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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오늘이 마지막 (32/85)

제32화. 오늘이 마지막2022.02.18.

16548717971048.jpg‘그런 걱정은 쓰레기통에.’

온몸이 후들후들 떨리는 와중에 마음은 설렜다. 화나거나 불쾌하지 않은 저 자신이 낯설고 야만스러웠다.

16548717971048.jpg‘내려가지 마.’

입매는 고상하게 웃고 있었으나 눈빛은 맹수와 다름없었던 사람은 이미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도아의 시선은 아직도 그 얼굴 위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나뭇잎처럼 부들거리는 머릿결, 고요한 조형미가 묻어나는 옆태, 짜증 섞인 표정과 우아한 동작, 무심함을 무기 삼아 애가 타게 만드는 태도, 가끔씩 보이는 다정함.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그런 남자가 저렇게 안아달라고 꼬리를 치는데, 못 이긴 척 휘말린 척 다가가고 싶었다. 후회할까? 그럴 것 같았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그다음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되거나 더 나빠질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지금처럼 일 열심히 하는 비서 정도로 기억되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머리로는 이미 결정이 났지만 좀처럼 입술도 다리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주인의 마음을 몰라주는 사지가 원망스러울 즘, 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48717971048.jpg‘빨리 나가. 메모 일은 없던 일로 할 테니. 지금은 나도 지나쳤어.’

멋대로 흔들어 놓고. 이제는 나가라며 허무하게 대화를 마무리 짓는 그의 말에 흠칫 몸이 반응했다. 이어 무심하게 한걸음 또 한걸음 멀어지는 시우의 모습이 도아의 시야에서 더없이 느리게 재생되었다.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가 하필 메모를 보았고, 자신이 운이 나쁜 순간에 들이닥쳤고, 둘 다 평소와 다르게 이성적이지 못했다. 한시우는 지나쳤다 인정했기에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도아는 그제야 비로소 제 욕망과 마주했다. 후회하고 또 후회할지도 모르는 와중에도 그를 탐하는 마음이 무서웠다. 얕잡고 달려들었다가 상처만 받고 끝날 수 있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은 그냥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마음이 그랬다.

16548717971048.jpg‘그러고 보니 내 몸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흔들리는 정신 사이로 자신을 비꼬던 시우의 대사가 들렸다. 맞아요. 대표님. 난 당신의 몸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그런데, 다른 것에도 관심이 많아요. 그냥 당신의 모든 것에 관심이 가요. 싫어하려고 해도, 관심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내 눈은 당신을 쫓아요. 난 당신을 원해요. 도아는 시우를 향해 걸어갔다. 열감에 사로잡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이. ** 도아의 선전 포고 같은 입맞춤으로 시작된 밤은 부유하는 꽃씨와 같았다. 새파란 하늘 위로 목적지 없이, 그저 바람이 부는 데로 끝없이 올라가는 것. 필사적으로 버티던 이성을 팽개치니 그 자리에 서로를 향한 갈망만이 남았다. 너 때문에 시작된 거라 말하는 와중에도 이미 숨은 가빠지고 가슴은 뛰고 있었다. 창문을 치는 빗소리가 점점 거세지는 사이 도아의 숨결이 시우의 숨결 사이를 파고들었다. 입술 사이로 감겨드는 맛이 황홀했다. 시우는 그 감각에 취해 저도 모르게 그녀를 감싸 안은 오른팔에 힘이 들어갔다. 시우가 밀착해 올수록 도아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몸에서 울리다 못해 방 안 전체를 흔드는 기분이었다. 얇은 옷자락 위로 느껴지는 단단한 시우의 팔뚝은 실수로 안겼던 그날의 감촉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와 몸이 바짝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도 몰랐던 결핍증이 있나 싶을 만큼 애가 타올랐다. 분명 상대는 부드럽게 파고드는데.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촉촉하고 따뜻하던 감촉이 조심스럽게 멀어지는 건, 여기가 어디인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무렵이었다. 분명 거실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밤빛이 스며들었던 복도에 있었다. 물소리. 숨소리. 향기. 감촉. 그를 만나기 전까지 어떠한 감흥도 주지 않던 존재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시우는 도아를 가볍게 들어 올려 큰 창 앞에 자리 잡은 우드 콘솔 위에 앉혔다. 아릿한 정신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마다 시우의 짙고 새까만 눈동자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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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우는 한 뼘 정도 사이를 두고 있는 도아를 향해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목덜미를 매만지던 부드러운 손길이 어느새 과즙을 담은 것 같은 분홍 입술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16548717971073.jpg“왜…… 그렇게 보세요?”

입술을 지그시 누르던 손이 솜털처럼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뒷목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반질거리는 갈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16548717971048.jpg“예뻐서.”

작은 속삭임에 도아는 자신도 모르게 짧게 미소지었다. 그동안 외모에 관련된 칭찬은 스스로에게 큰 기쁨을 주지 못했다. 자신이 노력한 것을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그녀가 좋아하는 칭찬이었다. 분명 그랬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시간들이 송두리째 찢겨나간 듯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이 사람 앞에서는 자신이 생각해왔던 기준이 모두 다 틀어지고 있음을 번연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16548717971073.jpg“그런 말 하는 거 진짜 안 어울리는 거 아세요?”

16548717971048.jpg“그럼 뭐라고 하는 게 어울리는데?”

16548717971073.jpg“봐줄 만하네……?”

