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그날2022.01.24.
“아. 그, 허브차를 주려던 걸 깜빡해서! 1층 직원한테 부탁해서 다시 올라왔어.”
아람이 떨어진 상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시우를 응시하는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한테 주시면 됩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도아는 괜히 당황해 평소보다 더 깍듯하게 아람을 맞이했다. 정적 속에서 시우가 눈빛을 삐딱하게 내리며 추궁했다.
“도아 씨. 로비 쪽 문이 왜 열려 있지?”
“죄송합니다. 잠시 후에 회의라서 환기도 시킬 겸 미리 열어두었습니다.”
“주의해. 함부로 열어두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차분한 대화 속에 조금 전 솜사탕 같던 분위기는 흔적조차 없었다. 비서의 대답을 들은 대표는 이만 고개를 들어 자신의 친구를 보았다.
“차 잘 마실게. 조심해서 들어가.”
적당히 친절하게 대답한 시우는 집무실 손잡이를 잡았다. 그가 등을 돌리자 아람은 시선의 목적지를 도아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젤리로 바꾸었다. 눈동자가 조금 전보다 더 불안하게 요동쳤다.
“나오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갈게요.”
들고 있는 핸드백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넘겨잡으며, 아람이 차갑게 거절했다. 그녀는 오른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된다는 비서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프런트 데스크를 떠났다.
** 사람과 차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길가. 화려한 간판으로 시선을 끄는 가게 안에 도아와 우진, 주혜가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각자의 접시 앞에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튀김류 안주를 조금씩 덜어놓고 저마다 불만을 토로했다. 가장 울상인 것은 주혜였다. 홍보팀의 일이 많다며 빽빽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남은 둘은 달래주기 바빴다. 도아는 시우의 이야기는 철저히 배제한 채 출퇴근 시간이나 매끄럽지 못한 업무에 대한 고충을 이야기했다.
“언니 여기 맥주 진짜 맛있다. 안 마실 거예요?”
“안 돼 안 돼. 나 저번에 소주 반병 조금 넘게 마시고 어떻게 집에 갔는지도 기억도 않나.”
곤란한 듯 눈썹을 내리며 거절을 하곤 슬며시 비서실 핸드폰을 확인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도아는 시우보다 먼저 회사를 나왔다. 그는 자신도 어차피 곧 나갈 것이니 먼저 퇴근하라는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었다. 회사를 나온 지 3시간이나 지났다. 사실, 맥주 한 캔 정도는 즐겨 마셨다. 고단한 하루였는데, 어떻게 맥주 한 잔 마시고 싶지 않겠냐마는 그래도 혹시 자신을 찾는 전화가 올까 탄산음료로 입안을 채웠다.
“이 비서님은 남자친구는 없어요?”
우진이 시선을 밖으로 빼며 물었다.
“네. 없어요. 별로 생각도 없고.”
“흠……. 정말요? 대표님 같은 사람이 만나자고 해도요?”
갑작스런 질문에 도아가 마시던 음료를 캑캑거리며 겨우 삼켰다.
“네? 대표님이 왜 저한테 만나자고 해요? 그런 이야기 하지도 마세요.”
도아가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쓰자 우진이 큰소리로 키들거렸다.
“맞아요. 대표님처럼 차가운 사람 만나지 말아요. 다정한 사람 만나요.”
그러고는 상체를 숙이며, 평소보다 더 밝게 미소지었다.
“맞아! 언니! 소개팅도 좀 하고 그래요. 우리 도아 언니 인기도 많아! 딱 봐도 미인이잖아요?”
도아를 향하는 시선 안에 주혜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미인은. 그냥 눈코입 달린 거지. 주혜 네가 인기가 많지.”
“그럼 그냥 둘 다 예쁜 거로 해요! 그러고 보니 저 이 비서님 번호도 몰라요. 알려주실래요?”
“내가 메시지로 보내줄게!”
주혜가 도아를 대신해 연락처를 보내는 사이 우진의 머릿속에는 벌써 수많은 계획이 지나갔다. 내일부터 우진의 연락이 꼬박꼬박 올 것을 짐작도 못 하고 있는 번호의 주인은 감자튀김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어머? 이게 무슨 조합이야?”
