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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넘치지 않게 (15/85)

제15화. 넘치지 않게20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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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흘러 여름이 찾아왔다. 비서가 된 지 3개월. 그 시간 동안 도아는 겉모습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제법 전문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동시에 비서실 핸드폰 속에 담긴 ‘비서실 진짜 매뉴얼’도 점점 비대해졌다.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아는 볼펜을 쥐고 있던 손을 입가로 가져다 대며 집중했다. 화면에는 상앗빛 대리석으로 마감된 로비에서 정결하게 나무를 감상하는 시우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16548714461205.jpg“얼씨구. 저기서 또 저러고 있네.”

참 잘생겼다. 그런데 왜 인성은 그렇지 못할까. 도아는 눈을 가늘게 만들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삑- 복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서는 의자를 가볍게 밀며 일어난 후 대표가 로비에 있었던 걸 모르는 사람처럼 나와 뻔뻔하게 웃었다.

16548714461205.jpg“안녕하십니까. 조찬모임 참석하신 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유리로 된 벽면으로 정원의 아침 햇빛이 찬란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햇살을 받은 도아의 피부가 맑게 빛났다. 깨끗한 피부와 하나로 묶은 머리는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한가득 풍겼다. 시우는 도아의 인사에 무감한 표정으로 턱 끝을 살짝 내리며 인사에 응했다. 긴 다리로 성큼 여유롭게 걸어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도아의 앞을 지나쳤다.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스치는 시우가 익숙한 듯, 도아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쟁반 위에 생수병, 고급 견과류, 녹차 한잔을 준비했다. 도아는 능숙하게 한 손으로 쟁반을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힐끔 그를 곁눈질해 보았으나 역시나 모니터와 태블릿만을 번갈아 응시할 뿐이었다. 오기가 생겨 집요하게 몇 초 더 바라보았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도아가 한걸음 물러나자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 보지도 않고 생수병을 잡아들고는 뚜껑을 열었다. 느긋하지만 우아해 보이는 모양새가 오늘따라 더 얄미워 보였다. 눈은 자신을 보지 않아도 어차피 귓구멍은 뚫려 있으니 상관없었다. 고집부리는 아이에게 설명하듯 차분한 목소리로 똑 부러지게 일정을 보고한 후 미련 없이 뒤돌아 문을 향해 걸어갔다. 시우는 S 호텔에서 점심 약속이 있으니, 12시쯤 나가서 3시는 돼야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3시간의 자유를 떠올리며 입술 끝을 쓱 올렸다. 기분 좋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16548714461214.jpg“캐슈너트.”

도아는 사뿐 걸어가던 발끝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호선을 그리던 입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내려왔다.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을 때쯤 시우가 뒷말을 나지막이 이었다.

16548714461214.jpg“맛있나 보지?”

다른 곳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모니터에서, 창가에서, 도아의 투명한 두 눈으로 옮겨졌다. 도아는 도자기처럼 반질거리며 굳어 있는 양 볼을 위로 끌어당기며 대답했다.

16548714461205.jpg“네? 무슨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완벽한 비서의 모습으로.

16548714461214.jpg“원래 캐슈너트가 5개씩 들어 있는데, 며칠 전부터 하나가 비어.”

영혼 없는 도아의 대답에 시우는 몸을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반문했다. 얇고 긴 속눈썹 끝에 이어진 새까만 눈동자는 사나웠다. 도아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은 알아차렸다. 뭐래. 그런 걸 왜 기억해. 미친 거 아니야? 라는 말을 삼키며 미간을 좁히고, 눈썹을 내렸다.

16548714461205.jpg“대표님. 온리 견과에 왜 항상 캐슈너트가 5개가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죠? 저는 가격을 올리기에는 소비자 눈치가 보이니 은근슬쩍 견과의 개수를 줄인 거로 생각합니다.”

자기소개하듯 또박또박 내뱉은 말은 허공에 머무를 여유도 없이 그대로 시우를 향했다.

16548714461214.jpg“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시우는 물끄러미 비서를 바라보다 눈꺼풀을 매끈하게 내리며 시선을 견과류에 맞추었다. 도아는 고개를 과하다 싶을 만큼 끄덕였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아주 강한 동의의 행위는 그것이 전부였기에.

