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메모2022.02.07.
르베이 호텔 건물 2층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가졌던 식사는 3시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마무리되었다. 9시가 다 된 시간이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대표와 비서는 스위트 룸 거실에 나란히 앉았다. 일을 끝내야 쉴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둘은 침묵 속에서 열심히 업무에 집중했다. 무심히 바라보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묘한 어색함이 둘 사이를 감싸고 있었다. 시우가 못마땅한 안건에 숨이라도 한번 크게 내쉬거나 자세를 조금이라도 바꾸면 도아는 그때마다 미세하게 주춤거리며 불편한 티를 냈다. 그 모양새에 우리 비서님께서 갑자기 왜 그러나 묘하게 거슬렸지만 당장의 목적 때문에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도아를 방에서 빨리 내보내는 것. 심신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그것이 좋을 것 같았다. 도아는 그저 말 한마디 없이 전자기기를 탁탁 두드릴 뿐인데도 그 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감정을 파종시켰다. 안돼. 수백 번 곱씹은 말을 또다시 되뇌며 마음을 다스렸다. 시우가 낮 동안 회사에서 올린 결재 건들을 승인한 것을 확인한 도아는 원예 종묘에 보낼 리스트 파일을 준비했다.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들을 유심히 보고 있는 그에게 주머니 속에서 케이스가 없는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대표님. 제 핸드폰 메모장에 매니저분이 설명했던 내용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혹시 고민되는 부분이 있으면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도아가 니은 모양의 패턴을 허공에 그리며 설명을 이었다.
“아아. 알겠어.”
“그리고 천 회장님 정말 좋은 분 같습니다.”
“맞아. 배울 점도 많고, 훌륭하신 분이야.”
이미 천 회장과의 대화는 끝났고, 레스토랑을 나온 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귓전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특히 그 흐뭇함을 주체못하던 표정이 생각나자 눈이 질끈 감겼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계를 확인했다.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싶었다.
“거기에 두고 이만 내려가.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네?”
“내가 편하게 업무 보고 싶어서 그래. 천 회장님 침 튄 것도 좀 닦고 싶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따라 도아의 고개도 관성을 거슬렀다. 머뭇거리던 도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 그런데 핸드폰이 제 거라서 그냥.”
“그럼 내용만 메일로 보내놔.”
핸드폰이 제 거라서 그냥 여기 있어도 될까요.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시우가 말을 잘랐다. 하지만 도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빨리 자신을 내려보내고 혼자 편하게 있고 싶은 모양새였지만 그가 정장 아닌 다른 옷을 입은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의 프라이버시야, 미안하다. 결국 자신의 핸드폰을 공양미마냥 한 시간 동안 시우에게 바치기로 결정했다. 딱히 대단한 게 담겨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가 메모장 외에는 절대 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제가 한 시간 후에 찾으러 오겠습니다.”
못마땅한 시우의 표정을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
“그래. 그러든지.”
결국 시우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이고는 거실에 도아를 홀로 남겨둔 채 밤빛이 내려앉은 복도를 지나 베드룸으로 사라졌다.
“네. 이따 뵙겠습니다.”
도아는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다 허공에 한발 늦게 대답하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이 사부작거리던 소리가 사라지자 거실은 고요한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이어서 툭툭 힘없는 부슬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 샤워를 마친 시우가 거실에 성큼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창 표면에는 작은 빗방울들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편안한 느낌의 오버핏 반팔 티셔츠와 슬랙스를 입은 모습이 평소와 다른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겨왔다. 넓은 보폭의 걸음은 최종 목적지였던 냉장고 앞에서 멈추었다. 서랍 열듯 문을 당기고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방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한 모금 두 모금 갈증을 채우는 도중에 진동이 울렸다. [월튼] 화면에 뜬 것은 익숙한 이름이었다.
“월튼. 왜.”
-시우, 나 한국 가기로 아내랑 이야기했어.
“한국 와서 뭐 해 먹고 살려고?”
-뭐? 나 안 불러줄 거야? 나같이 유능한 비서를?
