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7화. 완벽한 사람 (17/85)

제17화. 완벽한 사람2021.12.27.

새까만 눈동자와 맑은 갈색 눈동자가 거울 속에서 어색하게 부딪혔다. 평소였다면 싱긋 눈웃음 짓고 자연스럽게 넘겼을 상황이었는데, 마침 빠져 있던 생각이 생각인지라 자신도 모르게 뜨끔하며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잠잠한 시선이 장미꽃잎처럼 얇게 붉어진 도아의 귓불에서 멈추었다.

16548714746842.jpg“지금 메일로 주소 하나 보내놨어. 시간 될 때 들려서 이름 말하고 옷 고르면 될 거야.”

16548714746847.jpg“네? 갑자기, 왜?”

16548714746842.jpg“처음이라며. 가서 추천받아. 마음에 드는 거 다 골라도 돼.”

16548714746847.jpg“한, 한 벌이면 됩니다. 안 그래도 무슨 옷 입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호의에 핸들을 뒤틀듯 힘주어 잡았다. 운전기사를 자처한 과거의 자신에게 칭찬을 보냈다. 지금 그와 나란히 앉아 있다면 얼굴이 매우 달아오를 것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16548714746842.jpg“오늘 날씨가 더운가?”

16548714746847.jpg“아니요. 더우세요? 에어컨 틀어 드릴까요?”

16548714746842.jpg“아니. 도아 씨가 더워 보여서.”

16548714746847.jpg“저 전혀 안 더운데요.”

16548714746842.jpg“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게 붉어.”

집요해 보이는 대답이 기어코 진정되었던 눈동자를 흔들었다. 룸미러를 보기 위해 턱 끝을 위로 올렸지만 도아는 자신의 안색을 살피기도 전에 뒷좌석에 앉아있는 시우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조금 웃고 있었다. 어색했다. 차가운 성격에 겨우 무덤덤해 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냅다 더운물을 부어버리는 건지. 도아는 가늘게 떨리는 호흡을 후, 내뱉었다. 그의 성격에 적응하는 일에 몇 달이 걸렸듯, 내가 저 웃는 모습을 마주하기에 준비가 미흡했구나.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결론 내리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16548714746847.jpg“오늘 기분이 좋은 일이 있으신가 보세요.”

이어서 발그레 웃어 보였다.

16548714746842.jpg“응. 재밌는 이야기를 들어서.”

16548714746847.jpg“어떤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16548714746842.jpg“아마 말해줘도 도아 씨는 기억 못 할 거야.”

벚나무 핀 정원에서 만났던 자신을 꿈 정도로 여기는 비서였다. 굳이 말해줄 필요가 없었다. 도아가 눈을 흘겼다. 그래. 저 캐슈너트가 쉽게 자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아니지. 이어서 어색한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큰소리로 웃었다.

16548714746847.jpg“하하. 어찌 되었건 대표님이 웃으시니 저도 좋습니다.”

16548714746842.jpg“진심으로?”

16548714746847.jpg“네. 그럼요. 오늘 처음으로 절 보고 웃어주셨는걸요.”

진심이었다. 아직도 처음 본 날 그 집요하고 날카롭던 표정이 생생한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까지 보다니! 거기다가 옷까지 사준다고 하는데! 엄청난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조잘거릴 때마다 야무지게 움직이던 도아의 볼은,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환하게 웃자 봉긋 올라갔다. 지금 미소는 긴장감 없는 밝은 웃음일 텐데. 시우는 운전하겠다는 그녀의 고집을 들어준 대가로 그림자 섞인 뒷모습만 지켜보아야 했다. 옆자리에 앉는 게, 좋을 것 같았다.

16548714746842.jpg“당분간 운전은 내가 하도록 하지.”

16548714746847.jpg“네?”

도아는 또 무엇을 거슬리게 했나 싶었다. 너무 크게 웃었나?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한 게 별로였나? 잠시 실수를 되짚어 보려는 찰나, 앞차가 놀리기라도 하듯 갑자기 속력을 줄였다. 으악, 소리를 내지르며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 끼익-! 사고가 나진 않았지만 둘의 몸은 속절없이 앞으로 쏠리며 안전운전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 연출되었다.

16548714746842.jpg“괜찮아?”

16548714746847.jpg“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16548714746842.jpg“집중해.”

얼얼한 발끝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런 건가. 설마 저 인간은 신기라도 있는 걸까.

16548714746847.jpg“네, 운전은……. 대표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도아는 이마로 손을 짚으며 명령에 빠르게 수긍했다.