16548714461214.jpg“점심에 온리 푸드 사장을 만나니 물어보면 되겠네.”

시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전한 말에 도아의 마음속에서 아, 후회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 공유 캘린더에 S호텔 김 사장이라고만 적혀 있어서 상대방의 정확한 이름까지는 알지 못했다. 3개월간 그를 봐 온 결과 더 이상의 거짓말은 더 큰 화를 부를 뿐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지금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16548714461205.jpg“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먹었습니다.”

결론에 도달한 비서는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16548714461214.jpg“알아.”

시우는 캐슈너트 하나를 입속으로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기도 했다.

16548714461205.jpg“이유는 안 물어보시나요?”

16548714461214.jpg“식욕에 부연설명을 하는 것도 우습지 않아?”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건넨 질문에, 그가 너무도 태연하게 되물어왔다. 그 내용이 어처구니가 없어 잘 숨기고 있던 짜증 섞인 진짜 표정이 드러나고 말았다.

16548714461205.jpg“식욕 아닙니다.”

16548714461214.jpg“그럼?”

억울한 듯 단호하게 말하는 도아를 향해 시우가 한 번 더 물었다.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한 저 표정. 그래서 더 대답해 주기 싫었다. 시우는 도아를 무시했고, 그녀 역시 그를 싫어하겠다 결심했었다. 비서는 인격체로써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고 업무에만 집중했다. 일주일 전 나무 그릇에 견과류를 쏟아부으니 평소와 다른 냄새가 났다. 곧바로 새것을 뜯었으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일 많아서 죽겠다는 사람 탈이 날까 싶어 눈에 보이는 아무 견과나 집어 먹었고, 다행스럽게도 맛있었다. 그때부터 순수한 의도로 딱 하나씩 맛만 보았다. 혹시 정말 상했을까 봐. 물론 캐슈너트가 제일 맛있긴 했지만. 그랬는데! 참나. 누굴 거지로 아나. 시우의 긴 손가락 끝에서 얄밉게 데굴거리는 낱알들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그의 건강을 신경 썼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캐슈너트 개수까지 알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저 정도면 변태 아니야? 식욕에 눈먼 거지가 될 것인가 사실대로 말할 것인가. 막막한 심정으로 다홍빛 입술을 열었다.

16548714461205.jpg“며칠 전에 봉지를 뜯었더니 안 나던 향이 나길래 기미 상궁이 되어 먹었습니다. 대표님께서 먹고 배탈이 나면 안 되니깐요.”

기미 상궁이라니. 스스로 내뱉은 어이없는 단어를 선택이 원망스러웠다.

16548714461214.jpg“도아 씨.”

긴장감 서린 변명을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서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16548714461205.jpg“네. 대표님.”

왠지 모르게 만족스러워 보이는 시우의 태도가 퍽 짜증이났다.

16548714461214.jpg“말 다 했으면 나가야지?”

16548714461205.jpg“넵.”

도아는 짧고 간결한 대화가 끝나자 누구보다 빠르게 대답을 하며 몸을 틀었다. 민망했지만 이것보다 더한 일도 많았다.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사선으로 떨어져 사무실에 놓여 있는 장식품들에 내려앉았다.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축음기와 조각품은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나가는 도아의 뒷모습도 선명했다. 시우는 그녀가 방을 완전히 나갈 때까지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달칵. 도아는 문이 완전히 닫히고서야 후회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상한 걸 먹든 말든 신경 쓰지 말았어야 했는데, 괜한 오지랖을 부렸다 싶었다. 조용히 주머니에서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비서실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메모장을 켜고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캐슈너트 개수까지 알고 있는 변태임. 영화 노팅힐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안티팬에게 당신은 피넛만 할 거라는 대사를 치는데, 아마 한시우는 캐슈너트만 할거임. 아니다. 몸은 매우 건실해 보이니 취소. 아무튼 정상이 아님.] 흥. 짧은 콧소리가 도아의 얼굴을 스쳤다. ** 집중력이 흐트러진 건 당황하며 붉어진 도아의 얼굴이 떠오르면서였다. 이도아, 평소에는 차분하고 똑 부러지면서, 가끔 엉뚱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당황하면 나오는 헛소리는 곱씹을수록 웃음이 나오게 한다. 똑똑.

