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기억2021.12.17.
오늘 아침 미국에서 에이치그룹 본사 임원이 방문했다. 개인적인 방문이라 원래 도아를 시켜 호텔로 안내를 할 예정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비서는 어젯밤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오늘 새벽 직접 공항에 가 그를 만났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귀찮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업무에 변동이 생겨 평소보다 더 속도를 내 일을 처리해야 했다. 똑똑. 해가 높게 뜬 시간이 다가오자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식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샌드위치로.”
“네. 커피도 준비할까요?”
“그래.”
눈을 가늘게 만들며 시우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도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왜 갑자기 저한테 반말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무슨 소리야? 분명히 어제 나한테 반말해달라고 한 건 도아 씨였는데?”
“네? 제가 왜요?”
미간을 좁히며 믿기 힘들다는 듯 빠르게 되물었다.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어제 전화로 말했잖아.”
“전 대표님과 통화한 적이 없습니다.”
분명히 시우가 자신의 성질을 긁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한 도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핸드폰 통화목록 확인해 봐봐.”
시우가 그녀의 주머니에서 윤곽이 드러나 있는 부분을 주시했다. 도아는 눈썹을 치켜세운 채 핸드폰을 빼 들고는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통화목록을 꾹 눌렀다. [한시우 대표님. 착신 통화. 40분.] 오잉? 화면을 확인한 순간 온몸이 돌처럼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자신을 번연히 관찰하는 눈길 속에서, 비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애꿎은 화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40분?”
시우가 건 전화였으니 술에 취했어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도아가 당황스러운 점은 통화 시간이 40분이나 된다는 점이었다. 내가 이 긴 시간 동안 저 인간과 무슨 말을 한 거지?
“40분 동안 반말해달라고 사정했던 거 기억 안 나나 봐?”
시우가 기품 있는 자세로 앉아 비꼬듯 물었다. 그리고 머리를 쾅쾅 치는 믿기 힘든 이야기도 이어졌다.
“아, 나한테 먼저 반말한 건 도아 씨였지 아마.”
멍한 표정으로 액정을 확인하던 도아가 번뜩 고개를 들자 시우의 눈과 절묘하게 마주쳤다. 그가 작게 미소를 띠고 있었던 것 같은데 너무 짧아서 확신할 수 없었다. 바짝 마른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또 꼬투리 잡힐까 불안한 마음이 도아의 숨통을 옥죄어오는 기분이었다.
“다시 존댓말 할까?”
그러나 큰소리로 화를 낼 줄 알았던 시우는 의외로 별일 아니라는 듯 물었다.
“아니요. 그냥 편하신 대로. 한시우……. 아니아니. 대표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쿡쿡 쑤셔오는 윗배를 지그시 누르며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대답을 했다.
“그래. 나가봐.”
멍한 시선을 보내던 도아는 보스의 명령에 번쩍 정신을 차리고는 고양이처럼 재빠르게 방을 빠져 나갔다. 시야에서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치며 나무의 그림자가 어리어 있는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신경 쓰이는 작은 물건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목걸이. 가는 체인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도아가 어제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였다. 출근하고 로비에서 정원을 보며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도아는 가지를 낮게 늘어뜨린 벚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 있었다. 흐드러진 꽃잎들 사이에서 전화의 상대방이 직접 온 지도 모르고 나긋나긋 이야기를 이어가며. 시우가 그 곁으로 바짝 다가선 후에도 네가 진짜일 리가 없다며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그다음 기억은 굳이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비서는 어제의 일을 전혀 기억을 못 하고 있었다. 짧게 미소를 지었던 시우는 의자에서 느릿하게 일어나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왔다. 그녀가 나간 모습을 보아하니 평소처럼 빠르게 점심을 가지고 올 것 같지 않았다. 혼자 앉아서 상황을 정리하는데 10분.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가게에 들렀다 오는 데 20분. 시우의 머릿속에 도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봄날의 정원은 따사로웠다. 그는 나무의 껍질, 나뭇잎의 뒷면, 수형, 흙의 상태 하나하나 살피고는 호스릴에 잘 감겨 있는 호스를 풀어 물을 주기 시작했다. 하얀 햇빛은 직선으로 떨어져 가지를 타고 내려왔다. 반짝임은 나뭇잎에 닿으며 번져나갔다. 정원의 주인이 뿌리는 물줄기가 그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무의 높은 곳까지 물을 주기 위해 손을 위로 뻗으려던 시우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정확히는 도아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다 가만 동작을 멈추었다. 손에든 호스 헤드에서는 여전히 푸른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시원하게 들려오는 물소리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조용히 한 곳을 응시했다. 수분을 머금은 식물의 향이 알싸하게 코끝을 맴돌고, 호스에서 나온 물이 흥건하게 바닥을 적시자 물에 젖은 채 힘없이 쓰러져 있는 도아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시우는 모든 시간이 멈춘 듯 공허한 눈빛으로 물 얼룩진 바닥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젖은 그녀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향기가 퍼져나가는 것처럼 시우의 머릿속을 울렸다. 손과 무릎에 흐르는 새빨간 피가 더욱더 선명하게 도아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가느다란 물방울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미끄러졌다. 이어 목선을 훑고, 나풀나풀 벌어진 감청빛 셔츠 사이로 들어갔다. 다음 물줄기는 더 길고, 더 빠르게 도아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갈색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위태롭게 올라오더니 결국 시선이 맞닿았다. 조용한 눈빛에 마음이 한 뼘 두 뼘 먹혀가는 것이 느껴졌다.
