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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웃었어? (16/85)

제16화. 웃었어?2021.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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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714636243.jpg“다음 주에 있는 저녁 스케줄은 도아 씨도 동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시우의 제안에 마지막 스테이크 조각을 자르던 도아의 손이 멈추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다음 주 대표의 저녁 일정은 단 한 가지였다. 르베이호텔 천지아 회장이 주최하는 모임. 주최 측에서 파트너 여부를 묻는 메일이 왔었고, 이상하게 권아람의 모습이 떠올랐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보류라고만 말하고 별다른 답을 주지 않았었다. 흔들리던 갈색 눈동자가 미동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우의 얼굴 위에서 멈추었다. 대표님의 파트너가 되어 기쁜 척을 해야 하는데. 정말 설렌다며 웃을까. 영광이라고 말하면서 감동한 표정을 지을까. 깊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평정심을 끌어올리며 싱긋 웃었다.

16548714636247.jpg“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단출했다.

16548714636243.jpg“아니. 생각해보니 괜히 같이 갔다가 실수하면 곤란하겠네.”

시우는 도아의 거짓 미소를 감상하듯 물끄러미 보더니 했던 말을 번복했다. 뭐야. 밥 잘 먹어놓고 또 왜 저래? 도아는 살며시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겨우 막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하얀 살결에 화가 나 미세하게 어긋난 눈썹. 긴장감 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짜증 섞인 표정을 기어이 보고서야 시우는 만족한 듯 말을 이었다.

16548714636243.jpg“내 앞에서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웃음 지을 필요 없어. 어차피 바로 알아차릴 수 있기도 하고.”

오만하게까지 들리는 내용이었다. 도아는 가볍게 쥐고 있던 은색 식기를 내려놓았다. 몇 주 전, 샛별이 떠오를 때쯤. 박 상무와 함께 내려간 지 두 시간이 지났지만, 회의가 길어지는지 보스는 올라올 기미가 없었다. 이대로 야근을 해야 하나 한숨이 나오려던 찰나, 문이 열리는 기계음과 함께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솜뭉치 같은 하얀 반달을 바라보던 도아가 비서실에서 나왔을 때 평소 보다 지쳐 보이는 시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6548714636247.jpg‘오셨습니까.’

16548714636243.jpg‘문제가 좀 생겼어. 1시간 후에 다시 회의 진행할 테니 준비하도록 해.’

그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려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말을 전했다.

16548714636247.jpg‘한 시간 뒤요?”

원망 섞인 눈빛으로 시우의 커다란 뒷모습을 바라보며 뒤따라 걸었다. 도아의 질문이 성큼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16548714636243.jpg‘왜? 아……. 벌써 퇴근 시간인가? 늦어질 것 같은데. 불만이라도?’

16548714636247.jpg‘아니요. 그럴 리가요. 없습니다!’

불만이 왜 없겠니, 그런 걸 왜 물어. 평소처럼 표정을 숨기며 입매를 방금까지 보았던 반달처럼 만들어 보였다. 내려보는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촘촘하고 매서운 시선으로 자신의 표정을 분명 관찰하고 있었다.

16548714636243.jpg‘비서가 대표보다 먼저 갈 생각을 하면 쓰나.’

이어서 신경 긁는 한마디. 그러나 그날 회의는 화상회의로 대체되었고 도아는 무사히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자신이 가식적으로 웃을 때마다 거슬리는 말들이 주렁주렁 이어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억지로 웃음 짓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16548714636247.jpg“티 났나요?”

16548714636243.jpg“매우.”

그리고, 억지로 웃는 것보다는 지금 표정이 더 보기 좋아.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말을 떠올리며 시우는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런 마음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도아는 상대방이 괜찮다고 하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16548714636247.jpg“나중에 다른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다음에 또 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냐며 한소리 할까 걱정이 된 비서가 한마디 했다. 대표는 뭘 그런 걸 확인하냐는 듯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48714636247.jpg“그럼 혼자 가시는 거죠?”