16548714461214.jpg“네.”

16548714461205.jpg“대표님. 온리 푸드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김 사장님께서 급성 장염으로 오늘 아침에 입원하셨다고 합니다.”

비서는 조금 전의 일은 기억에서 지운 듯 친절하게 보고했다.

16548714461214.jpg“아. 연락받았어.”

시우가 나긋하게 말했다. 3시간의 자유시간이 사라진 누구와는 참으로 다른 모습이었다.

16548714461205.jpg“점심 예약은 취소할까요?”

바로 대답을 할 줄 알았던 시우는 잠시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16548714461214.jpg“나랑 도아 씨랑 가도록 할까.”

16548714461205.jpg“네?”

저 인간이 또?

16548714461214.jpg“12시에 출발하는 것으로.”

처음 식사를 한 날 이후로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머리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알레르기가 있다. 핑계를 만들어도 소용없었다. 월튼이 자료집에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눈치가 빨랐고, 꾀병 역시 쉽게 알아차렸다. 그냥 가늠하는 게 아니라 낯빛이 그게 아니라느니 그 증상일 때는 다른 쪽 배를 잡아야 한다느니 아주 의사라도 된 양 구구절절 설명해 주었다. 미리 말을 해주면 더 그럴듯한 핑계라도 만들 텐데, 오늘처럼 갑자기 잡히는 경우가 많아서 그것도 쉽지 않았다.

16548714461205.jpg“그럼…….”

16548714461214.jpg“그럼?”

도아가 또 어떤 핑계를 대며 허튼수작을 부릴까 싶어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가만 멈추고 대화에 집중했다.

16548714461205.jpg“메뉴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스테이크.”

16548714461214.jpg“알겠어.”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만족한 시우가 우드 트레이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고 한 모금의 녹차를 삼켰다.

16548714461214.jpg“오늘 녹차가 너무 진해.”

16548714461205.jpg“네. 주의하겠습니다.”

반성의 기미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비서의 대답을 들으며 이미 향과 온기가 날아가 버린 차에 생수를 부었다. 물 따르는 것마저 아름답게 보이는 불쾌한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던 도아가 뚜벅뚜벅 시우에게로 다가갔다. 맹세코. 보스를 당황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지나치게 과해 장식품들을 지나 데스크까지 넘보고 있었다. 그저 상사가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블라인드를 조절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햇살이 잘 들어오면 도아의 맑은 피부 결은 더욱 반짝거렸다. 우유같은 피부와 깔끔하게 묶은 머리는 단아한 이목구비와 잘 어울렸다. 그래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16548714461205.jpg“대표님!”

따끔한 시선을 느낀 도아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자신을 보느라 찻잔에 녹차가 가득 찬지도 모르고 있는 시우가 눈에 들어왔다. 생수병에서 흘러나온 물은 찻잔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차다 못해 봉긋 솟아 있었다.

16548714461205.jpg“넘치겠어요! 조심하세요!”

도아가 티슈를 뽑아 달려갔다. 다급한 행동이 무색할 만큼 시우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16548714461205.jpg“시키실 일 있으셨어요? 너무 빤히 보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차마 그를 흘겨볼 수 없어 뽑아온 티슈들로 책상 위를 닦는 시늉을 했다.

16548714461205.jpg“한 방울만 더 떨어졌으면 넘칠 뻔했어요. 연하게 다시 타오겠습니다.”

도아가 부드럽게 고개를 들자, 빼꼼 웃는 모습이 검은 눈동자 안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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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714461214.jpg“녹차는 됐어. 그냥 치워.”

건조한 대답이 이어졌다.

16548714461205.jpg“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쟁반 위에 놓인 반쯤 비어버린 생수병, 한두 개 먹은 견과류, 가득 찬 녹차를 가지런히 모아 몸을 틀었다. 시우는 발소리가 문밖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정적 속에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흔들리던 연노란 빛의 수면이 저도 모르게 떠올랐다. 찰랑. 찰랑찰랑. 한 방울만 더 떨어졌으면 넘칠 뻔했어요. 대표님. 넘치겠어요. 조심하세요. 시우는 도아의 모습이 깃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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