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고가의 작품2022.01.03.
띠릭. 문이 열리고 어둠 사이로 일정한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낮 동안 햇빛을 듬뿍 받으며 달궈졌던 거실의 가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가운 침묵으로 시우를 반겼다. 혼자 생활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크기의 공간이었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참여한 이 주상복합아파트에 머무르게 된 것은 글로벌 퍼니싱 기업 에이치의 창업자 헨리 마커의 협박 아닌 협박 덕분이었다. 헨리 마커는 늘 공동창업자였던 한지섭을 그리워했으며 그의 아들인 시우에게 뭐든 해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다른 나라 지점에 비해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회사건물과 대표실 역시 그의 강한 주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시우는 정교하게 마감된 가죽 소파에 몸을 가볍게 기대었다. 간결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테이블 위에 오픈된 와인과 와인잔, 코르크 마개가 놓여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정신없이 나갔는지를 떠올리고 허무하게 조소했다. 와인잔 위로 몇 시간 전의 상황이 잔잔하게 떠올랐다. 퇴근을 마친 시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한시우 고객님. 더이브입니다. 일전에 메일로 말씀하셨던 고객님이 오셔서 연락드립니다.
‘아, 오늘 갔나요? 잘 신경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용건을 말하던 여유로운 모습이 사라진 건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면서였다.
-이 비서님! 이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걸로 입어보세요!
-우진 씨 취향이 좀 화려하시네요.
순간 단정하게 결 지어 있던 눈썹이 꿈틀 움직이며, 판단력 또한 흐려졌다.
‘매니저님. 저도 매장에 갈 예정이니, 이도아 씨가 못 가게 부탁드립니다.’
-네……? 아, 알겠습니다.
자신도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김우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아닙니다. 아픈 게 아니라 우진 씨. 아니, 보안요원분이 주셔서…….’
자신의 집에 와서 도아가 남겼던 그 한마디에 직원 이력까지 들여다보았다. 보안팀 1년 차. 운동 쪽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우수직원이었다. 매니저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예약하고, 옷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아를 위한 일이었다. 그녀가 옷을 입고 피팅룸에서 나오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혼자 갈 것으로 생각했던 자신의 판단에 이가 부득 갈렸다. 결국, 멀쩡하게 두 눈 뜨고 남 좋은 일만 해준 꼴이 되었으니 속에서 분노가 성큼 일었다. 그렇게 감정의 졸개가 되어버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차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쇼윈도 너머로 도아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비서의 맞은편에서 실없이 웃는 남자를 보았을 때 기분은 다시 지저분해졌다. 당장 들어가 저 손목을 낚아채서 나올까. 왜 둘이 왔을까. 뿌연 허공에 무의미한 고민을 몇 번 뿌려댔다. 시우는 여유 없는 걸음으로 도아에게 향했다. 바람도 그에게 삼켜진 듯 주변은 고요했다. 그 후 이어진 상황은 굳이 떠올리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숨죽이고 있는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이어서 어둠 사이에 얕은 웃음소리가 채워졌다.
“이도아. 사람 속 뒤집어 놓고 잠이나 들고…….”
사실 도아는 차만 타면 잠이 드는 체질이었다. 그동안 시우의 옆에서 잠들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시우가 조금 편해져 버린 탓에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금요일 저녁이었다. 일주일 내내 긴장하며 업무에 시달리고, 주혜와 우진 사이에서 기운이 빠졌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다이닝룸 서랍을 열어 와인 스토퍼를 꺼낸 시우는 테이블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습관처럼 흰 약통에서 작은 알약을 꺼내 숨을 들이마시듯 담담하게 삼켰다. **
“대표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분기 보고서를 확인하던 눈동자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선선히 움직였다. 바디라인을 입체적으로 살린 디자인은 도아의 몸 선과 맞아떨어져 고혹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아이보리에 가까운 밝은 베이지색 정장과 하얀 스텔레토 힐을 신은 모습이 평소와는 다른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주었다. 노출된 살결이라곤 목선과 발목뿐인데, 형형색색 피어오르는 향기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시우는 비서에게 시선을 두지 않는 것으로 사방으로 뻗어가는 묘한 감정을 막았다.
“정원에 있을 테니 마무리하고 와.”
무미건조한 대답을 내뱉은 그는 빠르게 책상을 정리하고 정원과 연결된 문으로 미련 없이 나갔다.
“뭐야. 잘 어울린다는 말도 없네.”
도아는 픽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비서실에서 홀로 근무하는 그녀가 오늘 하루 많은 사람을 마주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평소보다 과하게 칭찬하는 모습이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도아 역시 옷이 날개라는 것을 스스로 차고 넘친 만큼 느꼈기 때문에. 집에 와서 옷을 입어보고서야 더이브 매장에서 계속 피팅을 하던 주혜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어깨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라인은 완벽하게 핏되며 몸을 감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다 알맞게 끊어지는 팬츠 역시 감탄이 절로 나왔다. 팔뚝을 쓸어내려 보고, 허리를 매만져보며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결심하기까지 했다. 좋은 말 한 번 안 하는 그가 자신의 외모를 칭찬할 거라는 기대감은 없었지만, 본인이 사준 옷을 입고 온 사람에게 잘 어울린다는 말 정도는 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섭섭하다기보다는 그냥 좀 신경이 쓰였다. 그게 다였다.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이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시우는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았다. 도아는 저번에 사고가 날뻔했던 일을 떠올리며 군말 없이 옆 좌석 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열심히 세팅한 머리와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앉고는 비서실에서 챙겨온 작은 물병을 시우의 옆에 두었다. 신경 쓸 것이 많아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대표는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도아가 마지막으로 안전벨트를 매자 차는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주행하기 시작했다.
“창문 열까?”
