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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내 것이었으면 (27/85)

제27화. 내 것이었으면2022.01.31.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시우가 걸어왔다.

16548717045008.jpg“어쩐 일이야.”

적당한 미소와 단정한 목소리. 무심하게 시계를 확인하며 앉는 장면은 우아했다. 내 것이었으면. 아람은 늘 그렇게 생각했다. 가능하다고 믿었다. 조금씩 거리를 좁히다 보면 따로 가던 걸음은 나란히 보폭을 맞추게 되고, 손을 잡게 되고, 팔짱을 끼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일 전 그의 표정과 행동, 눈빛이 누군가에게 귀속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섬광처럼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분명했다. 그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자,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 뒤틀렸다. 결국, 몇 마디 말로 시간을 끌던 아람은 참지 못하고 본론을 꺼냈다.

16548717045013.jpg“너, 혹시 이도아 비서 좋아해?”

갑작스럽게 등장한 비서의 이름에 그가 눈동자를 빤히 올렸다.

16548717045008.jpg“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16548717045013.jpg“너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봤다고. 그날.”

16548717045008.jpg“아. 허브차 준 날? 장난치는 게 재밌어서 웃은 거야. 누구와 만날 마음은 없어.”

거짓말. 시우의 마음에 자리 잡은 벽은 매우 높고 견고했다. 죽을 듯이 괴로워하면서도 꼭꼭 숨겨둔 속마음은 절대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죽을 거라는 허무한 말을 듣기까지도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면에 있으니 약만 복용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 만약 의사가 필요 없어진다면 자신을 찾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기에.

16548717045013.jpg“너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야. 너한테는 나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잠잠한 눈빛을 쳐다보니 마음이 다급하고 초조했다.

16548717045008.jpg“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의사 선생님께서.”

16548717045013.jpg“누구와도 만날 마음 없으면, 그냥 시험 삼아 나랑 만나.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지?”

시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오랜 친구의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도 당황하지 않는 모습에 아람은 벌컥 화가 일었다.

16548717045008.jpg“짐작은 했어. 그래서 틈을 준 적 없을 텐데.”

크고 매끄러운 손에 들려 있던 와인잔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16548717045008.jpg“월튼이 알아본 의사가 너란 걸 알고, 병원을 옮기겠다고 했을 때 네가 말했지.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다고, 자신의 실력만 믿으라고.”

16548717045013.jpg“어. 기억나.”

아람은 허탈하게 조소했다. 그때는 당장 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에, 그런 거짓말을 했었다.

16548717045008.jpg“권아람. 난 네가 굳이 캐묻지 않아서 괜찮았어. 적당히 컨디션 체크하고, 처방해주고. 딱 그 정도.”

16548717045013.jpg“그러니깐, 내가 계속 그 정도로 옆에 있어 주겠다고. 잘난 내가.”

아람은 부유한 집안의 금지옥엽 외동딸로 귀하고, 모자람 없이 자랐다. 거리를 두는 그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해 다른 남자들도 여럿 만났다. 하지만 결국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은 한시우라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16548717045008.jpg“나 같은 사람 말고, 너한테 힘을 주는 사람을 만나. 나는 곧 죽는다는 이야기나 하는 환자고.”

시우가 가볍게 웃어주었다. 이어 잠시 라운지 밖으로 시선을 내리고 혈관처럼 빨갛게 흐르는 차들의 행렬을 응시했다. 다시 고개를 아람을 보았을 때 옅게 남아 있던 미소는 완전히 사라졌다.

16548717045008.jpg“이제 의사로도, 친구로도 찾아오지 마.”

차가운 음색을 끝으로, 시우는 매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라며, 의사라며 겨우 붙잡고 있었던 관계가 끝났음을 아람은 직감했다. 뒤늦게 시우를 잡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무릎 위에 있던 스카프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끝이라니. 우리 관계가? 말아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감미로운 재즈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 시우가 어린 시절 살던 집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한가득이었다. 푸른 잎들은 밤과 낮 사이 조용히 자라나며 자유롭게 뻗어 나갔다. 또래 중에서 나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시우였다. 아버지는 가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며 작은 손을 잡고 늘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또 자신처럼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떤지 틈만 나면 물었다. 시우는 그때마다 더 재미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행복했던 기억은 아주 조금. 조각이 되어 남아 있을 뿐이었다.

