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미약한 희망2022.02.11.
도아의 룸은 한층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천장 조명이 들어오기도 전에 재킷을 벗어 에그 체어에 툭 던지고는 침대 위에 몸을 널브러뜨렸다.
“으윽. 피곤해.”
누우니 저도 모르게 으, 신음을 내뱉었다. 아침 일찍 제주도에 도착해 나무를 보고, 시우와 점심을 함께하고, 사업기획팀 발표에 참여하고, 천 회장과 식사를 하고. 피곤하지만 괜찮았다. 정말로 자신을 힘들게 만들었던 건 스위트룸 거실에서 단둘이 있었던 시간. 마음을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장담했던 대로 제주도에 왔다고 크게 변한 건 없었다. 도아는 자신의 그 생각이 크나큰 착각이고 오만이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회사에서는 대부분 벽을 사이에 두고 일했고, 식사하거나 이동할 때는 고개만 돌리면 타인이 항상 눈에 들어왔었다. 결국, 타인의 방해 없이 시우와 가까이 있는 것은 정원에서의 밤 이후로 처음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그는 책상이 아닌 소파에서 다리를 꼬고 제법 편하게 기대어 업무를 보았다. 느슨하나 너무 풀리지 않은 자세로 노트북을 바라보는 얼굴이 무심한 척 지나가려고 하는 눈길을 기어코 멈추게 했다. 작은 행동 하나에도 모든 감각이 집중되었다. 시선을 변두리로, 외곽으로 보내려 했지만, 자석처럼 끌려와 어느새 시우를 향했다. 눈과 귀뿐 아니라 손끝 발끝까지 그에게 반응하는 자신이 생경했다. 도아는 침대에 누운 채 쭈뼛거리던 자신의 손을 요리조리 살피다 툭 떨어트렸다. 살갗에 느껴지는 적당히 뻣뻣한 시트의 감촉이 쾌적했다.
“대표님 집에 있는 시트랑 느낌이 비슷하네.”
몇 주 전, 그의 집에서 바보처럼 잠들었던 날이 떠올랐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기억이라 이제 익숙했다. 손 한 번 쥐었다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자는 모습을 진득하게 훔쳐보았으면서 어떻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었나 싶었다. 그때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멍청하게 잠들지 않았을 텐데. 하늘이 준 기회였거늘.”
실없는 후회가 또다시 몰려왔다.
“나한테 관심조차 없겠지.”
자신은 시우의 집 구조를 모르니 분명, 그가 방으로 옮겨줬을 텐데. 깨워서 안내해 준 건지, 직접 안아서 옮겨준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아침에 마주했던 시우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 사무적인 태도를 보아하니 자는 사람 깨워서 들어가라고 등 떠밀었을 게 분명했다. 손이라도 오래 잡고 있을걸. 볼이라도 한 번 쓸어 만져볼걸. 몸에 살며시 기대라도 볼걸. 입술이라도……. 생각에 잠겼던 도아가 헉 소리를 내뱉으며 허리를 세웠다.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보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컸다.
“미쳤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쳤나 봐!”
굴곡진 머리칼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도아는 발끝에 힘을 주어 아예 침대 밖으로 나왔다.
“싫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곱은 손가락을 펴 이마에 가져다 댔다. 몸을 일으키고 나니 생각에 가려졌던 시야가 조금이나마 선명해졌다. 시간이 꽤 지났음을 확인하고는 화끈거리는 두 뺨을 지그시 누르며 욕실로 달려갔다. 찬물 샤워를 하니 복잡하던 마음이 희석되어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도 한몫했고. 그래도 내일 돌고래를 보고 싶으니 새벽에는 비가 말끔히 그쳤으면 좋겠다 싶었다. 머리를 말리고 편한 니트 투피스로 갈아입은 도아는 차분한 걸음으로 방 안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깨끗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비행기 스케줄을 한 번 더 확인하고자 화면을 켰을 때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회사의 것. 자신의 것. 케이스로 칼같이 구분하며 가지고 다녔는데. 마침 케이스가 깨져서 버리게 되었고. 하필 짝사랑에 홀려 엉뚱한 핸드폰을 주고 와버렸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실수라 침착하게 다독이던 도아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친 건 자신이 열심히 적어놓았던 메모들이 떠오르면서였다.
“아…….”
메모를 안 한 지 한 달은 된 것 같았다.
“지웠나?”
저급하고, 치졸한 험담의 내용이 파노라마처럼 촤르르 펼쳐졌다.
“지웠을 리가…… 없지…….”
탐관오리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대표를 흉보던 손가락이.
“안돼!!!”
핸드폰 하나 제대로 구별 못 한 자신이. 귀찮다며 잠금 패턴을 똑같이 설정해 놓았던 과거가. 케이스를 벗기라고 사람 홀리게 말한 시우가. 그냥 모든 상황이 원망스럽고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룸 카드 키를 낚아채듯 집어 들고 방을 뛰쳐나왔다.
**
“아……. 대표님.”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정신이 없어 계단으로 뛰어온 도아가 숨을 할딱이며 그를 불렀다. 둘은 몰랐겠지만, 10분. 그 정도의 시간만 허락되었다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도아가 10분만 빨리 왔다면 시우는 메모를 읽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10분만 늦게 왔다면 이 난감한 마음을 뭉개고 삭혀 제법 이성적으로 그녀를 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아는 너무나 시기적절한 순간에 들이닥쳤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에 머릿속이 꽤나 난마한 상태로.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물줄기가 가득 서려 있는 창을 주시하던 시선이 도아를 향했다. 시우의 머리 내린 모습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겨 복잡하게 생각이 뒤엉켜 있는 와중에도 마음을 살살 흔들며 놀렸다. 도아는 치마의 옆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제가 핸드폰을 바꿔서 놓고 갔습니다. 그래서. 가지러…….”