정적을 깨고 시우가 입술을 뗐다.
“네. 좋습니다.”
도아의 머리가 많이 날리지 않도록 살짝 열어 준 창문 틈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대표님. 오늘 옷 예쁘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다행이네.”
감흥 없는 시우의 대답에 속으로 혀를 찬 도아는 업무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고, 둘은 평소처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의 운전은 확실히 편했다. 왜 수행 기사보다 스스로 운전하기를 자처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피곤하면 미리 자두도록 해. 빨리 끝나지는 않을 거야.”
도아의 눈이 나른해진 것을 발견한 시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권유했다.
“아닙니다. 대표님이 운전하는데 제가 잠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저번에는 잘만 잤던 것 같은데.”
“아. 그건. 업무 외 시간이니 예외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여간 말대답은.”
휘어진 입술에서 잔잔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무거워진 눈꺼풀에 초점을 잡지 못하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이어서 운동화 속 작은 돌멩이처럼 거슬리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거추장스럽던 기분이 작은 웃음 한 번에 사라질 수 있다니. 도아는 다소 편하게 기대었던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에 힘을 주었다.
“왜 그래?”
“아닙니다. 갑자기 잠이 깨서.”
나는 분명히 이 사람을 싫어하는데? 이 사람의 행동에 동요하지 않기로 했는데? 갑작스럽게 느낀 혼란 감에 멀미가 이는 듯 어질했다. 나는 비서이니 대표의 기분이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한 거야. 애꿎은 비서실 핸드폰과 자신의 핸드폰을 포개어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생각을 돌렸다.
“핸드폰 기종이 똑같네.”
“네. 그래서 케이스 안 끼우면 구별이 잘 안 됩니다.”
시우는 운전에만 집중한 것 같으면서도 도아의 작은 행동 하나 놓치지 않고 있었다.
“오늘 참석자 명단은 다 외웠어?”
“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럼 외우지 말라고 하던가. 도아는 심통 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대표님 다른 모임과 겹치는 분들도 있고.”
“온리 푸드 김 사장도 있고.”
“네. 캐슈너트 사장님도 계시고요.”
“이제 캐슈너트 안 먹던데? 그냥 먹어. 어차피 다 들킨 판에.”
“사양합니다.”
시우의 몇 마디에 어느새 마음이 풀린 도아는 바람 사이로 미소를 흘려보냈다. 반짝거리는 두 눈에 다시 그림자가 진 것은 K대 병원 앞을 지나면서였다. 지난주, 공용 스케줄러에 분명 병원 일정이 잡혀 있었지만, 시우는 결국 병원에 가지 않았다. 병원에 관한 내용을 확인하는 물음에 그저 신경 쓰지 말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대표님. 저 여쭤보고 싶었던 게 있었습니다.”
도아는 분홍빛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반복하며 쭈뼛거리다 겨우 말을 꺼냈다.
“응. 말해.”
“그때 병원 방문일정을 안 가셨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요. 혹시 다른 날짜로 제가 다시 잡아 둘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단정한 말투에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대답. ‘건강검진은 꼭 받도록 설득해야 한다.’ 월튼의 문장이 소리를 업고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대표님은 정말 비서와 식사를 했고, 눈치가 빠른 건 이제 말 안 해줘도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그 비서가 그렇게 말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도아는 한 번만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대표님, 진짜 어디 아프신 거 아니죠?”
“내가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여?”
주제넘은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조심스럽게 내용을 이었다.
“아뇨. 매우 건강해 보이십니다. 그런데……. 그냥, 마음에 걸려서요.”
순수하게 다가온 염려에 핸들을 쥔 시우의 손끝에 미세한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나한테 일말의 관심은 있나 보네. 보스와 비서. 그 이상의 관계를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시우라고 모든 것을 의지대로 계획하고 피할 수는 없었다. 손바닥만큼 열려 있는 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마음을 흔들고 생생하게 요동치다 사라졌다.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시우는 정면을 주시했다.
“나 걱정해 주는 사람은 많아. 도아 씨는 그저 비서로서 업무에만 신경 쓰면 돼.”
“그래도……!”
“다 왔어. 내릴 준비 해.”
분명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는데, 언제 시간이 가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캐묻고 싶었지만 이미 시우는 차에서 내려버린 후였다. 저 거짓말 같은 대답이 진짜이기를 바라며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걷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도아는 자신이 에이치 코리아 대표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직원 중 한 명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었다. **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클래식 무드 등으로 장식된 어스름한 복도를 지나자 넓은 야외 정원이 나타났다. 푸른 잔디밭에 키 큰 상록수들이 담을 쌓고, 공중에 작은 알전구들이 노란빛으로 영롱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정원과 이어진 건물 로비는 모든 창이 열려 있었고, 일찍이 도착한 참석자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피아노 트리오 소품곡이 창틀 너머로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도아 씨.”
“네.”
“내 팔에 손 올려야지.”
“네?”
갑작스런 제안에 도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덩달아 속눈썹까지 푸들거렸다.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대다수의 사람이 다정하게 파트너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비서는 자신이 대표의 몸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수로라도 손끝 하나 닿지 않도록 늘 신경 썼다.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미술관에 있는 고가의 작품을 관계자 몰래 만지는 느낌이랄까. 시우가 긴 팔을 적당한 각도로 접는 것이 보이자, 도아는 주렁주렁 달려 있는 전구들로 눈동자를 올렸다. 그래. 팔뚝에 손 올리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안겨도 봤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이기는 했지만 유난 떨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왜냐면 자신은 이 사람에게 애정이 없으니까. 눈은 여전히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조심스럽게 그의 팔 위에 얹었다. 하. 역시 고가의 작품은 만지는 것이 아니었다. 옷감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팔뚝이 이상하게 가슴을 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