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여기 있을게2022.02.25.
천 회장은 매우 골똘히 관찰하고 생각했다.
“이상하단 말이야. 분위기가.”
와인 디캔터를 들고 오던 그녀의 오래된 수행비서는 그 말을 들었으나 눈치껏 모른 척했다. 우리 회장님이 또 무슨 계획을 세우셨구나! 정도에서 생각을 멈추었다. 요트의 선수에서 난간을 잡고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는 한 쌍의 남녀. 어제저녁 계획한 대로 아주 만족스러운 그림이었다. 다만 둘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뀐 것이 거슬렸다. 비서가 대표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깔끔하고, 자연스러웠다. 어제처럼 뭔가 삐그덕 거리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연극처럼 반듯한 모양새였다.
“혼났나? 그래서 군기가 바짝 들어간 건가?”
눈매를 좁히며 시우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비서를 향한 적당히 부드러운 표정은 화를 낸 사람 같지는 않았다. 결국, 천 회장은 도움을 청했다.
“김 비서가 보기에는 어때? 저 둘 분위기 말이야.”
“매우 좋아 보입니다.”
“그래? 그게 끝이야? 노안 온 거 아니야?”
“저 아직 시력 좋습니다.”
“잘 봐봐. 어제랑 좀 다르지 않아?”
천 회장에 닦달에 김 비서가 힐끗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사랑싸움이라도 했나 보죠.”
천 회장과 함께한 지 30년이 된 비서는 죽마고우나 다름없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잔을 채웠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자네는 다 좋은데, 감성이 너무 부족해.”
“언제는 적당히 둔해서 일하기 편하다고 하셨잖습니까. 회장님.”
“원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거야. 리라가 이런 건 기가 막히게 잘 알아보는데. 걔가 사귀는 것 같다고 말하면 백 프로야.”
눈을 가늘게 만든 채 비서가 따라준 쌉싸름한 포도주를 음미하는 사이 도아가 멀리서 천 회장과 눈을 맞추었다.
“회장님. 돌고래 안 보셔도 괜찮으세요?”
“난 물고기는 너무 봐서 질렸어. 두 사람 핑계 대고 바다 위에서 술 마시러 나온 거니 편하게들 구경해.”
천 회장이 키들거리며 와인잔을 들어 보이자 도아는 안심한 듯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잔잔하게 넘실거리는 바다는 유독 푸른빛이 선명했다. 발아래로 열댓 마리의 돌고래들이 기분 좋게 유영을 즐기며 환상적인 즐거움을 선사했다. 따스한 햇살 속에서 물결 위로 튀어 오르는 천진난만한 모습 덕분에 도아는 심란했던 마음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수족관에서만 봤었는데, 이렇게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네요.”
“거북이가 더 신기하지 않아?”
“왜요?”
“오래 살잖아.”
시우의 이야기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그는 입꼬리를 조금 올리며 웃다가 시선을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 맞추었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도아의 진갈색 머릿결을 물결처럼 흔들었다. 나풀거리는 움직임은 시우의 단정한 옆얼굴로 시선을 옮기게 했다. 힐끗 그를 곁눈질 하자 오전의 기억이 야금야금 떠올랐다. 쫓기듯 자신의 방으로 내려온 후 허겁지겁 샤워를 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두드리며 나왔을 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고요하던 눈동자가 흔들린 건 포장되어 있던 종이 용기를 열면서였다.
‘이게 뭐야.’
신선한 야채와 견과류, 스크램블과 소시지, 그리고 메이플 시럽이 먹음직스럽게 뿌려진 수플레 팬케이크까지. 자신이 가고 싶다고 말했던 브런치 가게의 메뉴였다.
‘한시우. 진짜. 나보고 어떡하라고.’
자신을 가지고 놀고 싶은 거라면 이미 성공했다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온통 그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무 포크로 폭신하게 부풀어 있는 케이크를 잘라 입속에 넣었다. 어젯밤의 기억처럼 달콤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해보자 다짐하며, 발코니로 나와 자신의 발아래에서 평화롭게 흔들거리는 나무와 정원 너머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고요한 장면 위로 돌고래가 튀어 올랐다. 신이 난 돌고래는 도아의 뺨에 시원한 물방울을 튀기고는 빙글빙글 돌며 웃었다. 어제는 그 난리를 치더니 오늘은 거짓말처럼 날씨가 눈부시도록 좋았다. 얽혀버린 감정은 이곳에 두기로 다시 한번 마음을 먹으며 입을 열었다.
“돌고래가 꼭 춤추는 거 같아요.”
“칭찬이라도 해줘. 그럼 더 잘 춰 줄지도 모르잖아.”
“꼭 저 같네요.”
도아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단점을 드러내서라도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제 모습에 픽 웃음이 나왔다.
“응?”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라는 말 아세요?”
“알지.”
“저는 그 문구를 처음 들었을 때 제 이야기 같았어요. 조련사가 3톤 가까이 되는 범고래를 움직일 수 있는 건 무한한 칭찬 덕분이라고 하더라고요.”
도아는 자유롭게 춤추는 돌고래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이 가게 일 때문에 바빠서 저한테 신경을 많이 못 쓰셨는데, 가끔 칭찬받으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더 노력하기도 했고. 아마 제가 돌고래였음 저런 모습이었을 거예요.”
“어린 이도아는 칭찬이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이 필요했겠네.”