16548714802777.jpg

  ** 대표가 먼저 회사를 떠나고, 비서 역시 분주하게 퇴근을 준비했다. 며칠 전, 전해 받았던 주소는 회사에서 택시로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도아는 쇼핑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학생 때 바른 자세로 앉아 있으면 칭찬을 받았다. 그래서 늘 곧은 자세로 생활했고, 덕분에 어떤 옷을 입어도 모델처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옷이 필요하면 자주 이용하는 브랜드나 쇼핑몰에서 대충 눈에 띄는 제품을 배송시키고 끝. 그런 사람이 황금 같은 주말에. 그것도 옷을 사기 위해 왕복 2시간의 장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우의 일정상 정시 퇴근이 가능한 날은 오늘밖에 없었다. 도아는 소지품들을 가방 속에 던져넣다시피 하며 로비로 내려갔다.

16548714802783.jpg“이 비서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택시를 잡기 위해 거침없이 걸어가던 동작이 멈추었다. 뒤돌아본 곳에는 우진이 서 있었다.

16548714746847.jpg“우진 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16548714802783.jpg“네. 근무조가 바뀌어서요. 오늘 주혜 씨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는데 같이 가실래요?”

16548714746847.jpg“에이, 아니에요. 둘이서 약속한 거니 재밌게 놀고, 다음에 셋이 봐요. 오늘 일정도 있어서요.”

단호한 말투로 자신의 의지를 내비친 후 다시 도로를 바라보았다.

16548714802783.jpg“장소가 어딘데요?”

16548714746847.jpg“청담동이요.”

16548714802783.jpg“아, 잘됐다. 저희도 그쪽으로 갈 거거든요. 같이 가요. 택시비도 아낄 겸.”

거절의 의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듯 우진은 신나하며 말을 이었다.

16548714746847.jpg“회사 근처에 괜찮은 곳도 많은데 굳이 거기까지 가세요?”

16548714802783.jpg“회사 욕하려면 멀리 가는 게 좋죠.”

16548714746847.jpg“아. 그건 납득이 가네요. 그래도 따로 가는 게 좋겠…….”

재차 거절하기 위해 입을 막 열었을 때쯤 주혜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16548714831427.jpg“우진 씨! 어? 도아 언니!”

16548714746847.jpg“주혜야. 잘 지냈어?”

16548714831427.jpg“당연하죠! 언니 저번에 다 같이 모인 날 이후로 처음 보는 거죠?”

긴 생머리를 옷자락처럼 펄럭이며 달려온 그녀가 도아의 가느다란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16548714746847.jpg“응. 근무 층이 다르니 만나기 어렵다.”

16548714831427.jpg“다음에 다시 시간 맞춰서 또 봐요. 그런데 둘이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16548714746847.jpg“퇴근하다가 그냥 인사 나눴어.”

둘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우진은 틈이 생기자 놓치지 않고 그사이를 파고들었다.

16548714802783.jpg“주혜 씨. 이 비서님도 청담동 간다고 해요. 저희랑 같이 이동할까요? 두 분 친하니깐 그편이 더 좋죠?”

16548714831427.jpg“아……. 네! 저도 좋아요. 같이 가요, 언니.”

주혜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신이 난 듯 방방 뛰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모양새가 더 이상해질 것 같아 도아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16548714831427.jpg“이것 봐요. 언니가 자주 차는 목걸이랑 비슷하죠?”

주혜가 잘 관리 받은 얄쌍한 손톱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16548714746847.jpg“어! 그러네. 완전 비슷하다!”

16548714831427.jpg“내게 좀 더 좋은 걸걸요? 언니는 오늘 안 차고 왔어요?”

16548714746847.jpg“그 목걸이 보안팀이랑 같이 회식한 날 잃어버렸어.”

도아는 자신의 애꿎은 쇄골을 문지르며 아쉬운 듯 웃어보였다.

16548714831427.jpg“어? 그날, 헤어질 때도 차고 있는 거 내가 봤는데.”

16548714746847.jpg“나도 속상해서 한참 찾았는데, 결국 못 찾았어. 운 좋은 사람이 주워서 잘 쓰고 있겠지.”

분명히 고리를 스스로 풀었던 것 같은데, 집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16548714831427.jpg“제가 비슷한 거 보면 말해줄게요. 언니, 그런데 청담동은 무슨 일로 가요? 친구 만나요?”

다른 질문이 시작되었고, 회식 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려던 도아의 노력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16548714746847.jpg“옷 좀 사려고.”

16548714831427.jpg“옷? 무슨 옷이요? 거기 웨딩숍 많은데. 언니 설마?”

16548714802783.jpg“네에?”

앞 좌석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흐뭇한 표정으로 듣던 우진이 귀가 얼얼해질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놀란 택시 기사가 움찔하며 속도를 줄이곤, 가는 눈살로 우진을 쏘아보았다. 냉랭해진 공기에 도아가 작게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16548714746847.jpg“아니야. 아니야. 그냥 작은 디자이너 가게야.”

16548714831427.jpg“이름이 뭔데요?”

16548714746847.jpg“더이브였나?”

목적지를 들은 주혜의 눈이 반짝이다 못해 활활 타올랐다.

