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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해야만 해 (20/85)

제20화. 해야만 해2022.01.07.

시우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당한 의상을 택했다. 클래식 카라 셔츠에 싱글 버튼과 더블 벤트로 마무리된 다크 네이비 상의, 노 커플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밑단을 가진 하의는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임에도 격식을 차린 느낌을 주었다. 슬림하면서 탄탄한 몸 선과 파트너의 부드러운 실루엣이 조화를 이루며 완벽한 커플의 모습을 완성시켰다. 도아는 평소보다 높은 구두를 신었음에도 시우의 턱 끝쯤에 시선이 겨우 닿았다. 그런 둘의 모습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이 정원을 지나 나란히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행동을 멈추고 하나둘 입구 쪽으로 관심을 모았다. 짧은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수군거림이 잔잔한 파동처럼 퍼져나갔다. 도아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 곧게펴고 있던 어깨를 움츠렸다. 저도 모르게 시우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의지했다.

16548715462952.jpg“괜찮아. 내가 여자 파트너를 데리고 온 적이 없어서 신기해서 그러는 거야.”

16548715462958.jpg“무슨 소리세요? 이전에도 비서와 함께 오셨다고 하셨잖아요.”

긴장되는 와중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배신감에 고개를 휙 돌려 작은 소리로 책망했다.

16548715462952.jpg“그 비서가 여자라고는 안 했는데.”

무표정하게 대꾸하는 모습에 또 당했구나 싶었다. 입도 다물지 못한 채 시우를 흘겨보았다.

16548715462958.jpg“네. 네. 첫 파트너가 되어서 아주 영광입니다.”

타격감 하나 없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충 대답하고, 꼼꼼히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비서로 왔으니 주변에서 무어라 한들 상관없었다. 그저 맡은 업무를 잘 수행하다 퇴근하면 그만인 것. 외워두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저 사람이 자신의 보스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빠르게 계산했다.

16548715462975.jpg“한 대표. 오랜만이에요.”

16548715462952.jpg“안녕하세요. 김 전무님. 중국으로 사업 확장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16548715462975.jpg“하하. 고마워요.”

시우에게 말을 건네던 전무가 자신의 파트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도아가 시우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16548715462958.jpg“파트너로 오신 분은 중국지점을 총괄하고 있는 위슈신 이사입니다.”

대표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16548715462952.jpg“위슈신 이사님도 반갑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위슈신은 환하게 웃으며 어린아이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짧은 만남이 끝나자 이번엔 젊은 남자들이 다가와 이야기를 건넸다. 도미노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의 행렬. 낯익은 사람과의 안부 인사, 건너 건너 연결된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그 와중에 시우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음색이 도아의 귓잔등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16548715462952.jpg“도아 씨. 굳이 그렇게 설명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자연스럽게 소개를 받는 게 이야기를 나눌 때 도움이 되기도 해.”

잠깐의 여유가 생기자 시우가 태평스럽게 충고했다.

16548715462958.jpg“네. 참고하겠습니다.”

대표와 동행하는 첫 행사인 만큼 도움까지는 못 되더라도 피해는 주고 싶지 않아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 칭찬 한마디 안 하는 보스가 싫었다. 그런 사람을 위해 꾸역꾸역 무언가를 하는 자신의 태도에 고개가 절로 저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성격상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숨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으니 그저 목소리를 올리며 밝게 대답했다.

16548715462952.jpg“뭐 어쩌라는 거야. 라고 말하는 얼굴인데.”

시우가 입매의 끝을 가볍게 위로 올렸다. 내용을 듣지 않고 얼굴만 보았다면 연인을 대하는 표정과 비슷했을 것이었다. 그 다정한 표정에 놀라 고개를 급히 돌렸을 때 시우와 자신을 향하고 있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한시우 씨는 연기력이 차암 대단해.

16548715462952.jpg“도아 씨.”

그때, 오만한 그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생각의 틈 사이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8715462958.jpg“네?”

고개를 돌려 시우를 바라보자 그가 담담하게 명령했다.

16548715462952.jpg“한번 웃어봐.”

악기 소리와 대화 소리가 뒤섞여 시끌시끌한 와중에도 그 소리만큼은 선명했다.

16548715462958.jpg“이렇게요?”

