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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들어와 (22/85)

제22화. 들어와2022.01.14.

역시 시우가 힘들어 보인다고 느꼈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느긋하고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불안한 모습이 역력했다. 조심스럽게 그를 부축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비서면서 보스의 상태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생각하니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키 큰 상록수의 기다란 그늘을 지나 초여름 습기를 머금은 어린 잔디를 밟으며 걸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의 불규칙한 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와중에도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모습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로비를 나와 운전자석에 앉기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이렇게 피 말리는 시간이 있었나 싶었다. 도아는 그를 뒷좌석 상석에 타도록 부축하고 운전자석 핸들을 잡은 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16548715917582.jpg“대표님. 바로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16548715917587.jpg“병원은 됐어. 콘솔박스 안에 약 있어.”

16548715917582.jpg“약이요?”

시우의 대답에 재빠르게 콘솔박스를 열자, 의약품명도 알 수 없는 하얀 약통이 눈에 들어왔다.

16548715917587.jpg“줘.”

짧은 한마디가 다급했다. 약통을 먼저 주고, 자신이 출발할 때 챙겼던 물병을 집어 들었다. 떨리는 제 손을 무시하며 뚜껑을 열어 시우에게 건넸다. 날카롭게 인상을 쓴 채 원형 알맹이를 입에 넣은 시우는 힘겹게 물병을 입술로 가져다 대었다. 매끈한 목선의 중심에 자리잡은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도아는 한시름 놓은 듯 시동을 걸었다.

16548715917582.jpg“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아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시우는 대답이 없었다. 적막한 차 안에 그의 깊고 거친 숨소리만 가득했다. 소리가 무게라도 있는 양 도아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지금이라도 병원으로 가는 게 좋을까 싶어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민하는 사이 수십 분이 지났다. 어두운 차창을 통과해 흐릿하게 들어오는 빛이 그의 얼굴에서 머물렀다. 룸미러에 담겨 있는 그의 모습은 오래된 사진처럼 생기가 없었다. 걱정을 한가득 담은 비서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득했다. 얇은 눈꺼풀이 꿈틀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올라갔다. 걱정에 대답이라도 해 주듯, 선선한 눈길이 비서를 향했다.

16548715917587.jpg“도아 씨.”

힘이 빠진 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퍽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핸들을 얼마나 꽉 잡고 있었는지 도아의 손끝은 어느새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16548715917582.jpg“네. 대표님.”

시우는 마디가 단단한 긴 손가락을 들어 내비게이션을 가리켰다.

16548715917587.jpg“목적지 리스트에 권아람 의원 있을 거야. 그쪽으로 출발해.”

16548715917582.jpg“권아람 님이요?”

16548715917587.jpg“왜?”

16548715917582.jpg“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권아람. 의사, 였구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등장한 뜻밖의 이름이었다. 도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동 버튼을 꾸욱 눌렀다. 한시우가 본인의 공간으로 스스럼없이 부르고, 저렇게 힘든 순간에 의지하는 사람. 분명, 시우의 창백한 얼굴을 확인한 이후 머릿속이 온통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삽시간에 걱정이 아닌 다른 기분으로 마음이 채워진 기분이었다. ** 병원은 단독건물로 규모도 제법 컸고, 내부는 우드톤으로 깔끔하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옷감이 사그락 스치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복도였다. 도아는 벽면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원장의 이력을 읽고 또 읽었다.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시우와는 그곳에서 알게 된 사이이지 않을까 추측했다. 유 디자이너님에게 응급처치하는 모습이 보통 솜씨가 아니던데, 의사 친구한테서 배운 걸까. 밝은 옷감을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다. 반듯하게 허리를 추켜세운 채 앉아 있으니, 가는 목이 도드라져 흰 사슴을 연상시켰다.