16548714636243.jpg“아니. 방금 한 말은 도아 씨가 너무 가면 쓴 것처럼 웃으니 해본 말이고. 파트너는 필요해.”

새침하던 도아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무슨 옷을 입고가야 하는지. 참석자들의 얼굴을 다 외워야 하는지. 치킨집 딸인 그녀에게 재벌이 주최하는 파티는 너무나 큰 장벽이었다.

16548714636247.jpg“저……. 대표님. 의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제가 그런 곳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습니다. 정말로 실수라도 하면.”

16548714636243.jpg“누구나 처음은 있지. 차차 익숙해질 거야.”

시우는 고민에 빠진 비서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그 사이 직원이 와 테이블을 정리하고 홍차와 디저트를 정갈하게 올려두었다. 하얀 찻잔 안에 담긴 붉은 홍차가 햇빛에 닿아 도아의 입술처럼 반짝거렸다. 시우는 곧고 부드러운 손으로 잔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향긋하고 씁쓸하게 입안에 머무는 액체를 넘기고는 혀를 살짝 돌리며 뒤끝의 향을 음미했다. 업무를 보는 모습과 다르게 편히 기댄 자세는 긴 팔과 다리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여유로워 보였지만 한마디로 뭉뚱그릴 수 없는 감정들이 언제나처럼 그의 평온을 방해하고 있었다.

16548714636247.jpg“대표님. 그럼, 혹시 제가 실수를 할 수 있으니 모임 전에 몇 가지 사항들을 체크하도록 하겠습니다.”

16548714636243.jpg“편한 대로.”

오늘은 웬일인지 꼬박꼬박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해주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16548714636247.jpg“대표님, 혹시 이전에도 비서들과 동행한 적 있나요?”

16548714636243.jpg“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개인적인 일이 아닌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해.”

긴 속눈썹이 유난히 돋보였다. 우측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이 두 뺨을 타고 넘어가다 콧날에서 경계선을 만들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높은 콧대가 더 도드라졌다. 그래. 저 얼굴은 죄가 없지. 도아가 눈초리를 가늘게 만들어 그의 얼굴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는 사이, 핸드폰 진동이 공간에 가늘게 퍼져나갔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핸드폰을 들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우는 핸드폰을 가볍게 얼굴로 가져다 댔고, 도아는 검은 화면을 확인한 후 다시 제자리에 놓으려다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렸다는 것이었다. 퉁. 케이스를 끼운 비서실 핸드폰이 탁한 소리를 내며 한 번 튕기고는 눈치없이 미끄러졌다. 이어서 툭. 시우의 구두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도아는 핸드폰이 단정한 구두를 치고 조금 더 미끄러지다 멈추는 광경을 허리를 굽힌 채 홉뜨고 바라보았다. 터져 나오는 탄식을 숨기며 고개를 빼꼼 올려 통화에 집중한 시우를 확인했다. 통화가 끝나기 전에 얼른 물건을 집어 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디저트를 먹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 같았다. 그러나 도아가 몸을 세워 시우 쪽으로 걸어감과 동시에 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그가 먼저 핸드폰 앞에 도착했다. 부드럽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한 손에는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여전히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남아있는 다른 손으로 자연스럽게 도아의 것을 집어 들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비서에게 건넸다. 고백하는 왕자와 수줍어하는 공주 같은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당황한 마음에 입술이 벌어진 것도 잠시. 졸지에 자신이 모시는 상사를 내려다보는 입장이 되어버린 도아의 두 뺨은 붉은 꽃처럼 달아올랐다. 여전히 통화를 하며 올려다보는 시우의 담담한 눈빛이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 모든 것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봄날의 정원이 떠올랐다. 심장 소리가 커졌다. 불지도 않는 바람이 콧잔등을 간지럽히고, 작게 들리던 음악 소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6548714636247.jpg“감사합니다.”

도아는 두 손을 뻗어 공손하게 핸드폰을 잡았다.

16548714636247.jpg“어?”