영문도 모른 채 비서가 입 끝을 올리자 대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와 시선의 방향을 같은 쪽으로 맞추고 점잖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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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715462952.jpg“잘 들어. 저쪽에 보이는 머리 긴 여자 보이지?”

16548715462958.jpg“천지아 회장님 옆에 계시는 분 말씀이세요?”

16548715462952.jpg“맞아. 이름은 유리라. 천 회장님이 아끼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중 한 명이야. 그런데 가구 디자인 솜씨도 아주 좋아. 내가 천 회장님을 모시고 갈 테니 그동안 우리 회사와 일할 수 있도록 설득해봐.”

16548715462958.jpg“네? 제가요? 갑자기요?”

도아가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를 시우 쪽으로 보냈다. 원망 섞인 눈빛을 확인한 대표는 더 부드럽게 도아를 보았다.

16548715462952.jpg“저 디자이너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겪었던 가정폭력 기억 때문에 남자들을 싫어해. 나처럼 키 큰 남자는 더욱. 그러니 도아 씨가 해야 해. 성공하면 예전에 말했던 작은 의견을 한 번 실행해 볼 생각이야.”

16548715462958.jpg“작은 의견이요?”

16548715462952.jpg“그때. 작은 의견을 내지 않았어?”

16548715462958.jpg‘네. 리폼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준비 중인 4호점에 커스텀 서비스 파트가 따로 있어서 소파 다리나 옷장 도어 마감 등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디자인은 개인 디자이너와 계약을 맺고……. 아, 작은 의견일 뿐입니다.”

16548715462952.jpg‘네. 작은 의견이네요.’

16548715462958.jpg“아…….”

몇 달 전 기억이 스쳤다. 분명히 별로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입이 바짝 타들어 갔다.

16548715462952.jpg“올라온 디자이너리스트를 봤지만, 저 디자이너 외에 마땅한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어.”

16548715462958.jpg“대표님. 그래도 저보다는 조금 더 전문적인 분이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지금 준비도 못 했고. 차라리 회사로 불러서 미팅을 가지시는 게…….”

도아가 시우의 소맷단을 간절하게 붙들었다. 시우는 그 손끝을 잠잠하게 바라보다 다시 비서와 눈을 맞추었다.

16548715462952.jpg“미팅이 가능했으면, 이렇게 비서까지 대동해서 왔을까. 큰 회사와는 일을 거의 안 해. 천회장님은 어릴 때부터 후원해 준 사람이라 가능한 거고.”

16548715462958.jpg“왜 미리 언질을 안 해 주셨어요? 그럼 준비를 했을 텐데.”

16548715462952.jpg“자신의 작품을 미리 알고 온 사람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설명하는 걸 좋아하거든. 어설프게 모르는 척 연기하면 반감만 사.”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가는 손가락을 다정하게 감싸 쥐며 빳빳한 팔뚝 위로 올렸다.

16548715462952.jpg“해야만 해. 이리 와.”

이곳에 들어올 때처럼 도아가 팔짱을 낀 모습이 완성되자 시우는 그녀를 다정하게 이끌었다. **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빛에 급기야 죄책감이 들었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시우는 천 회장과 2층 테라스로 올라왔다.

16548715550791.jpg“조용하고 시원하지?”

16548715462952.jpg“네. 올라와서 보니 더 정정해 보이십니다.”

16548715550791.jpg“그럼! 내가 정정해야 자식들이 내 돈 가지고 헛짓거리를 안 하지. 그놈들이 네 아버지만 같았어도 진작 은퇴했다.”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콘솔 위에 놓인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이어서 시우에게도 권하는 듯 손을 올리며 찡긋 웃어 보였다.

16548715550791.jpg“와인?”

16548715462952.jpg“좋습니다.”

16548715550791.jpg“언제 이렇게 자라서 나랑 와인을 마시게 된 거니. 네 부모님도 하늘에서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거야. 너 정말 의사 되는 줄 알고 놀랐던 걸 생각하면. 어휴.”