16548717045008.jpg‘아빠. 엄마가 갑자기 왜 아픈 거야?’

1654871708883.jpg‘시우야. 엄마는 금방 좋아질 거니 걱정하지 마.’

아버지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불안과 슬픔에 사로잡힌 아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또래 중에서 가장 똑똑한 것도 시우였다. 겨우 9살인 아이가 먼 거리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까지 혼자 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몰래 찾아간 병원에서 건강하던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호흡기에 의존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은 불행하게도 너무나 생생하게 머릿속에 박혀버렸다. 시우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16548717045008.jpg‘말 안 하고 가서 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뒤늦게 병원에 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담담한 아들의 태도에 큰소리 한 번 낼 수 없었다. 시우가 돌아오자 집은 다시 평온해졌다. 그러나 9살의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계속 떠올라 밤잠을 설쳤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동이 트자마자 나무가 울창한 비탈길을 올라 몇백 년 된 고목을 만나러 갔다. 높은 곳에서 들리는 청아한 새소리도 슬펐다. 거칠고 투박한 나무껍질에 작은 몸을 기대곤 우리 엄마도 너처럼 오래 살게 해달라 빌었다.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몇 시간을 엉엉 울며 간절히 빌었다.

16548717045008.jpg“하.”

오랜만에 꾸는 유년 시절의 꿈은 부모님이 나왔음에도 달갑지 않았다. 허리를 일으켜 세운 시우는 손을 뻗어 자리끼로 떠다 놓은 컵을 집어 들었다. 달빛이 방 안으로 들이비쳐 공간을 어슴푸레하게 만들었다. 고요한 방 안으로 자신의 심장 소리가 퍼져나갔다. 넓은 침실은 빈 곳이 너무 많았다. 어차피 회사도 집도 자신은 잠시 빌려 쓰는 자리 같아 편하지 않았다. 가구는 최소한으로. 지인조차 한 번도 들어오라 한 적 없는 그런 곳이었다. 단 한 명. 비서를 제외하고.

16548717045008.jpg‘권아람. 난 네가 굳이 캐묻지 않아서 괜찮았어. 적당히 컨디션 체크하고, 처방해주고. 딱 그 정도.’

시우는 아람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비단, 아람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은, 실없이 캐묻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48717117134.jpg‘대표님. 혹시 어디 아픈 곳이 있으신가요?’

16548717117134.jpg‘취소한 검진 일정 다시 잡아도 된다고 허락하시면 특별히 드리겠습니다.’

16548717117134.jpg‘의사요? 왜 그만두셨어요? 아쉽지 않으셨어요?’

선을 그으면서도 그녀의 관심이 자신을 향하고 있으면, 무언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정신은 점점 맑고 또렷해졌다. 다시 잠들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진단이 내려지자 별다른 고민 없이 물잔을 들고 거실로 향했다. 테가 얇은 안경을 쓰고 시계를 확인했다. 4시. 아침 일찍 공항에 가야 하니 그냥 일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직 잠잠한 동편 하늘을 한동안 응시하다 청승은 이만하면 됐다고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소파 측면 한편에 구김 하나 없는 반듯한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더이브’라고 확인 사살하듯이 적혀 있는 저 골칫덩이를 어떡하나 제법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16548717045008.jpg“그냥 주고 싶은데.”

본인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조잘거리며 설명하는 도아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했다. 구매가 목적이 아니었으나 결국 손에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약장수에게 당한 느낌이랄까.

16548717045008.jpg“싫어하려나.”

점심 먹는 것 하나도 그렇게 견제하던 사람인데 의미를 알 수 없는 선물에는 얼마나 정색할까 싶었다. 입꼬리를 올린 채 도아를 떠올리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유리창에 어렴풋이 비춰왔다. 스탠드에서 퍼져나온 노란 조명이 미소를 한층 깊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꿈을 꾸면 그날은 웃음 한 번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생각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달래 준 사람의 이름을 가만가만한 목소리로 불러보았다.

