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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확인 (31/85)

제31화. 확인2022.02.14.

도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일단 자신은 시우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내비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판단했다.

16548717782248.jpg“네. 저한테 물을 뿌리셔도, 화를 내셔도. 저는 이제 아무렇지 않습니다. 제 인생에 영향이 없으니, 메모를 남기는 일도 없을 겁니다. 다시는.”

확인사살까지 해주는 매몰찬 비서.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의 향연이었다. 흥분한 도아가 몸을 씩씩거릴 때마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을 것 같은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목선과 가슴선을 따라 구불거리며 흔들렸다. 느슨하게 몸을 감싸고 있는 아이보리색 옷자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와중에 그 모습이 예뻐 보여, 시우를 더 미치게 했다. 조소 섞인 긴 한숨을 내뱉으며 도무지 정리가 안 되는 머릿속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라는 걸 깨달았다. 비서가 당황한 모습을 적당히 감상하다 내려보내려고 했던 다짐이 허물어졌다. 도아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스스로 자초한 일인 걸 알면서도 이 모든 상황이 불만스러웠다. 관심. 호감. 애정. 사랑. 이런 단어들로 정의 내려진 욕망보다 정신이 우위에 있다고 믿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새까만 눈동자를 맑게 흔들거리는 갈색 눈동자에 맞추니 지금 이 순간 열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시우는 충동적으로 계획을 바꿨다.

16548717782254.jpg“그래. 그렇단 말이지.”

16548717782248.jpg“네. 그러니……. 그냥”

16548717782254.jpg“그다지 합당한 이유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하지?”

하. 진짜 저 인간이. 비서가 악을 쓰며 사죄의 미소를 유지할수록 시우는 재미있다는 듯 더 기운차게 도아를 궁지로 몰고 갔다. 평소보다 유난히 자분거리는 시우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을 훑어보는 표정이 속삭이는 것처럼 간지럽게 느껴져 더이상 대답하기도 힘들었다.

16548717782248.jpg“대표님, 지금 하는 행동이 속 좁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16548717782254.jpg“속이 좁아?”

16548717782248.jpg“네. 죄송하다는 마음을 받아줄 마음 자체가 없으신 거 같은데요. 그냥 대표님 편한 대로 하시죠.”

도아는 평온하지 못한 제 마음을 숨기고자 평소보다 더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16548717782254.jpg“우리 비서님께서 사과하는 것에서 말대답하는 것으로 전락을 바꾸셨나 봐?”

16548717782248.jpg“사과가 안 통하니 이렇게라도 해야죠.”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빗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비서의 카랑한 말대답을 귀담아듣던 대표는 입을 열려다 돌연 멈추었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의 사이로 숨소리와 빗소리가 묘하게 얽혀들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비서가 눈꺼풀을 연거푸 깜빡이는 사이에도, 대표는 제법 긴 침묵을 유지하며 미소지었다. 그러다 툭,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며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16548717782254.jpg“그럼.”

16548717782248.jpg“그럼?”

16548717782254.jpg“이렇게 욕만 하지 말고 한번 가지고도 놀아보지 그랬어.”

겉으로 보기에는 꽤 정제된 말솜씨였다. 시우는 웃었고, 도아는 놀랐다. 이런 말을 내뱉은 이유는 간단했다. 요란스럽고, 복잡했던 시우의 마음이 내놓은 결과가 상당히 허무했기에. 이도아를 안고 싶다. 단 한 번만이라도. 메모장에 한가득 적혀 있는 앙칼진 험담과 조롱이 시우에게 일으킨 파장은 컸다. 내용은 자극적이었고, 들켜버려 당황한 비서는 아름다웠고, 자신의 마음 역시 범주 밖이었다. 그런 상대방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비서는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16548717782248.jpg“네? 대표님을요? 제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과 함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16548717782248.jpg“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16548717782254.jpg“글쎄. 넘어갔을 수도 있지.”

그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넌지시 웃자 도아의 속눈썹이 잘게 떨려왔다.

16548717782248.jpg“왜…… 왜요?”

16548717782254.jpg“예쁘니깐.”

