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2022.02.21.
시우의 속살거림에 도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
알았다 대답을 하려던 마음과는 달리, 도아의 눈동자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흐릿해졌다. 이어 온몸을 바들거리면서도 시우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도아가 숨을 색색거리며 잘팍 주저앉았다. 그가 붙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고꾸라지듯 넘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괜찮아?”
“대표님……. 제가,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
누가 보면 마라톤이라도 완주한 듯, 힘들게 숨을 몰아쉬며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모습이 뙤약볕 아래 꽃처럼 가녀렸다. 시우는 더이상은 무리라며 주저앉아 버린 도아를 다소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매우 짧았다. 이내 허탈한 웃음을 머금은 채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곤 눈을 맞추었다.
“도아 씨. 너무 잔인한 거 아냐?”
장난스러운 질문과는 다르게 코끝을 톡 치는 손짓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네……. 저도 아는데요. 저도 왜 이렇게 몸이 갑자기 떨리는지…….”
도아는 차마 상대방을 바라보지 못한 채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시선을 밖으로 빼며 죄인처럼 대답했다. 이제라도 되돌려보고자 허물어져 가는 몸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후들거리는 몸에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먼저 달려들어 놓고 맥없이 주저앉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오늘 일정이 힘들긴 했지만, 키스 좀 나눴다고 이렇게 된 모습이 너무 창피해 온몸은 붉게 달아올랐다. 네가 너무 집요하게 밀어붙인 탓도 있지 않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그 진동을 따라 촉촉한 머리칼도 일정하게 움직였다. 그 흔들리는 불온한 시야 속에 시우의 단단한 몸이 보여 도아는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검디검은 세상 속에 자신이 좋아하는 목소리가 산들바람처럼 들려왔다.
“괜찮아. 오늘 일정이 고단하긴 했지. 쉬는 게 좋겠어.”
칭찬이라도 하듯 두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던 손은 어느새 몸으로 내려와 도아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어어? 대표님!”
당황한 입술이 그를 불렀지만, 이미 의지와 상관없이 두 다리가 카펫에서 떨어진 후였다.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부축만 해 주세요!”
“어색해?”
“네. 어색해요.”
새하얀 양팔을 시우의 목덜미에 감싼 건 몸을 지탱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누가 보면 처음인 줄 알겠어.”
“네?”
흔들거리던 도아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처음……. 맞는데요?”
앞을 향하던 고개를 휙 돌려 질겁한 눈동자로 되물었다.
“우리 집에서 잠들었을 때, 누가 옮겼겠어.”
“그건, 제가 찾아갔다고 하셨잖아요!”
“그걸 믿었어? 그날 내가 옮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저 별로 안 무거워요! 그렇게 무거우면, 그냥 내려……주세요!”
“움직이지 마. 힘들어.”
도아가 몸을 틀며 발을 휘저으려 하자 시우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썼다.
“이제 힘이 좀 돌아왔어? 난 기다릴 수 있는데.”
“대표님!”
시우의 말장난에 도아는 이만 저항을 포기했다. 톡톡 풀어져 있는 자신의 앞단추를 보고는 불현듯 부끄러움이 밀려와 고개를 단단한 목울대에 파묻었다. 여유로운 태도와 다른, 시우의 요란한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서로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엇갈리는 가운데, 풀향기처럼 상쾌한 여름의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
“고모 왔어?”
소파에 널브러져 TV를 보던 주혜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후다닥 달려나갔다.
“그래. 우리 예쁜 강아지!”
민 팀장이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리자, 주혜가 쪼르르 품에 안겼다.
“자주 좀 놀러 와!”
“요즘 고모가 좀 바쁘잖아.”
“왜 멀쩡히 다니다가 이직하려고 하는 거야? 월급도 많이 주잖아. 그냥 여기 있어. 고모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든든한데.”
민 팀장은 조카의 애교와 투정이 익숙한 듯, 어깨를 토닥였다. 품에서 빠져나온 주혜는 그녀의 두툼한 검지를 잡고 소파로 끌고 왔다. 손에 묻은 과자부스러기를 쪽쪽 빨며, 며칠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거렸다. 선배 누가 자기에게 일을 떠넘긴다든지. 1호점에 취재를 하러 갔었는데, 그곳 직원 한 명이 자기에게 반한 것 같다든지.
“그런데 고모. 나 언제 전략팀으로 갈 수 있어?”
주혜는 나름 눈치를 보며 참았던 질문을 꺼냈다. 똘망한 조카의 눈동자 위에 서늘했던 시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승인이 안 나서. 아직 어려울 것 같아.”
“하. 진짜. 전략팀에 가야 사람들이 부러워한단 말이야. 이도아가 거기 갔을 때 우리 동기들이 부러워하던 거 생각하면, 지금도 배 아파!”
볼을 부풀리고는, 무릎 위에 놓인 쿠션을 팡팡 두드렸다.
“거기도 그냥 회사일 하는 곳이야. 다 똑같아.”
“그 언니 비서 일도 좀 하나 봐. 비서실 내가 갈 걸 그랬어. 그럼 내 애교로 지금쯤 대표한테 엄청 사랑받고 있겠지?”
“아이고. 이도아 물벼락 맞았다고 좋아했던 거 잊었어? 거기는 호랑이굴이야. 우리 토끼 같은 주혜는 너무 힘들어.”
“그래도. 짜증 나.”
