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화. 바래다줄게 (18/85)

제18화. 바래다줄게2021.12.31.

도아는 멍한 표정으로 시우의 얼굴을 관찰했다. 퇴근 후에도 그에 대한 감정과 상관없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던 존재였기에 이것이 생시인지 구분할 시간이 필요했다. 매장 직원의 인사에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인 시우가 일행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풀향기처럼 상쾌하고 차분한 향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1654871503735.jpg“대표님이 왜?”

너무 놀라 피곤함도 잊어버린 도아가 작게 인상을 쓰며 신원을 확인했다. 에이치 코리아에 다니는 사람 중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보안팀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사람이었다.

16548715037355.jpg“아, 안녕하십니까. 보안팀 김우진입니다!”

비서가 바보처럼 눈만 깜빡이고 있는 사이, 보안직원이 재빠르게 인사했다.

1654871503736.jpg“네.”

조각같은 얼굴에 드리운 선선한 표정은 자비라고는 없어 보였다.

1654871503735.jpg“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비서가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그다음은 신입사원이 당황할 차례였다. 옷을 갈아입고 피팅룸에서 나온 주혜는 시우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들고 있던 옷을 떨어트렸다.

16548715037371.jpg“안녕하세요! 대표님. 홍보팀 민주혜 사원입니다.”

뜻밖의 상황에 어쩔 줄 모르며 연신 고개와 허리를 숙였다. 주혜를 본 시우는 환영 인사 때에나 볼 수 있는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대답했다.

1654871503736.jpg“네. 안녕하세요”.

그리고 그 뒤에 멀뚱히 서 있는 비서를 불렀다.

1654871503736.jpg“도아 씨. 여기서 보네요. 살 게 있어서 들렀는데, 마침 이렇게 된 거 나 좀 도와줘요.”

느닷없는 등장도, 요청도 모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이대로라면 우진에게 저녁 식사까지 끌려갈 가능성이 컸기에 빠르게 대답했다.

1654871503735.jpg“네. 물론입니다.”

도아의 대답이 떨어지자 시우는 남은 둘에게 조심해서 들어가라는 짧은 인사를 하고는 옷들이 진열된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16548715037355.jpg"이 비서님, 다음에 꼭 만나요."

16548715037371.jpg"언니, 저희는 가 볼게요."

주혜와 우진이 쭈뼛거리며 속삭였다. 둘은 이미 제법 멀어진 시우를 향해 크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6548715067369.jpg"대표님.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아의 혼을 빼놓을 기세로 힘이 넘치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조심스럽게 움츠러든 태도였다. 두 사람이 가게 안을 빠져나가자 폭풍이 지나간 듯, 평화가 찾아왔다. 조용하게 울려 퍼지는 현악 3중주 음률 사이로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871503736.jpg"둘이 온 거 아니고, 셋이 왔어?"

1654871503735.jpg"네. 회사 앞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어요."

1654871503736.jpg"……."

시우가 선선한 얼굴로 도아를 살폈다.

1654871503736.jpg"피곤해?"

1654871503735.jpg"같이 온 두 사람이 워낙 에너지가 넘쳐서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될까요? 남성복 라인은 2층에 있다고 하던데."

1654871503736.jpg"아니. 1층에서 고를 거야. 선물이라서."

보스의 여자에 대해 알려고 한 적은 없었다. 선을 그은 듯 늘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었기에 누군가에게 다정한 말투로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랬는데, 선물? 흠……. 깊은 곳에서 시작된 못마땅함이 작은 한숨이 되어 입가를 맴돌았다.

1654871503735.jpg"아! 그 제품은 미카도 실크 위에 레이스를 덧대어 만들었다고 합니다."

비서는 작게 표출된 자신의 기분을 무시하며 시우에게 집중했다. 그가 가지런히 걸려 있는 옷에 시선을 멈출 때마다 직원에게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제품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조곤조곤거리는 도아의 목소리가 시우의 귀 언저리에서 기웃거렸다. 미술관 도슨트의 설명을 듣듯 제법 진지하게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느긋하게 제품을 고르던 시우는 제일 끝쪽에 걸려 있던 민트색 슈트를 집어 들었다. 도아가 골랐던 것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1654871503735.jpg"저도 그 디자인으로 샀습니다."

1654871503736.jpg"무슨 색으로?"

1654871503735.jpg"저는 이 색 말고, 베이지로 샀어요."