적당히 흔들리던 갈색 눈동자는 이제 정처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은밀한 농담처럼 농후하게 들렸다. 도아의 얼굴 전체가 순식간에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당황한 마음에 쭈뼛거리다 일단 긍정적인 말로 상황을 넘기기로 했다.

16548717782248.jpg“하하. 감사합니다. 한시우 대표님은 비서가 대들어도 예쁘다고 칭찬해주시는……. 몸과 마음이 아주 훌륭한 분이십니다. 제가 그것을 미처 몰라보았습니다.”

16548717782254.jpg“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는지?”

정신 나간 대답을 듣고 시우가 인자하게 싱긋 웃어 보였다. 능청스러운 질문에 비서의 속이 버쩍 타들어 갔다.

16548717782248.jpg“그러게요. 저도 모르게 궁금해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니 아니,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떠올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 미치겠네. 뭐 이딴 말을 주절이고 있는 거야. 뒤늦게 자신이 내뱉은 말이 괴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다행히 시우는 별로 동요하지 않는 듯했다.

16548717782254.jpg“그러고 보니 내 몸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흐릿하게 떠오르는 메모의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16548717782248.jpg“그……. 메모를 열심히 보셨나 봐요.”

16548717782254.jpg“봤지. 아주 꼼꼼히.”

내가 왜 그런 말들을 적었을까. 지난 날이 후회가 되어 한겨울 파도처럼 매섭게 밀려왔다. 미동 없는 검은 눈동자를 볼수록 점점 더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16548717782248.jpg“그, 궁금하다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아름다운 것을 보면 호기심이 생기는, 뭐 본능 같은 거랄까요?”

어떻게든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꺼낸 말은 더 가관이었다. 손안에 잡혀 있는 게 원피스가 아니라 연필이었다면 진즉 부러지고도 남았을 만큼 힘이 들어갔다. 시우는 그것이 재밌는 듯 싱긋 짧게 미소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는 상대방의 표정과 상반되어 더 말끔하고 차분해 보였다. 도아를 떠나지 않던 날카로운 눈동자는 잠시 허공으로 향했다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숨죽여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 같은 비서의 모습에 시우의 얼굴에서 사라졌었던 웃음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16548717782254.jpg“그럼, 확인해봐.”

그리고 점심 메뉴 말하듯 건조하고 담백하게 선고했다.

16548717782248.jpg“네?”

16548717782254.jpg“몸과 마음이 훌륭할 것 같다며.”

판결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죄인의 눈동자는 순수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가 커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초 동안 무슨 상황인지 정리가 안 됐던 도아는 시우의 표정과 상황을 하나씩 되짚었고, 마침내 그 뜻을 알게 되자 경악했다. 온몸이 전체가 파르르 떨려오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제야 자신의 몸이, 감각이, 마음이 왜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한시우의 눈빛이 지나치게 야하다.

16548717782248.jpg“제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대표님이 생각하는 게 다를 것 같습니다만.”

16548717782254.jpg“맞을 거야. 남녀가 확인해 볼 게 뭐가 있겠어.”

풍랑 속에 갇혀 있는 조각배처럼 머릿속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와중에 그가 또 한 번 큰바람을 보냈다. 자신을 놀린다기에는 그의 눈빛에서 미세한 애정이 느껴졌다.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채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미세한 기류를 타고 마침내 결론이 내려졌다. 세상에. 한시우가. 지금. 나를. 유혹하고 있다. 왜?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나를 화나게 만들려는 건가? 날 싫어하면서, 도대체 왜? 도아는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지만, 도무지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런 남자들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순수한 호감이든 끈적한 수작이든 관심을 표현하던 남자들에게 들었던 생각은 하나였다. 난 당신한테 관심 없어. 궁금하지 않아. 그래서 시우의 말을 듣는 순간, 도아는 적어도 자신의 마음은 확실히 알았다. 궁금해. 당신이 날 어떻게 안을지 알고 싶어.

16548717782248.jpg“아, 그게, 궁금하긴 한데요. 아니 아니! 안 궁금합니다. 그냥 저는 얼굴만 보아도 만족합니다. 멋있는 대표님의 얼굴이 저의 기쁨입니다.”

