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폭풍전야2022.02.04.
파도가 몰아치는 제주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좋은 자리로 부탁한다고 정성 들여 메일을 보낸 보람이 있었다. 이 자리라면 어떤 계약이어도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 분명했다.
“회사에서 연락 온 것 중에 급한 건 있어?”
“아니요. 다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안건들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자리가 이렇게 훌륭한데 별다른 말이 없는 시우를 향해 도아는 속으로 혀를 쯧, 차며 대답했다.
“이따 밤에 처리하도록 할게.”
“네. 알겠습니다. 아, 대표님 핫케이크 좋아하세요? 호텔 근처에 수플레 케이크로 유명한 브런치 가게도 있던데.”
“난 단 건 별로야. 다음에 친구들이랑 오면 가보도록 해.”
정원에서 함께 커피를 마신 날, 마음이 요동쳤던 것과는 별개로 이제 칭찬 못 받아서 속상하진 않겠다 싶었다. 앞으로는 잘했다고 자주 말해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한여름 밤의 꿈이었나 싶을 만큼 그는 여전히 무감한 태도로 도아를 대했다. 내가 널 좋아하긴 하지만, 넌 좀 싸가지가 없어. 도아는 차마 꺼낼 수 없는 속마음을 고기 조각과 함께 꼭꼭 씹어 삼켰다.
“이따 오후에 르베이호텔 사업기획팀 발표에 도아 씨도 참석해.”
뜻밖의 명령에 눈을 깜빡이던 도아가 마침내 위대한 대표님의 뜻을 이해했다. 한시우 대표님, 죄송했습니다. 마음속에서 빠른 사과를 하는 것으로 흉봤던 것을 무마하고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일 욕심 많은 신입사원에서 비서로 직무가 틀어진 불쌍한 어린 양에게 주는 좋은 경험의 기회였다. 도아는 양손에 쥔 커트러리를 가볍게 내려놓고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뒤로 펼쳐진 푸른 빛깔의 바다가 그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그려진 작품 같았다. 시우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가는 물길을 따라 서서히 채워진 감정은 이미 진작에 넘쳐버린 것 같다고. 강이 되어 바다로 흘러갔기에 이제 돌이킬 수 없다고. 후회의 미소를 얼굴에 띄우곤 눈꺼풀을 내려 도아의 맑은 시선을 피했다. 앞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감정을 보일까 긴장하고, 신경을 쓰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평소처럼 업무와 시시콜콜한 내용으로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둘의 마음은 이미 평소와는 달랐다.
** 르베이호텔 사업기획팀에서 준비한 발표는 깔끔했다. 사원이 비빌 수 없는 자리가 확실한 곳에서 하나라도 놓칠까 봐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다. 천 회장은 유리라 디자이너가 쓰러졌던 사건에 대해 인사를 하고 싶다며 제주도 방문에 맞춰 저녁 일정을 잡았다. 그때까지 시간이 뜨니, 룸에서 쉬다가 약속 시각에 늦지 않게 대표를 모시러 가면 그만인 지극히 평범한 상황이었다. 편하게 쉬면 되는데 눈앞에 놓인 뜻밖의 물건에 도아는 좀처럼 마음이 평온해지지 않았다. 눈동자에는 의심이 한가득 서려 있었다. 몇 분 전,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우가 잠시 자신의 룸에 들렀다 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응접실에서 건넨 익숙한 외형의 쇼핑백.
‘더이브?’
도아는 눈을 찡그리며 쇼핑백을 훑어보았다.
‘저녁에 입어. 그때 보니 옷이 잘 어울렸어.’
‘선물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맞아.’
친절한 미소와 짧은 대답을 남기고 그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게 왜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찬찬히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더이브 매장에 시우가 왔다. 마침 비서인 자신이 있었고 선물 사는 것을 도와 달라고 했다. 그래서 열과 성을 다해 도와주었다. 역시 길이가 길었던 거겠지? 색상이 별로라고 한 소리 들었나? 받는 사람이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은, 의미가 녹슬어 버린 천 조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우가 직접 건넨 물건이니 그냥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민트색이 더 예뻤는데. 잘됐다.”
정신승리 같기도 해 헛웃음이 났다. **
“반가워요. 나 알지? 뉴스에 자주 나오니깐 소개는 생략이야.”
걸걸하고 호탕한 목소리가 도아의 귀를 꾹 눌렀다.
“네. 알고 있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시우 대표님 비서 이도아 입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먼저 용기 있는 행동을 해줘서 고마워요.”
천 회장은 도아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먼저 발견해서 그랬던 거죠. 제가 못했다면 분명 다른 분이 도와주셨을 겁니다.”
“겸손하긴. 백번 칭찬해줘도 모자라요. 파티에서 일 나면 재벌이 어쩌네. 저쩌네. 아휴 머리 아파. 아, 내가 반말이 익숙해서 그냥 편하게 반말해도 될까?”
“네. 물론입니다.”
“배고프지? 어서 식사하자고. 시우도.”
다양한 모양의 현무암들이 이곳저곳에 장식품처럼 놓인 공간이었다. 테이블 한 귀퉁이에는 단청 기러기 목 조각 2개가 나란히 앞을 보며 장식되어 있었다. 직원은 전채 요리가 정갈하게 담긴 원형 백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발표는 어땠어?”
“좋았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효과가 나올 것 같더군요.”
천 회장의 질문에 시우가 단정하게 대답했다. 둘이 나누는 사업적인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다. 몇백억 사안들이 이렇게 몇 마디로 결정된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지만 서로 팽팽하게 이익을 가져가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관람객의 자세로 둘을 바라보며 열심히 식사를 즐기던 시간이 깨진 건 코스요리가 중간쯤 왔을 때였다. 흑돼지 고기와 송이 구이가 맛깔스럽게 세팅되는 와중에 주제는 돌고 돌아 다시 오후에 있었던 사업기획팀 발표로 넘어왔다.