도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별다른 고민 없이 직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16548715095841.jpg"고르셨어요?"

1654871503736.jpg"네. 이걸로 하죠."

할 일을 마친 시우는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다른손으로 매끈한 뒷목을 지그시 눌렀다. 바닥으로 시선을 향하게 해 도아를 외면했다. 알아서 사라고 해놓고 왜 여기에 와버렸는지. 또 주지도 않을 옷은 왜 고르고 앉아 있는지. 무엇에 홀린 게 분명하다. 눈꺼풀을 느리게 내렸다 올리기를 반복해도 자신에게 이는 알 수 없는 짜증과 후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상념들 사이로 도아의 유리알같은 목소리가 기어코 들려왔다.

1654871503735.jpg"대표님. 아까 설명을 들으니 길이 조절도 된다고 하던데, 받는 분이 작은 키라면 맞춰서 선물하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1654871503736.jpg"괜찮아. 딱 맞을 것 같아."

선물 받을 사람이 권아람이라는 친구분이 아닌가? 비서는 삐죽 입술을 내밀며 의문을 표시했다. 매장 안에 울려 퍼지던 소품곡이 끝나자 크게 의식하지 않던 작은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도아는 왜인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상대방의 눈빛이 신경 쓰여 잠시 말을 잊었다. 그 적요 속에서 시우가 고개를 부드럽게 사선으로 기울였다. 깊은 눈동자를 마주한 도아는 은밀한 속삭임이라도 들은 듯 허리를 바짝 세웠다. 긴장감이 역력한 비서를 보며 시우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어차피 홀려버린 거, 조금만 더 이따가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1654871503736.jpg"집까지 바래다줄게."

1654871503735.jpg"……네?"

비서의 딸꾹질 같은 대답과 함께, 드뷔시 피아노 선율이 밤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16548715095867.jpg

  **

16548715037355.jpg"대표님이 왜 오셨을까요?"

가지런히 놓여 있는 연어 초밥을 한 피스 집어 들며 우진이 물었다.

16548715037371.jpg"글쎄요. 아까도 말했지만, 선물 사러 온 게 아닐까요?"

주혜는 비어 있는 컵에 물을 채우다가 물병을 내려놓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을 초저녁 초승달처럼 만들며 웃는 모습이 귀여워 더 얄밉고 서운했다. 우진이 도아에게 반했다는 것쯤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제 딴에는 조심한다고 하지만, 조금만 유심히 관찰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도아가 그를 주의 깊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

16548715037355.jpg"둘이 약속을 한 건 아니겠죠?"

16548715037371.jpg"설마요. 도아 언니 놀라는 거 보셨으면서."

16548715037355.jpg"그런데 둘이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친해 보였죠?"

16548715037371.jpg"글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도아가 우진의 관심을 받는 것도 화가 나는데 잘난 대표와 사이가 좋다고 생각하니 얼마 먹지도 않은 저녁이 명치에 걸린 듯 답답해져 왔다. 도아 언니가 싫은 게 아니다. 성격 좋고, 예쁘고. 곁에 두기 참 좋았다. 하지만 늘 자신보다 한 걸음 앞서 있는 것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다. 이 정돈 귀여운 질투니, 죄책감도 없었다. 인사팀장인 고모에게 말해서 비서실로 보내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계획과는 다르게 도아가 있던 전략팀으로 인사이동은 되지 않았다. 누울 자리를 보고 눕는다고 고모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더이상의 칭얼거림은 자제해야 했다. 도아가 물벼락 맞았던 것은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기 바빴지만, 대표와 편하게 이야기 나누던 모습은 굳이 말하고 다니지 않기로 했다. 주혜는 가슴을 툭툭 치며 화제를 돌렸다.

16548715037371.jpg"우진 씨. 이제 다른 이야기 해요."

16548715037355.jpg"아. 그래요. 제가 너무 이 비서님 이야기만 했네요."