시우가 작게 흘려보낸 예리한 대답에 도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적당한 성취감과 원동력 정도로만 이용되어 왔던 칭찬이었는데 그 앞에 있으면 꼭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내가 한시우에게 원했던 건 칭찬이 아니라 사랑이었구나. 그 이유를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도아의 침묵으로 시작된 정적은 돌고래무리가 멀어져 갈 때까지 이어졌다. 점점 높아지는 해가 환한 빛으로 바다를 더 짙푸르게 만들었다. 그림 같은 풍경 위로 시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어제 일, 후회해?”
단조롭고 깔끔한 질문이었다. 그럴 리가요. 덫을 치듯 끌어당긴 건 시우였지만, 결국 마지막에 달려든 것은 자신이었다. 일 잘하는 비서는 무슨. 마음이 더 커져 버린 것이 문제였지 후회는 없었다.
“아뇨. 전혀요.”
도아는 백 번 같은 순간이 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란 걸 알았다.
** 도아를 향하는 깊고 검은 눈동자는 어느새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요란하던 비는 그치고, 곤히 잠든 숨소리가 시우의 귓바퀴에서 살갑게 옹알거렸다. 비서는 침대에 눕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듯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을 파르르 떨었다. 물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 시우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이러려던 게 아닌데.’
‘알아. 피곤한데, 긴장하면 그럴 수 있어. 어지간히 떨리셨나 봐. 우리 비서님이.’
‘별로 안 떨었는데요.’
‘그래. 알았어. 아주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고 해 줄게.’
도아는 더 말하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휙 돌렸다. 시우는 붉게 물들어 있는 귓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부드럽게 짚었다.
‘열은 없고.’
뒤이어 손목도 주저 없이 가져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렀다. 빠르고 일정하게 운동하는 작은 맥박의 움직임이 귀여웠다.
‘심박수도 뭐. 이 정도면.’
여전히 자신을 보지 않는 비서에게 느긋이 말하는 와중에도 몸은 열감이 가득했다. 이대로 잠들게 둘지, 기다렸다가 다시 저 품으로 파고들지. 이미 답이 정해진 의미 없는 고민을 하며 발코니 문을 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자신은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던 도아가 옷자락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나가시려고요?’
맥없이 붙잡힌 자신의 옷을 한 번, 치켜올린 눈동자를 한 번. 가만가만 상황을 되짚던 시우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신을 다시 봐준 얼굴이 예뻐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가. 여기 있을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진정된 숨소리가 방 안을 채울 때까지, 시우는 다정한 눈빛으로 배려심 없이 잠들어버린 여자를 가만히 소중하게 바라보았다. 가지런하게 휘감겨 있는 머릿결, 끝이 가볍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 얄쌍한 코와 촉촉한 입술까지. 포근한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도아가 죽을 들고 찾아왔던 날의 잔상이 알싸하게 스쳤다. 비서의 당찬 포부에 못 이겨 소파로 오게 된 자신은 약 기운이 도는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평소였다면 그 정도에 잠들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부작거리며 움직이는 도아의 부드러운 기척이 좋았다. 개인적인 공간에 누군가 들어와 있는 것이 거슬려야 하는데 나무 곁에서 휴식을 취하듯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평온함에 사로잡혔다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비서의 어깨에 기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노트북을 꼭 껴안은 비서의 모양새가 제법 재밌었다. 꽃도, 나무도, 생기도 없는 집에 뭣도 모르고 둥지를 튼 꿀새가 따로 없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빌딩의 불이 거의 다 꺼져 있을 정도로 늦은 시각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얄팍한 달만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제 몸에 덮여 있는 겉옷을 확인한 시우는 별다른 고민 없이 도아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끄응, 잠투정을 하며 경계심 없이 그의 몸에 바짝 기대었다.
‘하, 진짜.’
손등의 실핏줄이 선명해졌다. 긴 한숨을 내쉰 시우는 복도를 지나 문을 밀고 도아를 침대에 눕혔다. 모든 행동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잠시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잠든 모습을 살폈다. 손을 뻗지는 않았다. 숨소리마저 유혹처럼 느껴질 정도였기에 저가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욕망에서 벗어나려 이만 자리를 떴다. 테라스로 나와 후덥지근한 바람을 아주 오래도록 맞았다. 그런 밤이었다. 지금,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도아의 모습이 그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은 이번엔 시우가 손을 뻗었다는 것이었다. 의자에 앉아 보드라운 두 뺨과 머리칼을 하나하나 만지며 손끝으로 기억했다. 잠잠해졌던 마음이 다시금 일렁이고, 도아를 안는 순간 며칠을 갈증에 허덕인 사람마냥 집요하게 달려들었던 하찮은 자신이 떠올랐다. 스스로도 낯선 모습인데 비서는 오죽할까 싶었다. 부드러운 간질거림에 몸을 뒤척이던 도아는 결국 잠결에 그를 불렀다.
“으음. 한시우.”
봄바람 같은 속삭임에 시우가 시선을 그녀의 입술에 맞추었다.
“그만해. 나 졸려.”
도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입술만 달싹 움직여 본론을 건성으로 내뱉었다. 짧은 한마디가 끝나자 다시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고삐가 풀려가는 이성을 잡기에 충분한,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명령이었다.
“그래.”
아무 일 없었던 듯 아이처럼 다시 잠든 도아를 바라보며 시우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 냉기 담긴 바람이 닿지 않도록 잘 덮어준 후 토닥였다.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은 넘치는 달빛을 미처 가리지 못하고 밝게 물들어 있었다. 푸른 어스름은 하얀 침대를 아름답게 비추었다. 이렇게 깊게 누군가를 원하는 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려웠다. 슬프게 우는 어린 자신의 모습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쓰러지는 나약한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