16548715917587.jpg‘나야. 지금 네 병원으로 가고 있어.’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 아람과 통화를 하던 시우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촘촘하게 자리 잡은 얇은 속눈썹들이 흔들거렸다. 때마침, 문 너머로 둘의 말소리가 뭉개져서 전해졌다. 그 덕에 몽롱했던 정신을 바로잡고 미뤄두었던 생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기사가 나면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천 회장님 비서실에 연락해야겠다. 디자이너님은 구급대 오기 전에 의식이 돌아왔으니 괜찮겠지? 혹시 메모할 것이 있을까 싶어 본인의 핸드폰 메모장을 켜고, 느슨하게 전화기를 쥔 채 통화를 시작했다. 달칵. 용건을 주고받는 대화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쯤 주사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소리가 방해될까 싶어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도아는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주사실에서 나온 것은 아람이었다. 세트로 잘 맞춰진 브랜드 운동복을 입고 짧은 머리를 낮게 묶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운동을 하다가 시우를 위해 한걸음에 달려온 모양새였다.

16548715946935.jpg“비서분? 안 갔어요?”

당연히 도아가 갔을 거로 생각했었는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 커졌다.

16548715917582.jpg“네. 걱정돼서요.”

16548715946935.jpg“시우는 이제 괜찮아요. 이만 퇴근해요. 내가 바래다주면 돼.”

16548715917582.jpg“아닙니다. 대표님 나오시면 인사드리고 가겠습니다.”

아람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잡고 있던 손잡이를 당겨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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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정원에서 시우와 나란히 서 있던 비서의 모습이 생생하게 겹쳐왔다. 마치 둘이 손을 잡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남자였기에 덜컥 초조함이 밀려왔다. 비서가 잡은 것이 옷자락이고, 시우가 비서의 손을 뿌리쳤을 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어 저절로 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그 후에 듣게 된 짜증 나는 이야기. 비서가 시우의 집에 갔다는 사실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16548715946935.jpg“이름이 뭐예요?”

16548715917582.jpg“이도아 입니다.”

16548715946935.jpg“이 비서님. 시우가 다음에도 힘들어하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줘요. 시우를 잘 아는 건 나니깐. 우린 안 지 10년도 넘은 사이거든.”

16548715917582.jpg“네. 알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드러운 듯 날이 서 있는 태도를 보이는 아람이었지만, 그 행동이 도아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다. 그저 대표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입장이 부러울 뿐. 그때, 닫혀 있던 문이 다시 한번 열리며 시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평소의 모습이었다. 도아는 제가 아는 시우의 모습을 확인하자 괜스레 마음이 울컥했다. 나른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16548715917587.jpg“안 갔어?”

왜 자신을 보내지 못해 안달들인지. 아람의 말에는 아무렇지 않던 마음이 또 일렁였다.

16548715917582.jpg“네. 얼굴 뵙고 가려고 기다렸습니다. 천 회장님 비서실과 통화한 내용은 메일로 보내놓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괜찮아지신 것 같으니 가보겠습니다.”

도아가 가방을 들며 나름 도도하게 말했다.

16548715917587.jpg“보고는 차에서 직접 해.”

목을 곧게 세운 비서를 비스듬히 바라보던 시우가 눈을 내렸다 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16548715946935.jpg“무슨 소리야? 무슨 일을 또 하려고?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차에서는 그냥 쉬어!”

도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아람이 먼저 큰 소리로 시우를 말렸다.

16548715917587.jpg“괜찮아. 운동하는 사람 갑자기 오게 한 것도 미안한데.”

그러고는 정말 미안한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무심한 태도로 도아와 아람 사이를 지나쳤다. 이슬 빗방울, 실바람 소리처럼 조용한 걸음걸이였다.

16548715946935.jpg“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지 마음대로.”

불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는 선명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람은 짜증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우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 역시 르베이호텔 비서실과의 통화내용을 보고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두 입술을 꾹 다문 채 운전에만 집중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자리 잡은 도시의 야경이 숙연하게 반짝거렸다.

16548715917582.jpg“대표님. 현관까지 모셔다드려도 될까요? 걱정돼서요.”

주차장에 도착한 도아가 처음으로 물은 내용이었다. 핏기 가신 서늘한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염려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전한 걱정이었는데, 잠잠하던 시우의 얼굴이 삐딱하게 어그러졌다.

