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여자 친구2022.01.10.
크고 작은 장식품과 격식을 갖춘 사람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도아는 제법 잘 버티고 있었다. 리라와 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표 따위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도아 씨, 사람을 굉장히 편하게 해 주네요. 저도 모르게 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재밌었어요. 제가 너무 몰라서 일일이 설명해 주기 귀찮지 않으셨어요?”
“전혀요. 저는 디자인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서요. 디자이너 관두고 강의나 할까 봐요.”
리라가 생긋 웃으며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마침 그 모습을 목격한 직원이 그녀에게 핑거푸드를 건네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체격 좋은 남자의 그림자가 바싹 다가왔다. 남자가 은색 트레이를 내리며 눈을 맞추자, 리라의 손에 들린 포도주가 달달 흔들렸다.
“손님?”
하얗게 질린 얼굴빛에, 직원은 당황한 듯 고객을 불렀다.
“…….”
“아. 음식은 괜찮습니다.”
도아가 아무 말도 못 하는 리라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대신 답했다.
“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남자가 그제야 싱긋 웃으며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 뒷편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고마워요. 제가 좀 덩치가 큰 사람이 편하지 않아서요…….”
“네. 그럴 수 있죠. 이유야 다 다르겠지만, 저도 처음에 대표님만 보면 잔뜩 움츠러들었어요.”
“어머. 정말요?”
리라가 작은 손으로 입술을 눌렀다. 정말 놀라는 눈치였다.
“네. 이상할 정도로 많이 긴장했어요. 어렵고, 불편하고 그래서요.”
“너무 친해 보여서 전혀 생각을 못 했어요.”
“친하다고요? 어디가요?”
“아까도 도아 씨라고 부르면서 다정하게 이야기하셨잖아요.”
그녀가 와인잔을 한 모금 홀짝이며 꺼낸 한마디에, 이도아. 시우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안개처럼 머리를 가득 채웠다. 도아는 그것을 지우기 위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대표님 목소리가 좋아서 그렇게 느껴지셨나 봐요.”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두 분 서 계신 게 딱 그렇게 보였어요. 잘 어울려서 당연히 여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비서라고 해서 놀랐어요.”
“하하. 잘 어울릴 리가요. 원래 이런 행사에 혼자 참석하시는데, 오늘은 목적이 있으셔서…….”
“목적이요?”
리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이제 정말 본론을 말해야 할 때였다. 도아는 거짓말보다 진실이 낫다고 판단했다.
“사실, 저희 회사에서 디자이너 커스텀 서비스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표님이 디자이너님과 꼭 협업하고 싶어 하세요.”
“아, 그러니깐 한시우 대표님이 저를 설득하기 위해 비서와 동행한 거군요?”
“네. 맞습니다.”
“사실 예전에도 에이치 코리아에서 제안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이 분야를 잘 아는 분이셨는데, 제가 거절했죠.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관련이 없는 도아 씨를 이용한 걸까요?”
디자이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짧게 웃었다.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제가 처음에 의견을 냈기 때문에 마무리를 지어봐라. 이런 뜻인 거 같으세요.”
“어머, 도아 씨가 낸 아이디어인가요? 의견은 좋네요. 에이치 그룹에도 새로운 방향이 되겠어요. 하지만 오늘 즐겁게 시간을 보낸 입장에서 그런 목적이 있었다니 좀 아쉬운데요?”
와인 잔을 비운 리라가 앞가슴을 톡톡 두드리며 이야기를 이었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도 부탁과는 별개로 이야기 나누면서 좋았어요. 특히 디자인이 나오게 된 숨은 이야기는 정말 흥미로웠고요.”
“그렇게 살살 구슬려도 안 돼요. 지금 일은 거절하도록 할게요. 요즘은 별로 일하고 싶지 않아요. 딱히 영감이 떠오르지도 않고요.”
“디자이너님. 아까 영감이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해주셨을 때 사실 생각난 게 있어요. 세월의 흔적이나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하셨죠?”
도아는 거절쯤은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맞아요. 요즘은 다 깔끔하고, 예쁘기만 해서.”
“이런 건 어떠세요? 원하시면 제가 안내해 드릴 수도 있어요.”
** 천 회장의 연설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메인홀로 모였다. 도아와 시우는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기둥 근처에서 감사 인사를 전하는 천 회장을 바라보았다. 눈발 같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행동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멀리서 보아도 왜 저 사람이 성공했는지를 납득시켰다. 곁눈질로 시우가 연설에 집중하는 것을 확인한 도아는 슬그머니 관자놀이를 누르며 인상을 썼다.
“무슨 생각해?”
귀를 두드리는 차분한 목소리에 도아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빛이 가볍게 부딪혔다.
“그게……. 배고프다는 생각이요.”
“그래. 이 비서님이 대식가였던걸 깜빡했네. 조금만 참아. 저것만 끝나면 식사니.”
시우가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조소했다. 그 옆얼굴을 힐끗 본 도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냐고 왜 안 물어보세요?”
“표정 보면 딱 나오는데, 뭘 굳이 물어.”
“네……. 죄송합니다. 설득은 못 한 거 같습니다. 사진을 보여드리고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는데, 대답이 영 아니었어요.
“뭐라고 대답했는데?”
“생각해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비서는 담담하게 결과를 보고했다. 연락처를 교환했으니깐 다음에 한 번 더 설득해봐야지. 얇은 입술을 꾹 다물며, 다음을 기약했다.
“천 회장님은 자식이 없었으면 더 성공했을 분인데 말이죠.”
“그러니깐요. 어쩜 사고를 그렇게 치는지.”