도아는 선명하게 떠오른 실체를 애써 외면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6548717782254.jpg“내 얼굴?”

16548717782248.jpg“네, 대표님 얼굴이 아주 잘생기셨습니다. 포장지를 뜯었는데, 선물이 별로인 경우도 있잖아요. 그것처럼 실망하면 어쩌죠? 하하.”

신이시여. 제 입 좀 어떻게 해 주세요.

16548717782254.jpg“도아 씨.”

16548717782248.jpg“……네.”

16548717782254.jpg“그런 걱정은 쓰레기통에.”

여전히 얄밉도록 탐나는 얼굴과 몸으로 유혹하는 모습에 도아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기 시작했다. 떨리는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16548717782254.jpg“이도아.”

하지만 시우가 이름을 부르자 시선은 홀린 듯 다시 그를 향했다.

16548717782254.jpg“내려가지 마.”

유혹하는 시우의 음성이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달콤한 목소리에 등골이 빳빳하게 경직됐다. 그는 자신의 몸에 손 하나 대고 있지 않은데 포박이라도 된 듯했다. 처음 시우와 정원에서 마주했던 그날처럼. 몸 전체가 파들거리며 서 있기 힘들 만큼 후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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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적이 이어졌다. 맹렬한 침묵 속에서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도아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주시하던 시우였다. 결국 음험한 본능에 졌다. 네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니,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들었다. 비서를 그렇게 몰고 간 것은 자신임에도,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요동치는 눈빛은 빛났고, 변명하는 입술은 곱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홀려 파렴치한 말이 나와버렸다. 도아가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16548717782254.jpg“뭘 그렇게 떨어. 평소엔 잘만 대들면서.”

16548717782248.jpg“제가, 언제 대들었다고 그러세요…….”

16548717782254.jpg“빨리 나가. 메모 일은 없던 일로 할 테니깐. 지금은 나도 지나쳤어.”

시우가 차가운 표정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고 기대 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비서는 이곳에 없었던 것처럼 방을 향해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도아를 대하는 것쯤은 이제 일도 아니었다. 천 회장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평소와 다른 차림으로 인사 했을 때도, 자신의 집에서 무방비하게 잠들었던 비서를 마주한 순간에도, 칭찬 한마디에 눈을 반짝이던 모습에도. 모든 순간을 잘 넘겼으니, 내일도 평소와 같은 태도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었다. 베드룸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유난히 어두워 보였다. 마침 도아의 치맛자락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이곳에서 나가길. 당황한 비서가 괜히 어물쩍거리다 이성 잃은 자신에게 붙잡히지 않기를 바랐다. 예상치 못한 힘에 팔이 붙잡힌 것은 당연히 그녀가 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했을 때쯤이었다. 가느다란 팔에 붙잡혀 순식간에 몸이 돌려져 버린 시우의 눈에 씩씩거리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도아가 들어왔다. 너무 가까워 숨조차 내쉴 수 없었다. 뺨이라도 한 대 내려칠 기세로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그녀였다. 기꺼이 어디든 내어주겠다 생각하며 막 입을 연 순간, 미세하게 떨리는 가는 손가락이 자신의 얼굴을 감쌌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촉촉한 감촉이 불쑥 들어왔다. 상쾌한 향이 시우의 몸을 휘감자 무심히 뛰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침입한 말캉한 촉감은 달콤하게 입술을 핥고 누르다 떨어졌다. 서로의 호흡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부딪쳤다. 여전히 비장한 눈빛으로, 손끝에 미세한 흔들림을 담은 채 그녀가 속삭였다.

16548717782248.jpg“먼저 유혹한 건 당신이야.”

도아의 입술은 가르면 그제야 터져 나오는 과일의 향처럼, 바라만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탐나는 맛이었다. 차갑고 냉랭했던 시우의 표정은 처음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어느새 부드럽고 나른하게 풀려버렸다.

16548717782254.jpg“먼저 키스한 건 너고.”

시우는 파들거리는 도아의 턱 끝을 큰 손으로 다정하게 감싸 쥐며 자신의 입술을 향해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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