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좋아한다2022.01.28.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차량 소리와 높은 곳을 휘젓고 다니는 바람이 거셌다. 처음 이곳에 나왔던 날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몸을 뜨겁게 데우는 여름날의 열기 정도.
“네. 그럼요. 잘했죠.”
도아는 얼음을 먹기 위해 커피 뚜껑을 열던 참이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단어가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뚜껑과 컵이 막 분리되었을 즘, 무언가 이상하단 것을 깨달았다. 잘했고말고. 잘했어. 잘했어? 평생을 모셔도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기에 바로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네?”
그것이 칭찬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 너무 놀란 나머지 바닥으로 얼음을 후두두 흘리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지는 작은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잘했다고. 한 번 더 말해줄까?”
정작 말을 꺼낸 사람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여유로웠다.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와 선명하게 비교되는 시선이었다. 취하지도 않았고, 피곤해서 정신이 몽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듣고 싶어 애타던 말이 이렇게 대화의 언저리에서 불쑥 튀어나올 줄 상상도 못 했기에 도아의 가슴이 여리고 빠르게 두근거렸다.
“아닙니다. 똑똑히, 들었습니다…….”
비서는 손에 들린 컵을 급하게 바로 들며 자세를 고쳤다.
“사실 그날 제가 한 것도 없는걸요. 응급처치를 마무리한 것도 대표님이고, 설득도 제대로 하지도 못했고.”
도아는 기념적인 칭찬에 상당히 겸손한 대답을 내놓았다. 얼핏 보면 그저 예의를 차린 답변 같았지만 비서는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올려 목덜미를 가볍게 눌렀다. 손가락에 얽혀 들은 머리카락이 간질거렸다. 그 모습을 내려보는 시우의 눈빛이 다감했다. 그토록 칭찬에 목말라 했으면서 정작 무엇을 잘했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저 웃음만 나왔다.
“에이치 그룹의 창업자가 누군지 알고 있어?”
“네. 그럼요. 헨리 마커 대표와 한지섭 대표. 이렇게 두 분이죠.”
“맞아. 그리고 한지섭은?”
“대표님의 아버님이죠.”
시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글로벌 퍼니싱 기업 에이치는 한국인 한지섭과 미국인 헨리 마커가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의자에서 시작한 가구회사는 깔끔하고 견고한 디자인으로 오프라인에서 인지도를 높이다 온라인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한지섭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이름은 성공한 기업인을 설명할 때 가끔 등장하는 정도로 사라져갔다. 그러다 5년 전, 에이치 코리아가 한국에 상륙했다. 그의 아들 한시우가 대표로 오게 되었을 때 우려와 시기 섞인 목소리가 주를 이뤘다. 에이치 코리아의 직원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도아 씨가 커스텀 디자인 서비스를 이야기했을 때, 괜찮다고 생각했어.”
“정말요?”
“에이치 코리아에 기본이 되는 디자인은 대부분 아버지가 추진한 것들이야. 헨리는 그 아이덴티티를 고수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독특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그런 변형을 주는 것에 거부감이 없지. 본사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거라 판단했어.”
“세상에.”
“그리고, 유 디자이너는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 이미 긍정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해. 그러니 실패했다고 속상해할 필요도 없어.”
아마,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자 이런 쓸데없는 설명까지 곁들이게 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친절한 설명에 보답이라도 해주듯 상대방의 얼굴에는 기쁨이 조금씩 번져나갔다. 다정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 그건 피해야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은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그래서 내 말은, 새로운 서비스를 제안한 것도, 디자이너를 설득한 것도, 사람을 살리려고 제일 먼저 달려간 것도 다 잘했다는 뜻이야.”
다정한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 시끄러운 소리가 멈추고 향긋한 풀향기만 아득하게 나풀거렸다. 비서는 헛것이라도 보고 있는 듯 대표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도아는 기쁨에 달아오르는 얼굴을 얼음이 얼마 남지 않은 컵을 가져다 대는 것으로 진정시켰다.
“네……. 감사합니다.”