짧은 정적이 흐르고 있는 세 명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대리님들!! 여기서 뵈니 더 반가워요.”
놀란 주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전에 회식 자리를 함께했던 사내문화팀 직원들이었다.
“주혜 씨는 아까도 봐놓고, 참. 우진 씨 언제 이렇게 친분을 쌓았어?”
“하하. 오며 가며 친해졌어요.”
우진이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를 멋쩍게 긁으며 웃었다.
“도아 씨. 비서 일도 아주 잘한다며?”
“안녕하세요. 그냥 시키는 일만 겨우겨우 하고 있어요.”
“아니야. 도아 씨 오고 대표님이랑 일정 잡는 것도 편해지고, 회의요약본도 깔끔하게 내려온다고 여기저기 칭찬이 자자해. 아, 저기 자리 났나 보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들.”
회사 선배는 달콤한 칭찬으로 도아의 마음에 솔솔 기분 좋은 바람을 집어넣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아이, 참! 내가 마지막에 딱 말해주려고 했는데!”
“뭐를?”
“언니 일 잘한다고 이야기 나오는 거요.”
“다음부터는 들리면 바로 말해줘. 혼자 일하니깐 잘하고 있는지 감이 안 와.”
“대표님이 칭찬 안 해요?”
무슨 대답을 할까 잠시 머리를 굴리던 도아는 온 직원이 아는 정도에서 대답하기로 했다.
“응. 그냥 업무 이야기만 하셔.”
“치. 너무하다! 우리 유능한 도아 언니를.”
“이제 적응돼서 괜찮아. 얼굴이 복지지, 뭐.”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조미료 치듯 농담 삼아 한마디 더 덧붙였다.
“맞아요. 그건 인정!”
우진의 눈빛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대화를 끊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그의 전화벨이 울렸다. 도아와 주혜는 나누던 이야기를 멈추고 자연스럽게 우진에게 집중했다.
“형? 근무 중 아니에요? 아, 그거 두 번째 서랍 열면 있어요. 좀 한가해요?
시우는 통화를 할 때도 단정한 자세였다. 그것이 익숙해져 버렸는지 후드티를 입고 허리 굽힌 자세로 편하게 통화하는 우진이 어색해 보였다.
“대표님이 아직 안 가셨다고? 아아. 고생해요!”
비서의 짧은 일탈은 여기까지인 듯했다. 시우가 아직 회사에 있단 소식을 듣자 도아의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 열 시가 넘은 시각. 로비는 고요했다. 반질거리는 대리석을 밟고 가는 도아의 걸음 소리가 빈 공간으로 뻗어 나갔다. 깔끔한 기계음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 왔음을 알렸다. 사원증을 가져다 대고 제일 위층 버튼을 누르는 것이 어느덧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결국 회사로 다시 와버렸구나. 시우가 아직 퇴근을 못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좀처럼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고, 고민하고 고민하다 결국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웅 거리는 승강기 소음 사이로 자신의 심장 소리가 쿵쿵 겹쳐 들렸다. 깊은 적막이 온 건물을 휘감고 있는 듯했다. 커피 2잔이 가지런히 담겨 있는 캐리어를 힘주어 잡았다. 은은한 간접 조명과 메인 조명이 15층 전체를 미술관처럼 차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역시나 시우는 집무실 밖으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듯했다. 도아는 그대로 커피를 들고 집무실로 향했다. 복도의 한쪽 면을 채우고 있는 긴 유리 벽에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어 비쳤다. 조금 전만 해도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에 서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이곳이다. 술 한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똑똑.
“네.”
새로운 환경을 탐색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도아 씨……?”
살짝 벌어진 틈 사이로 시우는 자신의 비서를 단숨에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다급한 순간이 와도 그는 절대로 놀라지 않고 여유로운 얼굴로 또박또박 내용을 전하는 사람이었는데, 분명 당황한 듯했다.
“대표님.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아직 계시다고 이야기를 들어서 커피 좀 사 왔습니다.”