머리와 가슴. 양쪽에서 난리가 났던지라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자신이 핸드폰을 두고 갔던 곳부터 빠르게 방 안을 훑기 시작했다. 층계를 오르는 와중에도 그가 메모를 보지 않았을 거라는 미약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실낱같던 바람은 단 한마디에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여기 있어.”
선선한 목소리가 나비처럼 날아와 귀에 안착했다. 애타게 찾는 물건이 그의 손에서 인질처럼 숨죽인 채 잡혀 있었다.
“보, 보셨어요?”
흠칫 놀란 도아가 불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목소리를 꾹 누르며 침착하게 물었다.
“뭐를?”
조금만 늦게 왔으면 기꺼이 묻어주었을 텐데. 왜 하필 손에 쥐고 있을 때 와 가지고는. 그녀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누가 봐도 궁지에 몰린 생쥐인데, 아등바등 평온한 척을 하려는 모습이 짓궂고 집요하게 그녀를 괴롭히고 싶게끔 만들었다. 왜인지 알았다. 자신이 한 행동들이 있으니, 비서가 대표에게 좋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자연스럽게 짐작하는 바였다. 하지만 애타는 저와 다르게 아무렇지 않게 험담이나 하고 있는 내용을 직접 보게 되니 왠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그뿐인가? 잘생겼다 몸이 좋다고 말하는 내용에 이성적인 호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쇼윈도의 상품을 구경하듯, 심플한 감상평을 내놓았다. 조롱까지 곁들여서. 자신은 마음이 생긴 이성을 상대로 추잡한 상상이나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셔츠 소매를 잡히거나 입술이 반짝거릴 때도 마음 억누르기 바빴는데. 널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이미 넘쳐서 망망대해를 떠돌고 있는 감정이 더 요동치는듯했다.
“뭐, 그러니깐 제가 적어놓았던 개인적인 코멘트 같은…….”
조마조마하며 설명을 이어 가던 도아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한 저 표정. 한시우는 분명히 메모장을 봤다. 확신할 수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만남은 여름의 절정인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저 분위기는 자신의 속을 살살 긁으며 바짝 약 올릴 때 나오는 얼굴이었다. 평소보다 좀 야해 보이는 건 자신의 마음 때문인 것 같았고.
“아까 고기 맛있게 먹던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난 아주 질겅질겅 씹히던데. 말고기쯤 됐나 봐? 아, 여물 먹었으니 소려나?”
봤구나. 도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불만 가득한 메모 안에서 짝사랑의 감정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어차피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했으니. 지금부터 닥쳐올 갈굼이 미친 듯이 걱정되는 와중에 그거 하나는 안심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이번 일은 누가 봐도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고민 없이 싹싹 빌겠다고 결심하며 입을 열었다. 무릎과 손바닥쯤이야 흔쾌히 내어줄 자신이 있었다.
“다른 할 말은?”
“제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뭐, 나라님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하는 법이니.”
“하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오가 무색해질 만큼 너그러운 태도에 불안한 마음은 더 커져 갔다. 그럼에도 이 대화가 조속히 끝나기를 바랐기에,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상사의 기분을 맞추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도아 씨는 들켰으니 상황이 다르지.”
시우가 거만한 자세로 핸드폰을 세워 탁탁 두드리다 그런 반응은 재미없다는 듯 내려놓았다.
“대표님. 제가 그때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걸 쓸 때마다 미쳐 있었다? 양이 꽤 되던데, 그럼 회사 생활 불가능한 거 아닌가.”
빈정거리는 말투가 도아의 속을 긁을 때마다 원피스 자락을 쥐고 있는 주먹에는 힘이 들어갔다. 차마 타인에게 보스를 흉볼 수 없어 선택한 방법이었다. 누군가와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 역시 없었다. 무엇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감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아뇨. 그게 그렇다는 게 아니고요.”
“그래. 말해 봐. 자세히 설명할 기회를 줄게.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이 일은 없던 일로 해줄 수도 있어.”
설명?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을 뿐. 내 눈에 당신은 그렇게 보였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사실 그렇게 보려고 애쓴 거였어. 당신을 좋아하게 될까 봐. 네가 날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나만 널 좋아하면 너무 슬프잖아? 차라리 방을 나가버리는 게 최선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닙니다. 변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기회를 준다고 해도 챙기지 못할 만큼 모자란 건가?”
자신을 놀리는 짓궂은 눈빛에 도아는 붉게 반짝거리는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대표를 싫어하는 직원이라는 오해를 받는 것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제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몹시 억울했다. 모든 게 엉망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저토록 여유로우니 속에서는 점점 더 열불이 터졌다.
“솔직히 제게 친절하셨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처 주는 말도 많이 하셨고요. 답답해서 쓴 것이었습니다. 공유할 마음은 절대 없었습니다. 지금 상황에 화가 나시면 차라리 그냥 소리쳐서 혼내시고 그에 합당한 징계를 내리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또 메모를 적을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그럴 순 없지.”
“메모를 마지막으로 적었던 것은 한 달 전입니다. 지금은 대표님이 무어라 하셔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가 뭐라고 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시우가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삐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