‘도아 씨.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이어서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대표님 손에 흙이 묻었길래 물티슈를 드리려고.’
반질반질한 나무껍질 같은 깊은 갈색 눈동자. 놀랐는지 배꽃처럼 하얗게 변해버린 얼굴.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천천히 새어 나오는 숨소리. 억지로 꾸며낸 웃음이 아닌 헝클어진 표정이 온몸을 굳게 만들었다. 손에 흙이 잔뜩 묻어 있는 것도 잊은 채 머리를 헝클어뜨리곤, 점멸하는 정신을 붙잡으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질끈 눈을 감는 것으로 곤혹스러운 봄날의 기억을 끊어냈다. 쏴아아아.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 바람이 장난스럽게 그의 눈끝을 간지럽혔다. 힘주어 쥐고 있던 호스 헤드를 잠그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새파란 허공을 응시했다.
‘이제 무슨 짓을 해도 싫어할 거야.’
‘넌 진짜 나쁜 사람이야.’
어제 저녁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내용은 떼쓰는 아이처럼 목표가 확실한, 투박하기 그지없는 투정이었다. 도아를 마주한 날 성가시게 찾아온 감정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저 작은 호기심이 고개를 내민 것일 뿐. 무시하고, 숨기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여겼다. 싫어하겠다 단호하게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나름대로 감정의 존재를 감추는데 성공했나 싶어 시우는 짧게 실소했다.
** 도아는 걸음을 재촉했다. 통화내용을 기억해보려다 출발이 늦어지고, 혹시 실수했나 고민하면서 걷다 보니 걸음이 느려져 평소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내가 술을 먹고 반말을 하다니? 욕한 건 아니겠지? 늦었다고 또 화내는 거 아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잰걸음으로 마지막 비탈길을 내려오는 와중에도 걱정은 한량없이 도아를 짓눌렀다.
“대표님! 샌드위치 사 왔습니다.”
얕은 숨을 할딱이며 목적지에 도착한 도아가 따사로운 봄날의 햇빛 속에서 유유히 걷고 있는 시우를 불렀다.
“알겠어.”
나직하고 예의 없는 대답이 못마땅해 떨떠름한 표정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숨겼다. 시우는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두 명이 먹을 것 치고는 양이 적은데?”
“아! 저는 속이 안 좋아서, 생과일 주스로 사 왔습니다.”
햇빛이 마음에 안 드는지 이마에 손그늘을 만들고 대답하는 모습이 또 시우의 마음을 휘저었다.
“나중에 배고프다고 하지 마.”
“네. 알겠습니다.”
“커피만 가져다줘.”
짙은 밤색의 머리칼은 낮볕을 그대로 받아 잔물결처럼 반짝거렸다. 용무를 끝내고 나무 사이로 지나가는 도아의 발걸음이 다 자라지 않은 잎들을 살살 흔들었다. 시우는 조금 더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지금도 자신이 반말을 툭 내뱉으니 가면 같은 웃음으로 짜증을 감춘다. 그 뒤에 가려져 있는 도아의 표정이 보고 싶어서.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작은 실수에도 더 얄궂게 대했다. 도아가 화내는 모습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시선이 향하고 신경이 모였다. 그 행동에 마음이 동해 식사 정도는 괜찮겠지 틈을 벌려 보기도 했다. 그랬더니 역시나 그녀가 그만큼 공간을 차지하고 들어왔다. 왜 다가가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한가지 단어만 떠오를 뿐이다. 굳이. 남은 인생에서 굳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우위에 둘 필요가 없기에. 따지자면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 정도에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적당했다. 때로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거리를 지켜내는 것이 좋은 법이니.
“대표님. 커피 가져왔습니다.”
“그래.”
꽃이라도 들고 있는 듯 소중하게도 쥐고 있다. 도아는 테이크아웃 커피 한잔을 건네더라도 그냥 주는 법이 없었다. 자잘한 각얼음으로 인해 생긴 표면의 물기를 꼼꼼하게 닦고, 홀더는 늘 따로 챙겨와 젖지 않은 빳빳한 상태로 끼워 정성스럽게 건넸다. 고맙다고 말해줄까. 어느새 자신의 손에 들어온 플라스틱 컵을 내려다보던 시우가 단정한 입매를 움직였다.
“가 봐.”
친근한 말은 감정을 키우기 마련이라 피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녀의 등등한 기세에 져주는 건 어제가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투정 섞인 목소리는 그동안 함부로 내뱉지 못했던, 다정함 묻은 말들을 기어코 새어 나오게 했다. 이렇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은 낯설었다.
“네. 샌드위치는 책상 위에 두겠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혹시나 시우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까 눈을 반짝이던 도아는 이제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건조하게 돌아섰다. 그 변화를 알아차린 시우였지만, 어차피 그녀와 관계를 진전시키겠다는 마음은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가는 물길을 따라 서서히 채워진 감정은 넘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잘 모여 있었다. 집에 들어오라고 한 것도. 응접실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 것도. 그저 몸이 안 좋은 사람을 위한 배려였을 뿐. 식사 정도는 괜찮겠지. 반말하는 정도까지는 괜찮겠지.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시우는 관심. 호감. 애정. 사랑. 이런 단어들로 정의 내려진 욕망보다 정신이 우위에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은 흘러갔다. 한 명은 상대방을 싫어하겠다 다짐하고, 한 명은 쏠리는 마음쯤이야 얼마든지 넘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