왜 왔냐며 괜히 핀잔이나 안주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오히려 반기는 눈초리였다. 도아의 얼굴을 향했던 시선이 손에 붙들려 있는 커피잔에서 멈췄다.
“두 잔이나 마시라고?”
“아, 하나는 제겁니다. 저도 마시고 싶어서요.”
도아가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 시우는 입 끝을 길게 늘였다.
“정원에서 어때.”
들고 있던 종이 더미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가 물었다.
“네. 좋습니다.”
도아의 눈은 또렷하다 못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아마 본인도 자신이 어떤 눈빛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신경 긁는 한마디. 시우가 그녀의 기분 좋은 얼굴 망가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집무실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유리문을 밀은 후 가볍게 붙잡았다. 도아는 시우가 자신을 기다려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그에게로 다가갔다.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 무릎까지 오는 남색 셔츠 원피스. 그녀가 지나가자 알싸한 커피 향과 이른 봄날의 기억들이 함께 스쳤다. 시우는 정원 바닥이 메말라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 **
“중순에 잡힌 출장 건은 잘 진행하고 있어?”
“네. 예약과 렌트 다 맞췄습니다. 숙소는 르베이호텔에서 스위트룸으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감기에 걸렸던 날 혼자 앉아 있던 의자에 오늘은 시우와 나란히 자리했다. 분명 같은 의자인데 그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정원의 주인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시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과 같은 결핍은 없어 보이고, 권력에 익숙한. 좋게 말하면 완벽하고 나쁘게 말하면 오만한.
“각 부서에서 넘어온 자료들 정리해서 프린트물로 만들어 놓도록 해. 천 회장님은 인쇄물로 보는 것을 선호하니.”
“알겠습니다.”
그런 시우의 지시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긴장하며 집중했다.
“큰 틀만 이야기를 나누고 진행은 실무진들이 하게 될 거야. 내년 상반기쯤.”
제주도에 오픈하는 리조트형 호텔에 모든 가구가 에이치코리아의 제품으로 인테리어 되는 프로젝트였다. 한국 공장에서 최고급 라인으로 제품이 생산될 예정이고, 참여하게 된다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기회였다.
“참여하고 싶어?”
“아닙니다. 비서 일도 좋습니다.”
당연한 걸 묻는 상사에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 잎사귀 가득하던 시야에 불쑥 하얀 살결이 밀고 들어왔다.
“다 보인다니깐.”
곧은 마디를 가진 기다란 손가락이 도아의 미간을 정확히 가리켰다. 민망한 듯 깜빡이는 눈동자에 눈 맞춤을 하고는 커피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유리라 디자이너는 퇴원했다고 연락 왔어.”
“정말요? 잘됐습니다. 저번에 직접 전화도 주셨었어요. 고맙다고.”
도아의 얼굴에서 퍼져나온 미소가 여름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그 보글보글한 분위기에 날카롭고 뾰족하던 마음이 깎이는 기분이었다. 다정한 말은 마음을 키운다. 평소처럼 굳게 입을 다문 시우가 입안에서 혀끝을 굴렸다.
‘얼른 잘했다고 해!’
‘잘했다는 한마디 하는 게 뭐가 힘들어. 속 좁은 인간아. 어떻게 칭찬 한 번을 안 해?’
더이상 칭찬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비서였다. 아무런 기대감 없는 도아의 웃음 위로 투정 섞인 목소리가 귀를 콕콕 찔렀다. 난처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맑은 얼굴이 유난히 보고 싶었다. 참지 못할 정도로. 당황하고 화내는 얼굴이 아니라 기쁘게 웃어주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디자이너가 쓰러졌던 날 가장 먼저 달려갔지?”
자신과 다르게 생기 가득한 갈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아. 네. 제가 제일 먼저 발견해서요. 그렇게 됐습니다.”
짧게 숨을 들이마신 시우는 잠시 동안 침묵하다, 몸을 뒤로 기대며 다정하게 입매를 올렸다.
“그날.”
“잘했어.”
낮고 묵직한 소리가 풀잎 사이에서 부드럽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