비서가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하자 시우가 하, 입매를 늘어뜨렸다. 도아는 그의 품에 묶여 있다시피 했던 가는 팔을 천천히 빼내 얼굴로 가져갔다. 차가울 것 같았던 그의 뺨은 뜨거웠다.

16548717971073.jpg“당신도 예뻐.”

칭찬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자신이 이 사람의 볼을 쓰다듬고, 귓불을 주무르게 되리라는 것을.

16548717971048.jpg“알아.”

웃음기가 촉촉이 스며들어 있는 시우의 얼굴이 매혹적이었다. 도아는 이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후회가 없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촉감은 그의 몸이 뜨겁다고 알려주고 있는데 눈앞에 보이는 눈빛은 한없이 선선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이런 태도에 괜한 오기가 생겨 재수 없다는 욕을 썼던 것도…… 같다.

16548717971073.jpg“왜 메모장 보고 화 안 내셨어요?”

정화과정을 거치지 않고, 생각난 대로 적었던 메모였다. 얼마나 다채로운 내용으로 흉을 봤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는 실수를 했을 때 자신을 몰아세웠던 것처럼 한심하게 내려 보지도, 날카롭게 인상을 쓰지도 않았다.

16548717971048.jpg“맞는 말만 적어놨던데.”

16548717971073.jpg“네?”

16548717971048.jpg“내가 그만큼 마음이 넓다는 소리야.”

16548717971073.jpg“인자하고 너그러우시네요. 몸과 마음이 훌륭하십니다.”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한 대답에 도아도 그에 맞는 답변을 내놓았다.

16548717971048.jpg“하나는 아직 확인을 안 했잖아?”

시우가 가볍게 입술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가 바짝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16548717971073.jpg“아….”

아직 남은 것. 도아는 마른침을 꼴깍 모아 삼켰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에 신경이 모였다. 자신도 그를 만지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도아는 팔을 뻗어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16548717971048.jpg“쓰다듬고 싶어?”

16548717971073.jpg“네?”

뜻밖의 질문에 가는 손가락이 멈추었다.

16548717971048.jpg“부드러운 거 쓰다듬는 거 좋아하지 않았어?”

16548717971073.jpg“어떻게 아셨어요?”

16548717971048.jpg“글쎄. 그냥 그럴 것 같았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도아가 엄마 몰래 과자를 빼내다 걸린 아이처럼 배시시 웃자 그가 강아지처럼 흔쾌히 머리를 숙여주었다. 짝사랑하는 여자의 손길은 남자를 화향에 취해버린 나비와 다름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잠시 나른해졌던 시우의 기분은 시선의 끝에 자리 잡은 농익은 입술을 보았을 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달콤한 과일을 처음 맛본 짐승은 그 과일만을 찾게 된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다시금 그의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참았어야 했는데. 시우의 마음 한편에서는 여전히 후회가 밀려왔지만 제 앞에서, 그것도 저렇게 수줍은 열기를 내뱉으며 웃는 여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입술은 부풀어 올라 있고, 목덜미는 저가 남긴 흔적이 선명했다. 고요하고 매서운 시선을 느낀 도아는 흠칫하며 경계 없이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었다. 아무리 그가 먼저 허락했어도 자신이 너무 버릇없이 행동했나 싶어 긴장하며 고개를 돌려 눈빛을 피했다.

16548717971048.jpg“이도아.”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서, 가슴을 더 깊게 울렸다. 이어 큰 손이 도아의 턱을 움켜쥐며 제 쪽으로 다시 돌렸다.

16548717971048.jpg“날 봐야지.”

다정하게 명령하는 태도에 적당히 두근거리던 심장이 다시금 요란해졌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입맞춤은 처음보다 더 집요하게 서로를 탐했다. 두 사람 주변으로 습하고 후덥지근한 열기가 채워졌다.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너무 아찔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온몸이 흔들거리기도 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시우는 도아가 도망가지 않을 걸 알면서도 더 단단히 안았다. 싱그럽던 열매를 다 먹었는지, 시우의 고개는 다른 곳을 향했다. 견고한 가구에서 나오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젖은 숨소리 위에 얹혀졌다. 도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이것이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메마른 이성을 가진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집요하게 매달리는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날 사랑하는 걸까? 아니겠지. 자신을 보는 눈빛이 너무나 깊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면 그 누구라도 믿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이 슬프고 쓸쓸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자 눈동자가 실없이 젖어 들었다. 복잡한 마음이 요란스러웠음에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시우역시 참을 수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도아를 콘솔에서 끌어 내렸다. 부드러운 손길에 발끝이 곱아들고, 허리가 휘었다. 고개를 젖힌 도아는 먼발치에서 날아온 빗줄기가 물방울이 되어 영롱하게 반짝이는 장면을 아득하게 응시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도아의 모습에 시우의 표정 역시 더는 여유롭지 못했다. 핏줄을 타고 퍼지는 열기를 더는 감당하기 힘들어진 그가 셔츠를 벗어 던지곤 도아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잠시 허공을 향했던 말간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애가 타 보이는 검은 눈동자와 커다란 몸이 적나라하게 시야를 채웠다. 부드러운 근육질 상체가 옅게 스며든 빛을 받아 탐나는 윤곽선을 만들었다. 이성 따윈 말살된 지 오래였다. 그의 손길에 살결이 빳빳하고 민감해져 갈수록 심장의 떨림과 울림은 정상범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툭, 어루만지던 행동이 멈췄다. 살살거리는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자, 젖은 듯한 음성이 나직하게 권유해왔다.

16548717971048.jpg“침대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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