봄부터 바라왔던 순간이었다. 한시우의 칭찬 따위는 필요 없다고 수백 번도 되뇌었지만, 막상 들으니 마음이 꽃봉오리마냥 부풀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디자이너님 응급처치는 대표님이 거의 다 하셨는걸요. 너무 전문적이어서 놀랐어요.”
“원래 의사가 되려고 했었으니깐.”
“의사요?”
“응.”
도아는 그제야 시우의 망설임 없던 행동이 납득이 간다는 듯 끄덕였다. 하지만 뒤이어 응급처치 후 힘들어하던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쪽이 저며왔다.
“왜 그만두셨어요?”
“적성에 안 맞아서.”
“아쉽지 않으셨어요?”
“전혀. 오히려 의대로 진학한 내가 후회스러웠지.”
담담한 태도와 느슨한 말투가 제법 큰일이었던 과거의 사건을 작은 일처럼 느껴지게 했다.
“대표님이 과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 듣는 것 같아요. 이야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뭘 이런 거로.”
풀꽃 사이에서 시우의 미소가 잔잔하게 흘렀다. 그 모습을 새겨보는 도아의 마음속은 외면하려 했던 감정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빈틈없이 공간을 채워나갔다.
“저, 그럼 한 가지만 더, 나무는 언제부터 좋아하셨어요?”
“옛날부터 좋아했어. 오래 살고, 변함없고, 밤과 낮 사이 조용히 피고 지는 게 아름다우니.”
시우가 단단한 손가락을 들어 구석에 자리 잡은 나무를 지목했다. 초록 잎들 사이에서 동그랗고 하얀 꽃이 예쁘게 매달려 있었다. 익숙한 나무였다. 힘없는 모습으로 동정심을 유발해 물을 주게 만들었던 그 아이. 덕분에 시우에게 한 소리를 들었고, 그날 이후로 괜히 거슬릴까 정원에 들어오는 것도 조심했었다. 그래서 이렇게 예쁜 꽃이 핀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여름에 흰 꽃이 핍니다. 그때 봐보세요.’
시우가 봄날에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오르자, 꽃이 뿜어내는 아름다운 자태에 황홀함이 밀려왔다.
“정말, 예뻐요. 대표님. 선물 받은 것 같아요.”
도아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자 시우는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얇은 플라스틱이 구겨지며 컵 표면에 자리 잡았던 물방울이 조르르 흘러내렸다. 도아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붕 떠오르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 남아 있는 얼음을 아작 씹었다. 꽃봉오리 같은 마음은 꽃이 필 준비도 안 됐는데, 나비가 날아와 보채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우와 대화하는 게 불편하긴커녕 요 근래 이 정도로 즐거웠던 적이 있나 싶을 만큼 행복했다. 몇 분 전의 대화도 몇 년 전의 추억이 되어버린 것처럼 아득했다.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 어떻게든 부여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지금처럼만 해.”
이어지는 시우의 말이 마침내 도아의 기분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불쑥, 의심이 들었다. 몇 달 동안 좋은 말이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던 사람이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따지고 보면 도아의 잘못이었다. 시우는 자신이 퇴근하지 않으니 슬슬 눈치를 보는 도아의 태도가 퍽 신경이 쓰였다. 그 걸리적거리는 보안팀 직원과 저녁 약속이라는데, 속이 뒤틀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도아와의 관계를 진전시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므로 막는 것도 우스운 일. 그러다 사심 가득한 눈빛에도 심드렁하게 옷을 고르던 그녀의 태도가 떠올라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그녀를 보내주고 업무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같은 내용을 읽고 또 읽으며, 무거운 손가락을 꾸역꾸역 움직이며 일을 이어갔다. 잠들어 버린 듯 조용한 시계를 바라보다 자신이 하는 헛짓거리에 마음이 꿈틀거렸다. 상념들이 뒤섞이는 사이에 시우의 마음은 검푸른 빛깔로 물들어 갔다. 그런데, 불쑥 앞에. 그것도 커피까지 사 들고 나타났으니. 자꾸만 기분이 늘어져 좋은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너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시우는 도아의 입술을 새겨보았다. 봉숭아 꽃물 들인 듯 빨갛게 물들어 있는 탱글한 입술은 건드리면 과즙이라도 흘러내릴 듯이 탐스러웠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자신을 옭아매 왔던 긴 시간이 다시금 마음을 억누르게 했다. 그림자 길게 드리운 방. 웅크리고 있는 어린 아이.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자신이 슬프게도 울고 있다.