순간, 분홍 입술에서 의문이 담긴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그를 내려다보는 것은 처음일 텐데,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흐릿하게 겹치는 그의 모습은 처음 보는 낯선 이미지였다. 깔끔하게 머리를 넘기지도 않았고, 늘 입는 정장이 아닌 편안한 복장이었다. 꽃잎이 떨어지는 포근한 장면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 이렇게까지 선명할 수 있을까 싶어 목덜미가 빳빳해져 왔다. 풀리지 않은 의심을 품은 채 도아는 찜찜한 마음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16548714636243.jpg“더 궁금한 점 있어?”

어느새 통화를 마친 시우가 단정하게 물었다. 너무 방심하고 표정을 드러냈던 건지, 아니면 그가 정말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알아차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날 서 있지 않은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16548714636247.jpg“대표님. 혹시 머리 내리고 출근하셨던 적 있으신가요?”

16548714636243.jpg“응?”

16548714636247.jpg“음 머리를 그러니깐 지금처럼 단정하게 말고, 막 씻고 나온 것처럼 부스스한 느낌으로?”

도아는 손을 머리 근처로 가져다 대고는 열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흐릿하게 떠올랐던 시우의 머리 모양을 표현했다.

16548714636243.jpg“내가 그렇게 출근을 했으면 온 회사에 소문이 다 났을 것 같은데.”

시우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16548714636247.jpg“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정장 말고 편한 옷을 입고 오셨다거나……. 그런 적은 없으시죠? 장소는……. 예를 들면 꽃잎이 떨어지는 공원 같은 곳?”

이어지는 물음에 연극의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던 그의 행동이 멈추었다.

16548714636243.jpg“술 마셨어?”

16548714636247.jpg“아니요. 저 커피 마시고 있는데요.”

도아가 생각해도, 자신의 질문들이 이상하기는 했다. 시우가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합리화하며 목을 가다듬고 똑 부러지는 어투로 대답했다.

16548714636243.jpg“누가 일부러 먹게 했어?”

16548714636247.jpg“네?”

시우는 공원에서 술주정 부리던 비서에게 건넸던 질문을 그대로 했지만, 기억이 없는 그녀는 동그란 눈동자를 빠르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시우는 재미있다는 듯 소리를 내며 짧게 웃었다.

16548714636243.jpg“아니야. 신경 쓰지 마.”

입매는 풀잎 휘어지듯 깔끔하게 올라갔고, 시선은 매끄럽게 비서를 향했다. 헐. 웃었어? 천천히 다가온 미소에, 도아의 가슴이 일렁였다. 자신을 보며 편하게 웃는 모습이 예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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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으로 오후의 나른한 햇빛이 들어왔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은 도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조수석에 타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고민 끝에 이 기사가 되기를 자처했다. 이전 직장에서 회사 차를 몰았던 모든 감각을 되살려, 부담스러운 차종임에도 그럭저럭 운전을 해냈다. 오늘로 3번째. 두 눈은 바빴다. 언젠간 저 인간을 설득해서 수행 기사를 뽑게 하리라 다짐하며 열심히 좌우 전방을 살폈다. 신호에 바퀴가 멈추자 의식하지 않은 척 룸미러로 슬그머니 시선을 올렸다. 태블릿 PC로 업무를 보는 시우는 평소와 다름없이 선선한 분위기였다. 웃으니깐 좋았는데. 웃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필요한 장소에서는 적당히 미소 지었고, 때에 따라 농담 섞인 말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소리까지 내며 웃었던 것이 처음이었기에 지우려고 해도 자꾸만 그 모습이 어릿어릿 피어올랐다. 매끈한 입매와 온기 서린 눈빛으로 완성된 표정은 섬세하게 그려진 하나의 작품 같았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다였을까. 그럼, 그게 다지. 나는 한시우를 싫어하는데, 잘생긴 걸 인정하려니 억울해서 이런 거야. 도아가 시우의 웃음에 대해 제법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그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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