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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여기가 어디야 (24/85)

제24화. 여기가 어디야2022.01.21.

서걱거리는 시트 소리가 쾌적했다. 아침 햇살이 연하게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포근하고, 달큰했다. 찝찝한 것은 오로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16548716293835.jpg“아. 어제 샤워 안 하고 잤구나.”

게으른 어제의 나를 원망하며 푹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람이 아직 안 올렸으니 조금 더 자도 될 것 같았다. 가슴팍에 있는 부드러운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리던 비서는 갑자기 찾아온 싸늘한 기분에, 행동을 가만 멈추었다. 이어서 번개라도 맞은 듯,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상체도 벌떡 일으켰다.

16548716293835.jpg“뭐야? 여기가 어디야?”

확장된 갈색 눈동자가 요동치며 주변을 탐색했다. 낯선 풍경에 소스라친 도아는 엄청난 속도로 침대에서 빠져나와 상황을 정리했다.

16548716293835.jpg“내가 어제……. 출근했고, 파티에 참석하고, 대표님 집에 죽을 사 들고 왔고, 이야기를 했고, 뒷정리하고, 대표님 얼굴을 구경했고, 구경했고, 구경…… 했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과거를 되짚던 비서는 기억이 막히자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시우에게 옷을 덮어준 후 집에 가야 했는데 퇴근하는 장면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옷도 어제 입었던 그대로였다. 그러면 여기는 아직 시우의 집일 가능성이 높았다. 울고 싶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16548716293835.jpg“나 진짜 미쳤나 봐.”

찡그린 미간에 짜증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한숨을 길게 늘어뜨린 도아는 옷과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감촉이 비서로 처음 근무했던 날을 떠올리게 했다. 집무실 문을 여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자신의 모습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16548716293835.jpg“괜찮아.”

호흡을 진정시키며, 달칵 문을 열었다. 방안을 빠져나온 도아는 조용하고 음침하게 걸었다. 어차피 들키겠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 수치사 당할 것만 같았다.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이 달갑지 않았다. 방과 이어진 복도 끝에 다다르자 어제 자신이 잠들었던 정갈한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대표가 때마침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었다. 순간, 시우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등줄기를 타고 간질거림이 번졌다. 새하얀 얼굴에 다시 새초롬 붉은빛이 스며들었다.

16548716293863.jpg“일어나셨습니까?”

멀뚱히 서 있는 도아를 보고, 시우가 능청스럽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16548716293835.jpg“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얌체처럼 제 혼자만 깔끔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괘씸했지만, 비서는 언제나 그렇듯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16548716293835.jpg“대표님. 제가 왜 대표님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을까요…….”

16548716293863.jpg“그건 나한테 물으면 쓰나. 잠결에 찾아갔나 보지.”

16548716293835.jpg“……죄송합니다.”

16548716293863.jpg“어서 출근 준비해. 이제 욕실은 어딘지 잘 알지? 아침은?”

16548716293835.jpg“아뇨! 아침은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빨리 준비하고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16548716293863.jpg“이제 곧 9시야.”

16548716293835.jpg“9시요?”

어리둥절해진 도아가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정확히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6548716293863.jpg“같이 출근해.”

단정하게 할 말을 마친 시우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기품 있게 내려놓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시계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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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8716293835.jpg“네. 비서실입니다.”

16548716323662.jpg-안녕하세요. 이 비서님. 김우진입니다. 아직 신문을 안 찾아가셔서 전화드렸어요.

16548716293835.jpg“아. 우진 씨. 제가 오늘 일이 있어서 평소보다 늦게 출근해요. 이따가 가지러 내려가겠습니다.

16548716323662.jpg-제가 9시에 가져다드릴까요? 안 계시면 15층 로비에다가 두고 갈게요.

곧 근무 포지션이 바뀌기 때문에 도아가 가지러 내려왔을 때 자신이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진은 어떻게든 만나고 싶은 마음에 적극적으로 방법을 제안했다.

16548716293835.jpg“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친절하게 건너온 답변은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고 조금 더 욕심을 내 약간의 사담을 건넸다.

16548716323662.jpg-비서님. 저번 주에 잘 들어가셨어요?

16548716293835.jpg“네, 그럼요. 주혜랑 식사는 잘하셨나요?”