갑자기 커진 친구의 목소리에, 시우가 짧게 웃으며 몸을 기울였다.
“지금 비서도 유능해. 네가 자료집 잘 남겨주고 갔잖아.”
-내 영혼이 들어간 자료집! 그래도 그 정도론 어림없을 텐데? 노력파인가 보네. 3월에 나 한국 갔을 때 말했던 비서 맞지?”
“맞아. 네가 내 핸드폰 전원 꺼버린 날.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아내가 너한테까지 전화해서 무서웠단 말이야. 나도 회사에 일 생겼을 줄 알았겠어?
한국에 잠시 들렀다 아내와 싸운 월튼이 갑작스럽게 시우를 찾아와 결혼생활의 고충을 털어놓은 날이었다. 그러다 시우의 핸드폰으로 그의 아내가 전화를 걸었고, 월튼은 무섭다며 핸드폰의 전원을 종료시켰다. 그렇게 시우의 전화는 꺼졌다. 그 사이, 박 상무가 화재 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었고, 결국 통화가 안 돼 도아가 직접 찾아오는 일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본사 가서 일할 거라고 좋아했으면서. 왜 다시 오려고? 아내 때문에?”
-응. 아내가 한국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헨리 대표가 이번에는 꼭 본사 방문하라고 했어.”
“그럼 대표 한 명 더 뽑아달라고 해. 미국 갈 시간 없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이번엔 꼭 가봐. 안 그러면 그 잔소리 내가 다 듣는다고.
“알겠어. 그래서 언제 오는데?”
-곧. 날짜 확정되면 다시 연락할 테니 기다려.
“그래.”
-지금 어디?
“제주도.”
-아아. 좋은 데 있네. 나무만 보지 말고, 사랑도 하고 그래.
시우는 젖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창문 너머로 시선을 내보냈다.
“실없긴. 끊어.”
-하하하.
짓궂은 웃음소리와 함께 통화가 끝났다. 월튼이 돌아오면, 도아가 굳이 비서실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도아를 향하는 다잡기 힘든 마음이 거슬리던 참이었다.
‘비밀인데, 너한테 잘 보인 다음에 다시 전략팀으로 보내 달라고 할 거야.’
술에 취해 주절거리던 그녀의 바람대로 되었으니 결국,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마음은 사납고, 복잡했다. 마른세수를 하며 무심코 돌린 시선은 도아가 놓고 간 핸드폰에서 멈추었다. 들려있는 물을 마신 후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 휙휙 페이지를 넘기곤 메모 앱을 열었다. 비서는 초록 숲길에서 자신과 매니저의 이야기를 열심히 받아적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시우가 눈동자를 내려 뚫어지게 보는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내용이 궁금해졌는데, 비서의 말대로라면 제일 먼저 보여야 할 나무에 관한 설명은 보이지 않았다. 곁눈질하듯 화면을 무심히 살피다가 물병을 크게 기울여 한 모금 더 넘기고는 집중해서 글자들을 보기 시작했다. 회사 관련 사항, 레스토랑에 관한 정보, 모임 관련 리스트. 개인 핸드폰에 뭐 이런 걸 꼼꼼히도 기록해 두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계속 제목들을 읽어내려갔다. 제법 빠르게 움직이던 스크롤이 멈춘 것은 시우가 꽤나 흥미로운 제목을 발견했을 때였다. [비서실 진짜 매뉴얼]
“진짜 매뉴얼?”
월튼의 자료를 쉽게 정리해 놓은 건가 싶었지만, 진짜라는 말이 알게 모르게 거슬렸다. 의문과 불신이 가득 서린 표정으로 제목을 누르자 방대한 양의 글자들이 시야를 채웠다. 작고 빼곡한 글자들은 얼핏 보면, 정말 전자기기의 매뉴얼 같아 보였다.
“어느 날 갑자기 반말한다. 놀라지 말자. 원래 그런 인간임?”