16548714831427.jpg“더이브?! 언니, 거기 완전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인데! 예약하기도 어려워요. 세상에!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16548714802783.jpg“저는 상관없습니다. 두 분 편하신 대로 하세요.”

16548714831427.jpg“된다고 해요!!! 제발!!!”

우진과 주혜의 시끌시끌한 대화가 도아의 골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그렇게 휩쓸리듯 이끌리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두 사람과 가게 안에 함께 있었다. 도아가 직원과 예약을 확인하는 사이 주혜는 이미 이 옷 저 옷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란히 걸려 있는 옷들은 대부분 화려한 패턴이나 장식 없이 심플했다. 종류는 정장과 드레스들로, 딱 보아도 고급 원단으로 제작된 느낌이 풀풀 풍겼다. 집무실과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를 보이는 옷들에 픽 웃음이 나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이 없었다. 5분이면 쇼핑을 마치던 도아도 선뜻 옷을 고르지 못하고 옷감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그 사이 주혜는 가게에 있는 모든 옷을 다 입어볼 기세로 피팅룸을 바쁘게 오갔다. 그리고 우진은 도아와 주혜에게 이것저것 권하며 느긋한 쇼핑을 방해했다.

16548714889631.jpg“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실크 소재의 제품입니다. 바디라인을 자연스럽게 살려주는 저희 브랜드 스테디셀러입니다.”

직원은 도아가 제품을 유심히 볼 때마다 친절한 설명을 곁들었다. 두 명의 부산스러움에 정신을 못 차리던 도아는 급한 대로 제일 처음 눈길이 갔던 슈트를 선택했다.

16548714746847.jpg“이게 마음에 들어요. 이거로 할게요.”

16548714889631.jpg“색상은 베이지와 민트가 있는데 둘 다 입어보시겠어요?”

민트 색상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조금 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실용성을 생각해서 무난한 베이지색을 입기로 했다.

16548714746847.jpg“베이지요. 피팅은 괜찮아요.”

16548714889631.jpg“네? 그래도 한번 입어 보심이.”

16548714746847.jpg“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사이즈는 0으로 할게요.”

직원은 이상하게 피팅을 계속 권유했다. 도아는 제안을 수차례 고사하고서야 깔끔한 소파 위에 기대어 앉을 수 있었다. 우진은 주혜에게 이제 가야 한다는 말을 전한 후 도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16548714802783.jpg“이 비서님은 안 입어보세요?”

16548714746847.jpg“옷이 워낙 좋아서 안 입어도 될 것 같아요.”

무릎까지 오는 작은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은 두 남녀. 소개팅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에 우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가만두지 못했다.

16548714802783.jpg“이 비서님…… 왜 안 물어보세요?”

16548714746847.jpg“뭐를요?”

16548714802783.jpg“소문이요.”

우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6548714746847.jpg“아. 정원에서 혼난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16548714802783.jpg“네.”

16548714746847.jpg“음, 그럼 지금 물어볼게요. 왜 그러셨어요?”

도아가 적당히 예의 있게 되물었다.

16548714802783.jpg“그게……. 저는 정말 걱정되는 마음에 팀장님한테만 말한 거거든요? 그런데 하필 저희 팀에서 제일 입이 가벼운 놈이 들어버려서 그렇게 됐어요.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고불거리는 갈색 머리와 고양이처럼 깜빡이는 두 눈.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주혜도 그렇고, 우진도 그렇고 왜 이렇게 어리고 귀엽게 느껴지는지. 누구와는 참 다른 모습에 도아는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16548714746847.jpg“네. 그럴 것 같아서 안 물어 봤어요. 잠깐 본 사람한테 감기약까지 챙겨주는 사람인데, 나쁜 의도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저는 괜찮아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조심해 주세요.”

안절부절못하던 우진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멈추었다.

16548714802783.jpg“아…….”

도아의 얼굴에서 웃음 한 번. 괜찮다는 말 한 번. 그동안 우진의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있던 찜찜하던 응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비서님은 천사야. 완벽해. 완벽한 사람이야.

16548714802783.jpg“저, 그럼 이 비서님. 저희 저녁도 같이 먹으러 갈까요?”

16548714746847.jpg“네? 지금요? 오늘은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16548714802783.jpg“그럼 다음 주 괜찮으세요?”

16548714746847.jpg“다음 주는 조금.”

16548714802783.jpg“그럼 그다음 주로 할까요?

우진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몸을 앞으로 바짝 숙이며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과한 열정에 당황하던 찰나, 가게 안으로 따뜻한 바람이 살랑 들어왔다. 새어 나온 잔머리가 하얀 볼을 간질간질 괴롭혔다. 뺨에 붙은 실오라기 같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넌지시 눈동자를 입구 쪽으로 틀었을 때, 도아는 헛것이라도 본 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6548714746847.jpg“대표님?”

시우였다.

16548714973855.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