16548716323662.jpg-정말 대표님 등장 타이밍도 참 눈치 없었죠. 안 그래요?

16548716293835.jpg“하하.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16548716293863.jpg“거의 다 왔어.”

대화를 이어가는 도중 시우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보고 있던 도아가 황급히 운전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품위있는 모습으로 주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16548716323662.jpg“어서 날짜 잡아야죠. 주혜 씨랑 저는 다음 주 금요일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 나눴는데. 이 비서님은 어떠세요?”

16548716293835.jpg“아 다음 주 금요일이요? 네, 저도 좋아요. 그날 봬요.”

운전하는 도중 전화를 받는 것은 서로에게 흔한 일이었다. 외출하거나 퇴근할 경우, 내선을 착신전환해 놓았기 때문에 비서실 핸드폰은 수시로 울렸다. 시우 역시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 내용에 그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작은 용건을 말하는 그 작은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느껴져 도아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서울에 있는 고층 건물들 사이에서 유난히 시선을 끄는 빌딩. 어느새 에이치 코리아의 건물이 보였다. 검은색 차량이 주차장 입구로 부드럽게 방향을 틀었다. 보닛에 떨어지던 햇빛이 사라지자 열려 있던 차창은 매끄럽게 올라갔다. 두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도아는 슬쩍 시우를 곁눈질했다. 같이 출근하는 지금 순간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 천 회장의 파티는 큰 사건이었지만, 그때의 일만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시우가 처리해야 할 일들은 많았고, 그것을 돕는 도아 역시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손님이 또다시 방문했다. 그녀를 응접실에 안내한 도아는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16548716293835.jpg“대표님. 권아람 님 응접실에 도착했습니다.”

시우는 바르게 서 있는 도아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빠르게 훑었다. 집무실에는 신제품 샘플이 한가득 쌓여 있어 손님을 맞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16548716293863.jpg“그래.”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타이를 고쳐 맸다. 큰 보폭으로 도아를 지나며 말했다.

16548716293863.jpg“늦어도 30분이면 끝날 거야. 4호점 관련된 전화는 도중에라도 들어와서 보고하도록 해.”

16548716293835.jpg“네,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도아는 시계를 확인하고 하던 일을 이어서 하기 시작했다. 30분 정도이니 그사이에 일 하나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가 여행 기념품으로 준 젤리를 하나씩 입에 넣으며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렸다. 그러나 집중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표가 말했던 것과는 다르게 10분도 안 돼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16548716293835.jpg“벌써?”

도아가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 복도를 확인했다.

16548716293863.jpg“여기까지 왔는데, 오래 못 봐서 아쉽네.”

16548716378452.jpg“괜찮아. 내가 갑자기 말하고 온 건데. 약 늘리는 거 생각해 봐.”

16548716293863.jpg“알겠어. 어서 가봐.”

아람의 얼굴에 걱정과 근심이 한가득이었다. 십년지기 우정 시우가 걱정돼 이렇게 만나면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온 모양이었다.

16548716293835.jpg“대표님, 죄송합니다. 시간 맞춰서 복도에서 대기하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빨리 끝나버린 일정에 놀란 비서는 재빠르게 걸어오며 사정을 설명했다. 불행히도, 입안에서 달짝지근한 젤리가 오물오물 씹히고 있었다. 시우가 까만 눈동자를 내려 작게 움직이는 뺨을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을 알아챈 도아는 질겅거리던 행동을 멈추고 혀 안쪽에 있는 젤리를 사탕을 빨듯 녹이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16548716293863.jpg“알겠어. 손님 안내해 드려.”

그가 눈길을 거두며 선선하게 명령했다.

16548716293835.jpg“네.”

빠르게 대답을 마친 도아는 아람을 배웅했다. 며칠 전 비서를 극도로 경계하던 태도는 다소 누그러진 듯했다.

16548716378452.jpg“이도아 씨.”

16548716293835.jpg“네.”

16548716378452.jpg“시우가 본인이 이야기한 적 있어요? 과거나 어린 시절 같은.”

16548716293835.jpg“아뇨. 대표님은 본인 이야기는 잘 안 하십니다.”

16548716378452.jpg“하긴. 비서한테 그런 이야기 할 정도로 마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죠. 그럼 수고해요.”