첫 줄을 진지하게 읽어 내려가던 중저음의 목소리는 결국 마지막에는 의문문으로 막을 내렸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다시 한번 글자들을 정독한 시우의 얼굴에 조소가 한가득 실렸다.
비서 이도아는 함께 일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일솜씨가 매우 미더웠다. 그 장점과는 별개로 가끔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곤 했다. 근무시간에 잠들어 버린다거나, 갑자기 성난 강아지처럼 빽 화를 낸다거나, 술주정한다던가. 그래도 이제 어느 정도 예측이 된다고 믿었는데 이런 걸 적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꽤 발칙하고 엉뚱해 화도 안 났다. 그리고 이제야 왜 나무에 대한 설명은 한 문장도 없이 이런 내용만 보게 되었는지 짐짓 이해되었다. 천 회장의 모임에 가던 날 차 안에서. 비서실 핸드폰과 본인의 핸드폰을 포개서 만지작거리던 도아가 떠올랐다.
‘핸드폰 기종이 똑같네.’
‘네. 그래서 케이스 안 끼우면 구별이 잘 안 됩니다.’
자신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었다. 오늘 저녁, 레스토랑에서 비서실 핸드폰 케이스를 버리고 나오면서 시작된 해프닝인 듯했다.
‘아. 그런데 핸드폰이 제 거라서.’
본인도 분명 자신의 것이라면서 당당히 말했고. 뭐, 내민 것은 엉뚱한 핸드폰이었지만. 그래도 걱정 마시죠. 이 비서님. 안 본 것으로 해드릴 테니. 시우는 듣지 못할 상대에게 아량을 베풀어 주었다. 어차피 모른 척해 줄 예정이니 끝까지는 읽어보기로 했다. 소파로 자리를 옮기곤 편안하게 기대어 자신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내용에 하나하나 반문했다.
“반말은 본인이 먼저 하라고 했고.”
칭찬과 격려는 꿈도 꾸지 말자는 내용을 보며 감정을 숨기기 위해 너무 모질게 대했나 하는 생각이 짧게 스쳤다. 옆에 있었으면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동했으나 다음 글귀를 읽자 눅눅하게 스며들었던 애잔함이 사라졌다. 소 여물 먹듯 샐러드만 주구장창 먹는다는 내용에 퍽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 편하라고 그거 먹은 거야. 나도 미식가야.”
나무에 환장해 있다든지, 감기 걸린 직원을 병균 취급한다든지. 내용만 봐도 언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짐작이 가 웃음이 자꾸만 픽픽 새어 나왔다. 뭐 부연설명까지 이리 세심하게 적어두셨는지. 부드럽게 내려보던 시선은 가끔씩 어떤 문장 앞에서 멈추었다. [바쁜 와중에 운동은 열심히 하는 듯. 근육이 매우 탄탄. 그런 것에 홀리지 말 것.] [한시우는 캐슈너트만 할거임. 아니다, 몸은 건실해 보이니 취소.] [걷는 모습을 보면 잠깐 멍 때리게 되는데, 그때 뒤돌아서 시비 거니 조심. 내 생각엔 일부러 그러는 거 같음.] 그 내용들을 볼 때마다 무의식중에 조소했다. 느슨히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잠시 시선을 멀리 두었다 다시금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 처음에는 미움도 관심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기까지는 그로부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떨어진 빗줄기가 바닥을 적시는 소리가 룸 안을 채웠다. 메모가 마지막으로 저장된 날짜는 6월 중순. 약 한 달 전이었다. 시우는 끝까지 다 읽어 내려갔던 내용을 처음부터 꼼꼼하게 다시 읽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거렸다. 잠잠한 눈동자는 화면에서 시선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의 내리기 어려운, 뭉뚱그릴 수 없는 기분이었다. 띠릭. 마침 스위트룸 도어락에 카드키를 대는 소리가 작지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마 방 안에 흐르는 정적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아가 온다고 이야기한 시각까지 20분이나 남아 있었다. 비서는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시간도 이르게, 노크도 잊은 채 문을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