조금 전 보았던 그런 표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정말 나무만도 못하구나. 한 번 더 그 사실을 확인한 도아는 왠지 씁쓸해지는 기분을 애써 지우며 미리 준비해 두었던 쟁반을 들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16548714056052.jpg“대표님. 오늘 공항에 들렀다가 오신다고 해서 오전에 있던 회의는 오후 2시로 미루었습니다. 4시에 르베이호텔 관계자분 방문 예정이고 7시에 A레스토랑 예약되어 있습니다.”

16548714056047.jpg“그래. 알겠어. 나가봐.”

평소와 다름없이 일정을 말한 도아가 시우의 대답에 가만히 서서 두 눈을 깜빡거렸다. 뭐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도아는 굳어버린 듯 얼얼해진 머릿속을 다시 되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당한 말을 던져놓고 무심하게 할 일을 하는 사람에게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16548714056052.jpg“저, 대표님?”

의문이 사라지지 않아 용기를 내어 시우를 불러 보았다.

16548714056047.jpg“응?”

반말이었다.

16548714056052.jpg“아…… 아닙니다.”

16548714056047.jpg“그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16548714056052.jpg‘뭐지?’

아리송한 기분에 걸음을 다시 멈추고 고개를 돌렸지만, 회의 자료를 보는 잘생긴 얼굴만 확인할 수 있었다. 달칵. 집무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가만 생각을 모았다.

16548714056052.jpg“진짜 미친 건가?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는데, 예의도 없네?”

의자를 빼내 깊숙이 앉고는 뾰족한 주먹으로 책상을 탁탁 치다가 결심한 듯 비서실 핸드폰을 꺼냈다. 월튼이 적어준 인수인계서는 상사에 대한 애정이 지나치게 많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객관적인 평가가 부족했던 것 같았다.

16548714056052.jpg“월튼도 적었으니, 나도 적는다.”

메모 앱을 키고는 ‘비서실 진짜 매뉴얼’이라는 제목을 정성스럽게 적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반말한다. 놀라지 말자. 원래 그런 인간임.] 월튼의 말투를 떠올리며, 한 문장 한 문장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것 말고도 해줄 말이 많았다. 그동안 차마 말하고 다니지 못했던 이야기들. [나무들을 직접 관리할 때가 있다. 나무에 환장해 있음. 괜히 도와주다가 거슬리면 한 소리 들으니 얼씬도 말 것.] [칭찬과 격려는 꿈도 꾸지 말자]

16548714056052.jpg“그리고 또……. 아! 이것도 적어야지.”

다른 이가 옆구리 쿡쿡 찌르며 물어와도 묵비권 행사하며 지켜왔던 시우에 대한 불만을 엄지손가락 두 개 바삐 움직이며 쏟아냈다. 이 정도 대나무 숲은 있어야 나도 버티지. 한시우. 네가 날 싫어하는 만큼 나도 널 싫어하겠어. 흥. 짧은 콧소리가 도와의 얼굴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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