민 팀장의 눈에는 조카의 철없는 투정도 한없이 귀엽기만 했다.
“고모가 재밌는 소식을 들었어.”
“뭔데?”
“본사에서 사람이 새로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헨리 마커 대표 옆에서 몇 년 일한 사람인가 봐.”
“그게 왜?”
“본사에서 굵직한 업무를 책임지던 사람이 여기 와서 직원하고 있겠어? 대표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얘기지.”
“진짜? 그럼 이도아 헛수고하고 있는 거네?”
자상한 위로에 주혜는 기분이 풀린 듯 아까보다 환하게 웃었다. 조카의 말이면 끔뻑 죽는 민 팀장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한없이 귀여운 행동이 자칫하다 화를 부를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민 팀장이 푸근하게 웃자 눈가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 도아가 눈을 뜬 건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선명하고,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온 깨끗한 새소리가 울려 퍼질 즘이었다. 시우는 없었다. 눈꺼풀을 겨우 올려 이곳저곳 살폈지만, 그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느낀 허무함은 생각보다 컸다. 몽롱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도아가 힘들게 걸어가 커튼 끝을 잡아 밀자 상쾌한 아침 빛이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창백하고 단아한 얼굴 속에서 눈동자가 맑게 반짝거렸다. 아직 다 깨어나지 않은 뿌연 정신 사이로 어제의 기억이 가만가만 고개를 들었다. 지난밤, 자신이 온몸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입맞춤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되살아난 시우의 눈빛, 감촉, 소리 하나하나가 화살처럼 온몸을 자극했다. 어느새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래. 차라리 없는 게 다행이야.”
정신없이 중얼거리며 머리를 대충 손 빗질하고, 챙겨야 할 물건과 오늘의 일정을 빠르게 생각해냈다.
“내려가야지.”
막 손잡이를 잡아당기던 몸이 굳어버린 건 멀리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였다. 분명 닫아두었던 방문이 한 뼘만큼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한 시우는 거실로 향하던 몸을 자연스럽게 틀어 방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시우의 발걸음 소리에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도아는 침대 프레임에 발뒤꿈치가 부딪히며 시트 위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속박하는 것도 없는데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었다. 오도카니 앉아 가까워지는 소리를 들으니 온몸이 비틀려 왔다. 절대 동요하지 않으리라 전의를 가다듬고 있는 사이, 마침내 문이 열리고 시우가 환한 빛을 받으며 잘난 얼굴을 내보였다.
“벌써 깼어?”
눈이 마주치는 찰나 잠깐의 정적이 흐르긴 했지만, 시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별다른 감정 없이 물어왔다. 어젯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단정하고 고고한 모습으로 선선히 걸음을 옮기는 태도에 도아는 그만 전의를 상실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 구김 없는 와이셔츠와 슬림핏 정장 팬츠, 굵은 뼈마디에 자리 잡은 손목시계. 그 어디에도 욕망에 휘둘린 채 자신을 끌어안던 남자의 흔적은 없었다.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자신이 맥없이 주저앉지만 않았다면, 그가 조금 더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다면 아마 서로 실오라기 한 올 없는 몸을 맞대고 끌어안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 기세라면 밤새도록.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도아만이 지난 밤의 기억이 꿈이 아니었다 일깨우는 산물이었다.
“더 자도 되는데. 아직 시간 여유 있어.”
그가 창가 쪽 테이블 위에 종이 쇼핑백을 내려놓고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시우의 걸음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움직이던 도아는 아예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긴장한 채 몸을 틀은 덕분에 어깨가 뻐끈하게 걸려와 으, 소리를 내며 미간을 구겼다.
“아직 몸이 안 좋아?”
도아가 인상을 쓰자 시우가 여유 없는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뇨. 괜찮아요.”
비서가 단정하게 손을 들어 보이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만들어 재차 상태를 확인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움직여서 그래요. 어디 다녀오셨어요?”
미소 섞인 질문에 시우 역시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 얄미울 지경이었다.
“아침 먹을 정신은 없을 것 같아서. 비서님께서.”
시우의 시선이 하얀 종이 쇼핑백을 가리켰다가 다시 도아를 향했다. 사랑 따윈 없는 하룻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그렇게 정해진 것을 알고 있었다. 도아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 앞에 있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손끝은 비틀리고 가슴은 팔딱거렸다. 가벼운 대화와 눈 맞춤에도 모든 것이 낯선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비서를 보며 시우는 짧은 한숨을 흘렸다.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으니 카페에 내려가 있을게. 천천히 준비해.”
“아닙니다! 그냥 여기 계세요.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평소와 다름없어서 낯선 시우의 표정에 흠칫 놀란 도아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단정하게 웃어 보이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쇼핑백도 야무지게 집어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천 회장님 약속은 12시이니 11시 30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할 말은 다 하며 생쥐처럼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타다닥 걸어가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지난밤 스위트룸 문을 열어젖히던 만큼이나 다급한 모양새였다. 도아가 나간 자리를 한참 동안 응시하던 시우는 그녀가 누워 있던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손바닥으로 새하얀 시트를 찬찬히 쓸었다. 천진한 새소리가 방 안에서 잠잠하고 맑게 울려 퍼졌다. 눈꺼풀을 가볍게 내리고 손끝에 집중했다. 아직 남아 있는 온기를 느끼며, 어젯밤은 황홀한 형벌을 받은 것 같다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들어 짧게 조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