음식물을 씹으면서 연신 인상을 찡그리던 우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혜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도아와 시우에게 쏠렸던 마음이 겨우 중심을 잡았다. 지금 자신 앞에서 귀엽게 미소짓는 상대에게 집중해야겠다 싶었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딘 김우진은 외모에 대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고백의 결과가 거절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더 그럴 수밖에. 그랬는데,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자신을 직장 동료쯤으로만 여기니 섭섭함과 오기가 번갈아 가며 고개를 들었다. 주혜와 약속을 잡은 것 역시 도아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한몫했다. 보안팀 사람들에게 오늘 일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이 비서님이 다른 남자와 친근하게 지내는 이야기는 떠들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시기와 질투의 방향은 같았다. 그렇게 시우가 더이브 매장에 왔던 일은 소문이 되지 않고 폐기처분 되었다. ** 쇼핑백을 든 직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이 물건을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 망설였다. 그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도아의 속은 흐트러져 있었다. 믿기 힘든 말에 고마움과 의심이 동시에 일었지만, 사실 경계하는 마음이 압도적이긴 했다.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자아가 그가 마신 물에 약이라도 탔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거절하기로 마음먹은 도아는 그제야 직원의 친절한 웃음을 발견하고 깔끔하게 포장된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시우의 것. 자신의 것. 헷갈리지 않도록 잘 구분해 드는 사이, 이미 시우는 저만치 멀어져 가게의 출입문을 열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도아는 친절히 안내해준 직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1654871503735.jpg"대표님!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바람이 제법 불어오는 와중에도 흐트러짐 없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1654871503736.jpg"대중교통 이용하면 멀잖아."

차를 향해 걸어가던 시우는 몸을 돌려 뭐가 문제냐는 듯 한쪽 입꼬리를 늘렸다.

1654871503735.jpg"제가 어디 사는지 아세요? 여기서 꽤 멉니다."

태도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도아는 눈썹 사이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1654871503736.jpg"알아. 나도 비서 인적사항 정도는 알아둬야지. 안 그래?"

1654871503735.jpg"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1654871503736.jpg"도아 씨는 내 개인정보 다 알 거 아냐. 못 외웠어?"

1654871503735.jpg"그럴 리가요. 주민 번호, 주소, 연락처, 다 알고 있죠."

1654871503736.jpg"거봐. 서로 알아두자고."

별다른 답변을 찾지 못한 채 망설이는 사이 시우가 성큼 걸어 도아의 앞으로 왔다.

1654871503735.jpg"차에서 업무 이야기하시려는 거 아니죠?"

1654871503736.jpg"이 비서님. 나도 퇴근하고 일하는 거 싫어해."

비서의 경계심 가득한 눈빛에 시우는 픽,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1654871503735.jpg"네……. 그럼 이번 한 번만 신세 지겠습니다."

도아의 떨떠름한 수락이 끝나자 둘은 천천히, 속도를 맞추며 한적한 거리를 걸었다.

1654871503736.jpg‘내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웃음 지을 필요 없어. 어차피 바로 알아차릴 수 있기도 하고.’

아무 말 없이 걷는 와중에 시우가 했던 말이 조용히 되살아났다. 도아는 늘 칭찬에 목말라 있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그가 말했던 마음에도 없는 웃음 역시 그런 결핍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우는 자신 앞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물론, 자신이 저에게 얼마나 칭찬받기를 원했었는지 알고서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억지로 웃는 모습이 거슬렸던 것이었겠지.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기에.

1654871503735.jpg"대표님. 차가 너무 멀리 있어요."

그 말 덕분인지 도아는 지금 대표와 대화를 하는 것이 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1654871503736.jpg"불평은. 주차할 곳이 없었어. 쇼핑백 무거우면 이리 줘."

이 정도 투정은 되려나 조심스럽게 건넨 한마디에 시우는 자연스럽게 대꾸해주었다.

1654871503735.jpg"괜찮습니다. 이 정돈 거뜬합니다."

도아는 비가 강물이 되어 흐르는 것처럼,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의 웃음을 드러냈다. 수줍게 핀 봄꽃 같았다. 피곤함에 지치긴 했지만, 이쯤이야 문제없었다. 쇼핑백을 어깨높이까지 들어 보이며 씩씩하게 힘을 자랑할 때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우의 눈동자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어쩐지 낯설지가 않은 표정과 분위기를 더듬더듬 기억해보려 애썼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작은 소음들 속에서도 초록 잎들이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 여릿한 흔들림에 관심이 쏠리자 마침내 한 장면이 떠올랐다.

1654871503735.jpg"……말도 안 돼."

1654871503736.jpg"뭐가?"

1654871503735.jpg"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해서."

혼잣말에도 친절하게 대꾸해주는 상대방을 향해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그래. 이건 좀 너무 갔다. 이도아. 자신을 보는 표정이 정원을 바라볼 때와 비슷하다고 느낀 건 지금 내 기분이 말랑말랑 해져버린 탓이라고 믿었다.

165487151850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