16548717045008.jpg“이도아.”

늘 단정한 나의 비서. 월튼을 제외하면 여태껏 비서를 이름으로 불렀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이력서를 다시 훑으니 이름이 새삼스레 예뻐 보여, 마음이 그냥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물어보게 되었다.‬ 호칭은 비서와 이름 중 무엇이 더 좋은지. 돌아온 대답은 만족스러웠다. 부르면 돌아봐 주는 그 모습이 좋아서, 발걸음을 멈추고 집중해주는 행동이 끌려서 굳이 이름을 부른 적도 많았다. ** 7월의 제주는 습하고 뜨거웠다. 원예 종묘와 정원이 어우러진 이국적인 장소가 제주 출장의 첫 번째 스케줄이었다. 거대한 나무가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흙길은 당장 숲속 결혼식을 올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분위기였다. 작은 새들이 튀어 오르고 숨으며 바삐 움직이는 사이, 더 부지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곳의 매니저. 딱 보아도 방대한 양의 묘목을 구매할 분위기의 고객에게 열과 성을 다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짧게 잘린 잔디들 위로 물결 같은 그림자가 나란히 움직였다. 시우는 나무가 에이치 코리아 지점 실내정원에 두었을 때 얼마나 잘 어울릴지, 내부에서도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고민했다. 도아는 개인 핸드폰에 시우와 매니저의 대화를 기록하며 뒤를 따랐다.‬ 매니저의 손끝을 따라 도아의 시선도 키 작은 나무들로 향했다. 초록 비단이라도 뒤집어쓴 듯 모든 잎에 부드러운 윤기가 흘렀다. 이곳의 관리자들도 시우만큼이나 지극정성인가 싶어 입 끝의 작은 웃음이 두 뺨까지 번졌다. 마음을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히려 들키면 상황만 나빠질 것이 뻔하니 그저 묵묵히 일에 집중했다.

16548717045008.jpg“수형이 아주 좋군요.”

16548717045008.jpg“해충의 흔적도 없고, 관리를 잘하셨네요.”

자신에게는 속 긁는 소리만 하더니 오늘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칭찬이 잘도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나무를 볼 때 얄미울 정도로 총기 넘치는 눈빛은 덤이겠거니 하며 시계를 보았다.

16548717117134.jpg“대표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이제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식당 예약 시간이 가까워진 것을 확인한 도아가 대화를 끊었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일까지 구입할 묘목의 종류와 양을 정리해서 보내겠다는 말로 정중하게 대화를 끝냈다.

16548717117134.jpg“점심 약속이 된 분을 알려주시면 레스토랑 입구에서 대기하다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우보다 한 발짝 정도 차이를 두고 걷던 도아가 말을 꺼내자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16548717045008.jpg“비서랑 같이 먹을 예정이었는데?”

16548717117134.jpg“저랑요?”

16548717045008.jpg“뭘 새삼.”

16548717117134.jpg“아……. 보통 식당 명까지 알려주시면 중요한 분과의 약속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생각을 못 했습니다.”

시우가 눈을 가늘게 만들어 단정한 비서를 살펴보았다.

16548717045008.jpg“우리 이도아 비서님께서는 중요한 분이 되고 싶으신가 보군요.”

16548717117134.jpg“아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우의 빈정거리는 장난을 가볍게 밀어냈다.‬ 작은 묘목들이 펼쳐져 있던 장소를 지나 다시 키 큰 나무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청록색 나뭇잎이 촘촘하게도 자라 있었다. 둘은 조각난 햇빛이 들어오는 길을 나와 자동차 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앉은 것은 시우였다. 그가 운전하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낯선 풍경 때문인지, 자신의 마음이 달라져서인지 괜스레 기분이 들뜨는 듯했다. 살며시 떠오른 홍조는 레스토랑에 도착해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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