“하하. 앞으로 커피는 이 가게에서만 사 와야겠어요. 대표님.”
시우는 기억 속 자신의 어린 시절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도아의 맑은 웃음이 해맑아 따라 웃었다. 둘의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안돼. 여긴 커피가 맹물 같네.”
시우는 평소와 같은 트집으로 대화를 끝낼 준비를 했다. 그리고 뒤이어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했던 시간의 마침표 같은 진동 소리가 울렸다. [권아람.] 핸드폰 화면에 선명하게 떠 있는 이름이 도아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어. 회사 근처라고?”
단정한 자세에 시선이 가고, 중저음 목소리에 신경이 쏠렸다.
“아아. 괜찮아. 이제 퇴근이야.”
기쁘기만 하던 마음이 어지럽혀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뚝뚝한 듯 다정하게 들리는 말투가 도아의 속을 뒤틀기 시작했고, 시우를 곁눈질하던 시선을 녹빛 정원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제법 커다란 화분임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자라기 위해 비죽비죽 튀어나온 나무뿌리가 보였다. 항상 우아하게 돋아난 잎들만 봐서 알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대표를 위하는 건 비서의 일이라는 우아한 핑계고, 마음속에서는 그에 대한 관심이 뻗어 나가고 있었던 걸까. 도아는 괜히 자신의 욕심을 마주한 것 같아 자리가 불편해졌다. 시우의 손에서 빈 컵을 자연스럽게 빼가고는 자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정원을 빠져나왔다. 탕비실 불도 켜지 않은 채 컵을 씻었다. 수전에 떨어지는 물줄기가 실탄처럼 빠르고 강하게 손등을 때렸다. 헹구기만 하면 끝인 일회용 컵을 뽀득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씻고 또 씻다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겨우 손잡이를 위로 올렸다. 깨끗해진 컵을 분리 수거통에 무심히 던지고는 싱크대에 기대어 서서 창문 너머 켜켜이 쌓인 빛들을 바라보았다. 시우와 처음 인사를 나누었던 날이 반짝이며 스쳤다. 얼굴 보고 짧게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 봄바람 불듯 마음이 가벼워진 순간. 한시우는 이상한 존재였다. 그 앞에 서면 불편하고 어렵고 긴장되었다. 그럼에도 인정받겠다고, 칭찬받겠다고 어린아이처럼 이 바득 갈며 버티던 날들. 자존심 상하는 말들에 지쳐 이제 자신도 그를 싫어하겠다 결심하고. 그러다가 가끔씩 보여주는 다정한 모습에 숨죽여 가슴이 뛰고. 그때마다 미워하겠다 악을 쓰며 외치던 건 쏠리는 감정을 숨기려는 무의식의 발로였음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어차피 가망이 없는 사이이기에 스스로 감정을 외면하고 억누르고 있었구나. 어쩌면 괜찮은 사람, 좋은 사람일 것이라 지레 판단했기에 정원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무관심한 표정이 온몸을 굳게 만들었구나. 아니면 그보다 더 먼저. 대표실에서 인사를 하던 순간. 차분한 눈길과 부드러운 어투로 호칭을 물어봐 주던 때일까. 갑자기 비서가 된 것이 달갑지 않아서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던 게 전부였을까. 신입사원 환영사를 해주던 그 얼굴과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랐던 게 진짜 속마음이었던 것 같았다.
‘잘했어.’
도아는 자신의 속을 비집는 칭찬 한마디에 꼭꼭 닫아두었던 문이 속절없이 열려버렸다. 달달 떨며 단단한 손을 쥐어보지 않아도, 외면하려고 노력해도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그의 칭찬에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가 다른 여자와 통화를 하는 모습에 이렇게 무너져 내릴 것이라면. 너무나 확실했다. 그에게 받고 싶었던 것이 칭찬이 아니라 관심이었다고. 내가 한시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