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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이상해 (23/85)

제23화. 이상해2022.01.17.

16548716099776.jpg“앉아.”

시우가 사선으로 고갯짓을 하며 부드럽게 명령했다. 얼떨결에 의자에 앉게 된 도아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 엉거주춤 손을 뻗어보려다 이내 포기했다.

16548716099781.jpg“아. 저는 그냥 챙겨만 드리고 가려고 했는데요.”

16548716099776.jpg“알아. 얻어먹고 갈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겠지.”

16548716099781.jpg“그럼 도와드리겠습니다.”

16548716099776.jpg“됐어. 그냥 있어.”

시우는 달그락거리며 도기 그릇에 죽과 반찬을 담았다. 도아는 민망함에 쉬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거짓말하는 어린아이처럼 눈치를 보았다. 정결하게 담긴 따뜻한 전복죽이 시우와 첫 식사를 떠올리게 했다.

16548716099781.jpg“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16548716099776.jpg“난 담기만 한 거야.”

16548716099781.jpg“네. 압니다. 그래도 잘 먹겠습니다.”

친절한 그의 태도가 그저 기분에 따른 변덕일 것을 알기에 도아는 짧게 웃었다. 은색 수저가 그릇에 닿는 소리가 기분 좋게 퍼졌다. 도아는 이따금 고개를 들어 시우를 마주했다. 반듯한 모습이 큰 나무처럼 단단하고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온 바람이 그의 옷 끝자락, 살결을 스치고 자신의 얼굴에 도착해 이곳저곳을 간지럽혔다.

16548716099776.jpg“물어보고 싶은 게 많겠지만,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뿐이니 신경 쓸 거 없어.”

식사를 마친 시우가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비서의 시선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16548716099781.jpg“네.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병원은 예약해 두겠습니다.”

16548716099776.jpg“고집은. 그럴 필요 없어. 아, 아까 온리 견과 사장 만났어.”

16548716099781.jpg“어……. 음. 물어보셨어요?”

16548716099776.jpg“공급처가 변경돼서 첨가물이 바뀐 게 맞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알았냐고 신기해하던걸.”

16548716099781.jpg“그죠?! 제 말이 맞죠?”

비서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답하고는, 익숙하게 대표의 빈 물잔을 채웠다.

16548716099781.jpg“디자이너님은 괜찮으시겠죠?”

16548716099776.jpg“의식도 돌아왔고, 일단 나온 검사 결과는 정상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며칠 입원해야지.”

16548716099781.jpg“네. 정말 다행입니다. 설득까지 잘 되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연락처를 교환했으니 허락하시면 제가 다시 한번 설득해 보겠습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자신이 맞게 된 업무였다. 도아는 실패로 끝난 것이 못내 아쉬워 한 번 더 기회를 달라 부탁했다.

16548716099776.jpg“조금 더 기다려 보도록 해. 아까, 디자이너랑 이야기 나눴을 때 무슨 사진 보여줬어?”

하지만 시우는 그 열정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듯했다.

16548716099781.jpg“사진이요? 아! 부모님 가게 사진 보여드렸어요. 세월의 흔적이나 사람 냄새 나는 작업을 구상 중이라고 하셨는데, 딱 저희 가게가 떠오르더라고요. 촌스럽지만 정감 가는 느낌이거든요. 영감받았다고 말한 장소가 런던 골목의 엔틱 가게, 리스본 거리의 서점 같은 작은 상점인 점도 한몫했고요.”

16548716099776.jpg“부모님 가게?”

16548716099781.jpg“네. 치킨 좋아하세요? 저희 집 치킨집 하는데.”

16548716099776.jpg“글쎄. 즐겨 먹지는 않아서.”

치킨집 딸임을 밝혔을 때 돌아왔던 대답 중 제일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그 말에 괜한 오기가 발동한 도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더 늘어놓기 시작했다.

16548716099781.jpg“저희 가게 치킨 정말 맛있어요. 추억의 맛이랄까. 어릴 때는 장사가 잘됐어요. 부모님이 곧 빚도 갚고 큰집으로 이사도 갈 수 있을 거라고 늘 이야기했었어요.”

16548716099776.jpg“내용에서 아쉬움이 남는데?”

시우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는 없었지만 듣기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16548716099781.jpg“네. 이사를 못 하였습니다. 장사가 잘되니 욕심이 나셨는지 아버지가 다른 가게를 오픈하셨어요. 꽤 크게 시작하셨는데 결국 그게 부모님의 발목을 잡았죠. 뭐.”