둘은 자연스럽게 난간 쪽으로 자리를 옮겨 황금빛이 내려앉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시우가 일반대학이 아닌 의대로 진학했을 때 그것을 말리기 위해 직접 미국까지 방문했던 천 회장이었다. 몇 시간을 설득해도 완고하던 아이였는데 돌연 그 길을 포기하고 에이치 코리아의 대표로 와 있으니 잘된 일이면서 찜찜한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시우의 부모님은 그가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둘 다 병명도 생소한 희귀병이었다. 한시우는 부모의 이야기만 나오면 말을 아꼈다.

16548715462952.jpg“글쎄요. 잘 자랐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듯합니다.”

지금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듯 대충 대답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16548715550791.jpg“늙은이 앞에서 뭔 헛소리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고 있냐. 오늘 같이 온 사람은 누구야?”

16548715462952.jpg“저희 회사 비서입니다.”

16548715550791.jpg“허구한 날 월튼만 데리고 오다 그놈 결혼하고는 혼자 오길래 남자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나는.”

천회장이 와인을 홀짝이며 킬킬거렸다.

16548715462952.jpg“한국 와서는 너무 바빠서 누굴 만날 시간도 없었어요.”

16548715550791.jpg“핑계는. 만나려면 다 만난다. 하몬제약 대표는 회사가 그 난리가 났는데 벌써 세 번째 결혼식 한다더라.”

16548715462952.jpg“파트너 안 데려오면 저희 회사와 협업 취소시킨다고 협박하셔서 같이 온 겁니다. 오해 마세요.”

16548715550791.jpg“언제는 내가 협박 안 했니? 늙은이의 감을 무시하면 못쓰지.”

그녀는 잔을 내려놓으며 가늘어진 눈초리로 시우를 몰아세웠다. 이런 추궁은, 시우가 여자와 팔짱을 끼고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천 회장이 본 순간 이미 예견된 미래였다.

16548715462952.jpg“회장님. 요즘 그렇게 잔소리하시면 꼰대 소리 들으세요.”

시우는 여유롭게 천 회장의 잔소리를 끊었다.

16548715550791.jpg“무슨 소리! 직원들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확신에 찬 태도에 체념한 듯 가볍게 눈꺼풀을 내렸다.

16548715462952.jpg“부럽습니다. 저는 이미 공공의 적일 겁니다. 잘 관리해서 다음 대표에게 넘겨줘야죠.”

16548715550791.jpg“하여간 멀쩡하게 생겨서 얼빠진 소리나 하고. 왜 넘겨. 네가 다 해 먹어야지. 저번에 보니 헨리도 너한테 계속 맡기고 싶어 하더니만.”

시우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대신 무미건조한 미소로 일관했다. 성질 급한 천 회장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한마디를 더 거들었다.

16548715550791.jpg“아무튼, 너 결혼할 때 주례는 무조건 나다. 지섭이 주례 못 해줬으니 너라도 꼭 해줘야지.”

16548715462952.jpg“저는 결혼 생각 없습니다.”

16548715550791.jpg“아이고. 그래. 하게 되면. 안 하면 별수 없고. 그럼 진짜 왜 파트너는 갑자기 같이 온 거야?”

16548715462952.jpg“유리라 디자이너 때문에요. 같이 일할까 합니다.”

16548715550791.jpg“뭐? 리라를? 아서라. 쟤도 한 똥고집이야. 엄청난 영감을 주거나, 아니면 생명을 구해주거나. 그 정도로 거창한 거 아니면 택도 없다.”

오늘도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아이를 보며 천 회장은 머리에 손을 올리고 푹신한 소파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우는 그녀를 따라 룸으로 들어가기 전,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무리 지어 있는 사람들을 돌다리 하나씩 옮겨 보는 느낌으로 차례차례 훑었다. 너무도 쉽게 도아를 찾을 수 있었다. 못하겠다고 하더니 제법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할 무렵, 자신이 들어간 입구 쪽을 곁눈질하는 비서의 모습이 시선 안에 들어왔다. 눈을 가늘게 만들어 조금 더 집요하게 관찰했다. 손목을 올려 시계를 확인하고,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척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는 비서의 모습.

16548715550791.jpg“뭐해? 안 들어오고?”

크고 걸걸한 천 회장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16548715462952.jpg“지금 들어갑니다. 회사 이야기는 되도록 빨리 끝내도록 하죠.”

적당한 미소를 머금고 돌아선 시우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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