16548715917587.jpg“안 돼.”

단호한 한마디에 도아는 한숨을 숨기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16548715917582.jpg“네. 그럼, 주차하고 퇴근해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시우가 단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에서 내렸다. 대표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비서 역시, 주차를 마치고 1층으로 올라왔다. 신경 쓸 것 없다. 내가 여기서 더 걱정하는 건 선을 넘는 일이다. 도아는 자꾸만 다른 길로 새려는 생각을 되돌리려 부단히 애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자신이 느끼는 걱정과 찝찝함은 일반적인 것은 아닌 듯했다. 택시를 타기 위해 무겁게 또각이던 걸음은 조금씩 느려지더니 이내 멈추고 말았다. 구두 바로 앞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이 빠졌던, 수로처럼 길게 흐르는 바로 그 분수대. 바닥조명이 올려보낸 빛이 수면 위에서 반딧불처럼 앙증맞게 반짝였다. 나풀거리며 떨어진 어린 나뭇잎이 퐁, 가장자리에 잔잔한 번짐을 만들었다.

16548715917582.jpg“여기서 빠졌었는데.”

여름 바람을 타고 온 물 냄새와 풀 향기가 물큰하게 풍겼다.

16548715917582.jpg“그래도, 그때 옷이랑 욕실도 빌려줬는데.”

입술을 오므렸다 잘근 깨물며 보드라운 이마를 짚었다. 물빛이 그대로 담긴 눈동자가 촉촉했다.

16548715917582.jpg“오늘 걱정하지 말라고도 해줬는데.”

16548715917587.jpg‘걱정 마.’

정신없던 자신을 진정시켜주던 구원 같은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싫어할 땐 싫어하더라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이런 마음은 지극히 정상이야. 바위처럼 묵직하게 멈춰 있던 두 다리는 도아의 결론과 함께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시우는 가죽 소파에서 단정하지 못한 자세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루가 고단하고 또 고단했다. 딩동.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사람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누군가 잘못 누른 것으로 생각했다. 이곳에 와야 할 사람도, 올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한 번 더 들렸을 때,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오늘 종일 쫑알쫑알거리던, 비서. 예상은 빛나가지 않았다. 네모난 화면 안에 보이는 도아의 모습이 예쁘고 낯설었다. 겨우 못 오게 했더니. 왜 또. 잠잠하던 목울대에 핏줄이 솟았다. 쉽게 목소리를 내보내지 못하던 시우는 삐딱하게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잡으며 대답했다.

16548715917587.jpg“왜 왔어?”

렌즈에 불이라도 붙일 기세의 눈빛이던 도아는 시우의 음성에 움찔하는가 싶더니 멋쩍게 웃었다.

16548715917582.jpg“죽 사 왔습니다. 혼자 계시면 저녁도 못 드실 것 같아서요. 저번에 봤을 때 집에서 요리해 드시는 것 같지도 않았고.”

16548715917587.jpg“…….”

16548715917582.jpg“대표님, 저……. 불편하시면 문 앞에 두고 가겠습니다.”

도아가 까만 카메라를 향해 죽이 담긴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인터폰에서 들리는 적당한 기계음이 침묵의 시간을 더 불편하게 했다.

16548715917582.jpg“어, 음. 꼭 챙겨 드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괜히 왔나 싶었다. 도아는 짧은 인사를 끝내고 쇼핑백을 복도에 조심스럽게 내려두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마른 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그렇게, 흐트러진 마음과도 같은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몸을 돌렸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크고 단단한 손이 가느다란 손목을 서슴없이, 그러나 부드럽게 낚아챘다. 갑자기 느껴진 따뜻한 감촉에 놀란 도아가 고개를 틀었다. 열린 틈 사이로, 평소와 다름없는 익숙한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16548715917582.jpg“대표님?”

잡았던 손을 가볍게 풀어준 시우는 한동안 말없이 비서를 바라보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16548715917587.jpg“들어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느끼지 못했던 시우의 향이 작은 틈새로 풍겨왔다. 다소 친절하게 느껴지는 권유에, 도아의 맥박은 조용히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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