도아는 그 당시 집안 분위기가 떠올라 한숨을 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16548716099781.jpg“결국 정리하고, 치킨 가게에 다시 집중하셨는데 그쯤 치킨 브랜드들이 주변에 들어오면서 매출이 많이 줄었어요. 지금은 그냥 겨우겨우 운영되는 정도? 그래도 단골도 있고, 평점도 좋아요.”

16548716099776.jpg“궁금하긴 하네.”

16548716099781.jpg“하하. 나중에 기회 되면 포장해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가게는 지방에 있었다. 어차피 자주 가지도 않는 본가였기에 ‘나중에’라는 말을 전제로 무의미한 약속을 잡았다. 시우의 입매가 서서히 올라갔다.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표정.

16548716099776.jpg“그래. 언제 가져올지 궁금하네.”

이어서 나온 내용이 비서의 평화롭던 어깨를 바짝 긴장시켰다. 움찔하며 상체를 반듯하게 세웠다. 자신이 빈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골탕 먹이려는 그의 속셈이 뻔히 느껴졌다. 하지만 새까만 색을 띠고 있는 그의 대답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정말로 맛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며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비는 주말이 언제 있는지 생각하고, 버스로 갈지 기차로 갈지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자신이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16548716099781.jpg“유리라 디자이너님이 대표님께서 저를 다정하게 대한다고 이야기하셨어요.”

침착하게 마음을 고른 도아의 태도는 평소처럼 적당히 친절하고 조심스러웠다.

16548716099776.jpg“전혀 공감 못 하겠다는 얼굴인데.”

16548716099781.jpg“저 지금 웃고 있는데 어떻게 아세요?”

갈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16548716099776.jpg“마음에도 없는 웃음 지을 때 눈썹을 가볍게 찡그려. 목소리도 미세하게 올라가고.”

시우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눈썹과 목에 가져다 대며 친절히도 설명해 주었다.

16548716099781.jpg“저희 부모님도 제 표정을 대표님만큼 관심 있게 보진 않으실 거예요.”

대답을 들은 도아는 경계심이 풀린 얼굴로 활짝 웃었다. 마주한 남자는 그저 선선한 바람을 따라 시선을 보내며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조목조목 바라볼 뿐이었다.

16548716099776.jpg“맞아. 표정이 문제인 거 같아.”

16548716099781.jpg“네? 제 표정이 왜요?”

16548716099776.jpg“아니, 그냥 도아 씨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고.”

어휴, 저 주둥아리. 오늘은 어째 친절하다 싶었다. 도아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유리컵을 집어 들었다.

16548716099781.jpg“네에. 죄송합니다.”

시우는 물을 홀짝 마시는 상대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유리잔에 닿은 말캉한 붉은 입술이 옴짝거렸다.

16548716099776.jpg“……내가 문제일 수도 있고.”

16548716099781.jpg“네? 대표님이 왜요?”

16548716099776.jpg“아냐.”

되묻는 순수한 질문에 옅게 대답했다. 몸이 지치고, 느른한 하루였다. 오늘처럼 발작이 찾아오는 날이면,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 공허함은 다시금 커졌다. 아마 그래서 들어오라고 했겠지. 머리를 찌르는 고통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오늘 비서가 입은 밝은색 슈트는 맞춘 듯 잘 어울렸다. 처음 참석하는 외부모임임에도 준비를 꼼꼼하게 했는지 잔 실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맙다, 잘한다, 예쁘다. 그 말을 듣고 눈을 반짝일 비서를 생각하니, 피하는 게 좋을 듯했다. 거슬리는 것이 없게 일을 잘하는 건지. 자신이 단점 정도는 눈감아 버릴 정도로 마음이 잡아먹힌 건지.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잘 다잡아야 했다. 시우는 비서의 뒤로 보이는 유리창으로 이만 시선을 옮겼다.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이 잔잔하게 시야를 채웠다. 차가운 건물에 따뜻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16548716099781.jpg“대표님, 다 드셨으면 치우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어렵게 옮긴 이목은 비서의 말 한마디에 속절없이 끌어당겨 졌다. 다시 그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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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우에게 자신이 뒷정리를 하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한 도아는 물을 틀고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뽀득거리는 소리에 집중한 와중에도 선명하고, 우아한 시우의 행동이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자신과는 엮일 리 없는 존재라고 확신했다. 하나로 보이는 바닷속에도 해류가 존재한다. 그와 자신이 타고 있는 해류는 다르다고 믿었다. 그래서 회사 사람들이 젊은 대표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떠밀려 비서가 되었고, 처음 그와 인사를 하는 순간 그 무관심했던 행동들이 무의미할 만큼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치솟았다. 어릴 적부터 늘 자신을 휘감았던 칭찬에 대한 갈망일까. 시우와 얽히며 느끼는 분노와 수치심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특히 초반에는 실수할 때마다 자신답지 않게 위축되었는데, 왜 시우 앞에서만 이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은……. 그가 마냥 편한 것도 아니지만,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다. 대표는 비서를 무시했고, 비서 또한 그에게 인격체로서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고 업무적으로만 대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툭툭 내뱉는 심술궂은 말대답에도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대꾸해 주었다. 친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그럼 나는 이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은 걸까? 설마……. 아냐. 쌓여가는 갈등에 속이 끓어 그를 싫어하겠다 다짐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 여전히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며 일하는 남자였다. 가끔 보이는 부드러운 미소와 말투에 마음이 풀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 상처받았던 순간들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속으로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나는 저 사람을 싫어한다. 비서로서 업무에 집중할 뿐이다. 변덕일 뿐인 다정한 태도에 휘둘릴 필요 없다. 정말로? 비서로서? 점점 샛길로 빠져버린 생각은 길을 잘못 들어도 단단히 잘못 든 듯했다. 또다시 마음이 복잡해진 도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돌렸다. 세차게 들리던 물소리가 사라졌다. 비서는 그제서야 거실이 지나치게 고요하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16548716099781.jpg“대표님?”