아람은 또다시 가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비서의 인사는 무시한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16548716293835.jpg“기분 나빠. 친구면 얼마나 친한 친구라고……. 내가 본인 비선 줄 아나.”

엘리베이터를 흘겨본 도아는 몸을 돌려 그림 같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푸른 잎들을 보면 기분이 좀 풀리곤 했는데 오늘은 영 효과가 없었다. 그렇게 비서는 불쾌한 기분을 희석시키지 못한 채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도 없을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프런트 데스크에는 단정하게 서서 비서를 기다리는 대표가 있었다.

16548716293835.jpg“어?”

그가 도아의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며 느릿하게 표정을 풀었다.

16548716293863.jpg“뭘 그렇게 씹고 있어.”

16548716293835.jpg“이야기 나누실 때 잠 깰 겸 먹으려고 한 건데.”

이미 젤리는 다 녹았지만, 달큼한 입속을 한 번 더 확인했다.

16548716293863.jpg“보통 커피 마시지 않았어?”

시우의 손에 결재 파일이 들려 있었다. 아마 기다린 용건은 저것 때문인 듯했다. 그가 도아에게 파일을 건네주기 위해 손을 뻗으며 물었다.

16548716293835.jpg“아, 친구가 여행 기념으로 사다 줬습니다. 대표님은 젤리 같은 거 안 드시죠?”

서둘러 서류를 받아든 도아가 자신의 의자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책상 위, 넓게 만든 봉지 위에 가득 펼쳐져 있는 젤리에서 단내가 풍겨왔다.

16548716293863.jpg“아냐, 먹어. 나도 줘봐. 빨간색 맛있어 보이네.”

예상치 못했던 긍정적인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비서는 잠시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16548716293835.jpg“네. 노란색은 제가 좋아하는 맛이라 그거 달라고 하실까 봐 걱정이었는데, 다행입니다.”

16548716293863.jpg“그럼 나도 노란색으로 줘.”

도아가 발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시우는 선생님의 설득에 넘어간 아이처럼 너무나 쉽게 대답을 바꾸었다.

16548716293835.jpg“그냥은 어렵고요. 취소한 검진 일정 다시 잡아도 된다고 허락하시면 특별히 드리겠습니다.”

대단한 선물이라도 주는 양 흥정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파티 이후로, 대화 중 작은 틈이 보이면 비서는 이런 식으로 매번 병원에 가자 부탁했다.

16548716293863.jpg“봐서.”

못마땅한 대답이었지만, 결국 노란 콩 같은 것은 시우에게로 넘어왔다. 젤리가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도아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끌어내렸다. 큼큼,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사이 예상했던 대로 시우의 표정이 서서히 구겨졌다.

16548716293863.jpg“맛이 왜 이래.”

16548716293835.jpg“제가 좋아하는 거 뺏어 드실 거 같아서 일부러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노란색 엄청 이상하죠? 토 맛 젤리예요.”

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겨우 대답했다. 친구가 자신을 불쾌하게 했으니, 시우가 대신 벌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길래 왜 그런 친구를 사귀셨어요.

16548716293863.jpg“감봉 당하고 싶어?”

시우가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협박을 전하며 나긋하게 인상을 썼다. 요즘 들어 비서는 혼나도 전혀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16548716293835.jpg“아뇨. 그건 싫습니다. 그럼 저도 공평하게 하나 먹을게요.”

아량을 베푼다는 듯, 도아가 널브러져 있던 노란색 젤리를 집어 들며 바로 반성의 입장을 밝혔다.

16548716293863.jpg“됐어. 입맛 버려. 먹지 마.”

구린내를 풍기는 토 맛 젤리가 상큼한 과일 같은 저 입술에 닿게 할 수 없었다. 시우가 놀고 있던 손을 급히 들어 올려 가까스로 젤리를 빼내었다.

16548716293835.jpg“괜찮아요. 아까도 모르고 먹었어요.”

도아는 시우의 손에서 다시 젤리를 쏙 빼 왔다. 젤리에서 풍겨오는 찐득하고 달콤한 향 덕분인지 분위기가 뭉글뭉글해지는 기분이 들 때쯤, 툭 하며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그 시간을 쩍 갈랐다. 급하게 고개를 돌린 곳에 아까 내려갔던 권아람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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