마침 들려오는 수군거림이 속상한 마음을 알맞게 끊어주었다. 문득 시우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멀리 생각을 뻗을 필요도 없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노골적으로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를 가족으로 만들고자 하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자신이야 한시우에 대한 기대치가 지구 내부 내핵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다고 치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감탄이 나오는 외모와 예의 바른 성격을 가진 완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결혼보다는 일, 여자보다는 조경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몇십 년이 흐르고 결혼하지 않은 채 천 회장처럼 하얀 머리가 되어 나무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고 있을 시우를 생각하니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도아는 생각에 빠져 있느라 시우가 새까만 눈동자를 내려 자신을 선선히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발그레 물든 채 봉긋 올라 있던 볼에서 시선이 떠난 것은 날카로운 비명과 어수선한 분위기가 장내를 휘감으면서였다. 도아에게 신경이 쏠렸던 시우는 조금 늦게 소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감지했다. 사람이 몰려 있던 곳과는 떨어진, 도아와 시우의 위치에서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졌지만 뚜렷하게 드러난 고통의 안광. 온기가 사라진 창백한 살갗. 의식을 잃은 사람을 발견한 순간 시우의 얼굴에 음영 없는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졌다. 쿵. 가슴이 내려앉는 듯 어둠이 매섭게 몰려왔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었다. 저릿한 고개만을 겨우 움직여 시선을 시퍼런 허공으로 보냈다. 이어 시야에 얼룩이 생기고 짧아진 호흡이 매서운 속도로 그의 안정을 좀먹어 갔다.
“하…….”
어수선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답답하고 괴로웠다. 겨우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는 사이, 대표의 상태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비서는 망설임 없이 어수선한 인파 속으로 달려갔다. ** 도아는 어릴 적부터 노력하고, 성취하는 것을 좋아했다. 무엇이든 마음먹으면 최선을 다했다. 다른 사람들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건강보조제 홍보인지 CPR 교육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교육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보스가 흰머리 할아버지가 된 이상한 상상이나 하며 고개를 돌렸던 순간, 눈이 마주친 사람이 쓰러졌다. 그냥 기운이 다해서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라 심장을 부여잡고 괴롭게 인상을 쓰다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마음이 놀라기도 전에, 그녀의 두 발이 먼저 떨어졌다. 힘없이 늘어진 형체는 누구인지 굳이 노력해서 기억해 낼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몇십 분 전 이야기를 나누었던 유리라 디자이너였다.
“직원분! 빨리 신고 좀 해 주세요!”
도아는 큰소리로 도움을 청하고는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실제로 해보는 것은 처음이라 이것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몸속 어딘가에 자리 잡은 그녀의 심장이 다시 움직이길 바라는 생각뿐이었다. 수직으로 힘을 주어 가슴을 내려찍기를 수십 번. 정성스럽게 굴곡져 있던 도아의 머리칼은 이미 흐트러진 채로 정신없이 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우는 필사적으로 초점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목을 조여오는 감각이 스멀스멀 자신의 몸을 휘감았다. 천둥처럼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는 고요한 몸속에 빠르게 울려 퍼졌다.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머리로는 판단이 내려진 후였다. 당장 차로 가서 약을 먹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그를 훅 덮치며 낭떠러지로 몰고 갔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내려가는 계단처럼 툭툭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빼곡한 다리들이 울타리처럼 유리라와 도아를 둘러싸고 있었다.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고 구경만 하는, 한심하고 짜증 나는 상황이었다. 걸음을 옮기는 순간 휘청, 쓰러질 듯이 몸이 흔들렸으나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신경을 곤두세우며 발걸음을 떼었다.
“제세동기는요?”
“한, 한 대표님. 지금 가지러 갔습니다!”
“환자 고개부터 잡아주시죠.”
직원에게 타이르듯 말하며 상황을 확인하고는 도아의 옆으로 가 무릎을 굽혔다. 정신없는 도아의 귓전은 웅웅거리는 소리만 요란했었다. 그러나 차가운 그림자가 제 옆에 다가왔을 때 본능적으로 그가 시우임을 알아차렸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란 몸뚱이가 기우뚱거리며 이제는 한계라고 말할 즘이었다.
“도아 씨. 이제 내가 할게.”
멈추지 않는 도아의 팔목을 가볍게 밀며 시우가 말했다.
“하아. 대표님. 제가 지금 잘한 건지…….”
도아는 불안한 듯 잔뜩 힘이 들어간 눈동자로 확신 없이 말했다.
“걱정 마.”
그의 목소리가 건조한 사막에 스며드는 우기의 바람처럼 불어왔다. 이어지는 얕은 미소에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빠르게 자리를 잡은 시우는 미세하게 떨리는 호흡을 내뱉으며 자세를 취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상함을 느낀 도아는 쉽게 눈을 떼지 못하다 그의 목에 핏대가 솟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몸이 안 좋은 건지, 긴장되어 그런 건지 도통 알 수 없어 한동안 그의 옆을 떠나지 못했다. 힘들어 보이는 상태와는 별개로 시우의 행동은 전문적이었다. 신속하고 안정적인 움직임으로 환자의 고개를 조절해 기도를 확보하고 능숙하게 심폐소생술을 이어나갔다. 결국 도아는 눈치를 보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직원이 제세동기를 가지고 왔고, 시우의 지시하에 패드를 붙이고 전기충격이 가해졌다. 제세동이 완료되고 흉부 압박을 반복하기를 수차례. 늦지 않게 도착한 구급대원은 유리라를 황급히 환자운반기로 옮겼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구급 대원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시우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도아의 얇은 손목을 잡았다.
“빨리 나가자.”
갈색 눈동자에 아까보다 훨씬 새파랗게 질려 있는 시우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