거실로 나왔을 때, 도아가 마주한 것은 잠이 든 시우였다. 매끄러운 턱선과 조각 같은 얼굴 안에 속눈썹, 코, 입술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금 고돼 보였다. 한시우는 뭐가 그렇게 항상 날카롭고, 차가우며, 빈틈이 없을까. 담요라고 덮어주고 싶은 마음에 주변을 살폈지만, 무엇하나 쓸모 있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어 소파에 기대 있는 시우의 몸 위에 살포시 덮어주고는, 한쪽 귀퉁이에 가볍게 걸터앉아 주변을 살폈다. 집무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간이었다. 처음에 들어오면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에 감탄이 나오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쩐지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도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시우의 얼음 같은 뺨을 바라보았다. 콩콩콩. 심장이 새가 지저귀듯 귀엽게 뛰었다. 이어서 무릎 위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치우기 위해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간 도아는 포근한 숨소리에 손끝을 머무적거렸다. 옆에 앉으니 여름날 나무 그늘에 자리 잡은 듯 기분이 좋았다.

16548716099781.jpg“잠든 모습도 예쁘고.”

무감하게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볼 때처럼 설렜다.

16548716099781.jpg“눈을 감아도 잘생겼네.”

외모에 완패한 도아는 그 사실을 쉽게 인정하며, 노트북을 빼 오는 것에 집중했다. 키보드에 자리 잡은 시우의 손을 살포시 그러쥐었다. 자신의 손가락에 잡혀 있는 단단한 그의 손이 낯설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손끝에서 온몸으로 매섭게 퍼져나갔다. 놀란 도아는, 단정하게 내려앉았던 눈꺼풀을 번뜩 올려 시우의 얼굴을 살폈다. 꼭 물에 빠진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무겁고 둔해졌다. 그러나 손끝만은 요란스럽게 떨렸다. 도리도리 고개를 휘저은 도아가 원래 목적이었던 노트북을 무사히 빼서 품에 안았다. 어느새 새빨개진 얼굴로 진정되지 않는 몸뚱이를 등받이에 툭 기대었다. 시우의 포근한 숨소리가 도아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복도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현관 앞쪽에 걸려 있는 소용돌이치는 푸른 물결 그림의 일부분이 보였다. 가려진 나머지 부분을 상상하며, 긴 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다. 좀 가라앉는가 싶던 마음은 스르르 어깨에 무언가 내려앉으며 다시 붕, 회오리바람을 탔다. 익숙한 시우의 향기가 자신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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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해. 이게 뭐야. 이상해.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시우를 깨우지도, 그렇다고 능숙하게 쿠션을 받쳐주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비서는 새빨개진 얼굴을 감싸 쥐고는 눈을 조용히 감았다. 요가 수업에서 배웠던 호흡법, 인터넷에서 보았던 직장에서 화가 날 때 해보는 명상법. 심신의 안정을 위해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던 모든 민간요법을 동원했다. 거스러미 같은 불온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진정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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