“도아 씨가 보기에는 어땠나?”
천 회장이 노릇하게 구워진 두부를 집어 들며 물어왔다.
“좋았습니다. 객실뿐 아니라 라운지까지 저희 회사 제품으로 채워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뻤습니다. 다만…….”
“다만?”
무심결에 ‘다만’이라는 부사를 써버린 것에 스스로 흠칫했지만 침착하게 의견을 내어 보았다.
“담당자분이 라운지에 들어가는 제품 라인을 객실과 동일하게 우드 제품으로 설명하셨는데, 심플라인도 고려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통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파노라마 풍경에 집중할 수 있고, 공간에 간결하게 녹아드는 에이치 코리아의 아이덴티티도 잘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흠.”
천 회장이 젓가락을 쥔 채 물컵을 가볍게 들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도아가 옆자리에 앉은 시우를 향해 도움의 눈짓을 보냈지만, 뻔히 알면서도 외면하는 얄미운 태도만 확인해야 했다. 정적 끝에 천 회장의 입가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비서가 말한 내용이 시우랑 일전에도 나눴던 이야기라서. 웃음이 나왔네. 비서랑 대표랑 잘 통하나 봐?”
이어 마주 보고 있는 도아를 향해 친절한 설명과 억측을 동시에 뿌리고는 몸을 의자에 편하게 기대었다.
“아……. 대표님과 의견이 같다니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며 방긋 웃어 보였다. 어쩐지 지금 자신이 눈썹을 살짝 어그러트리고 목소리도 올려 말한 것 같았다.
‘다 보인다니깐.’
정원에서 기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미간을 가리키던 시우의 모습이 기억났다. 천 회장이 식사에 집중하자 도아는 번뜩 고개를 돌려 시우를 확인했다. 어느새 젓가락질을 멈춘 그는 시선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자신의 미간에 가져다 대며 가볍게 웃어주는 것으로 ‘거짓말 잘 들었어’라는 대답을 대신했다. 도아는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훡 돌렸다.
“회장님. 그리고 의견 드리고 싶은 내용이 또 있습니다.”
“뭘까?”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니, 회장님께서 베지테리언이신 것 같은데 맞으실까요?”
“아. 맞아. 그건 왜?”
“요즘 비거니즘 라이프 스타일이 확대되고 있는데요. 에이치 그룹 비건 가죽이 굉장히 잘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 친화적인 리조트형 호텔에 잘 어울리는 소재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비건 가죽? 그런 게 있었어?”
나이가 들수록 수다가 늘어가는 천 회장은 도아의 의견이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말을 걸었다. 자식들이랑 이야기하는 것보다 이 앞의 둘과 이야기 하는 게 훨씬 편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더이브 옷 아니야? 가구 이야기도 그렇고 이 비서가 안목이 있네. 나도 좋아하는 브랜드야.”
“아, 제 안목은 아니고, 대표님께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도아는 천 회장이 지나치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아 내용을 정정해 주었다.
“시우가?”
하지만 그 말에 천 회장의 눈빛은 재미있는 걸 발견한 듯 반짝거렸고, 시우는 헛기침하며 처음으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명주실 같은 가야금 선율이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젓가락을 한 번도 내려놓은 적 없는 천 회장이 처음으로 수저를 가지런히 테이블 위에 두었다. 건조된 오징어처럼 매정한 놈이 선물이라니! 비서의 이야기를 듣고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자 지금 이 자리가 결혼식장이 된 것 같은 착각이 솟구치며 감동이 밀려왔다. 무료한 일상으로 메말라 있던 가슴속 사막에 단비가 아닌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둘을 이어주기 위해 늙고 바쁜 몸 장렬히 희생하겠다 다짐했다. 일단 바다에서 로맨틱하게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흠흠. 둘은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나?”
“네. 2시에 호텔 부지 방문하고 저녁에 돌아가는 일정입니다.”
“그럼 내일 점심에 돌고래 보러 가는 건 어떤가? 마침 호텔 근처에 내 요트도 있으니깐.”
주체할 수 없는 입꼬리를 겨우 내리며 사뭇 점잖은 태도로 의견을 물었다.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린 시우는 조용한 탄식을 공기 중으로 흘려보냈다.
“돌고래요? 제주도에 고래가 있나요?”
도아가 돌고래라는 단어에 신기해하며 큰소리로 되물었다. 마침 후식 차를 내려놓던 직원이 그 소리에 놀라 실수로 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핸드폰 툭 밀치고 말았다. 저만치 날아간 핸드폰은 기하학적으로 조각된 현무암 장식에 부딪히고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어떡해! 죄송합니다!”
서빙하던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한걸음에 핸드폰을 도로 가져왔다. 전화기의 상태를 요리조리 살핀 도아가 손까지 덜덜 떨고 있는 직원을 향해 괜찮다며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케이스 깨졌네. 다칠 수 있니깐 얼른 빼.”
바로 옆자리에서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져서 홈이 난 부분을 검지 끝으로 살살 만져보니 꽤 날카롭기는 했다. 그냥 써도 될 것 같았지만,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홀린 듯 케이스를 벗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천 회장은 컵을 잡으려던 손을 조금 더 멀리 뻗어 단청 기러기 조각으로 향하게 했다. 그가 가볍게 방향을 바꾼 덕분에 나란히 앞을 보던 기러기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만족한 입매를 호선으로 만들고는 두 사람을 관찰했다. 그녀는 기쁨이 넘실대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평화로운 식사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