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고민2022.02.28.
시우는 도아의 얼굴에서 머물던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응접실에서도, 자신의 방에서도. 이런 편안한 숨소리가 편안하면서도 낯설었다. 혼자서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어머니가 무서워졌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기계들과 굵은 호스들도 섬뜩했지만, 삶에 대한 미련을 놓은 채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는 모습이 낯설고 끔찍했다. 그러나 어린 시우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무서워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죄책감으로 다가왔기에. 집을 나가 어머니를 보고 온 날 놀랍도록 성숙한 모습을 보인 시우였기에 어른들은 더 자주 면회 자리를 만들어 주곤 했다. 부모가 어떤 모습이어도 아이는 맹목적으로 부모를 사랑할 거라 생각한 어른들의 성숙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엄마. 오늘 월튼이랑 축구를 했는데 내가 이겼어요. 월튼은 다음 달에 이사한다는데 너무 아쉬워요.’
‘내가 좋아하는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예뻐요.’
시우는 그때마다 두려운 마음을 숨기며 꿋꿋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웃었다.
‘엄마, 나 보여요? 내 이야기 들려요? 엄마.’
왜 숨도 제대로 못 쉬는지, 왜 하필 우리 엄마가 손 하나 꼼짝하지 못하게 되는 불행이 왔는지. 사람에게 이런 일이 흔하게 발생하는 건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의문들이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어린 가슴 깊은 곳에 생채기를 냈다. 그렇게 속이 문드러지는 사이 계절은 바뀌고 어머니는 떠났다. 그 후, 시우는 습관처럼 아버지에게 아픈 곳은 없는지 물었다.
‘아빠는 건강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한지섭은 아들의 손을 잡으며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나 몇 마디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아이를 보듬어 주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에이치 퍼니처의 사업이 확장되며 경쟁사와의 갈등이 생기고, 그에 따른 성장통이 심해졌다. 그는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 아들의 잠든 모습만 겨우겨우 들여다보았다. 그 사이 시우는 혼자서 상처를 어설프게 덮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여름방학을 맞아 학교에서 캠프를 떠났던 어느 날. 친구들과 강당에서 블럭 조각을 쌓고 늘어놓으며 웃고 떠드는 사이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져 왔다. 어린아이였던 시우는 자세한 설명은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원래 몸이 안 좋았고, 운이 나빠 이렇게 되었다는 설명만이 전부였다. 아빠가 아팠다고? 엄마처럼? 그렇게 무섭게? 12살. 시우에게 죽음이 완벽하게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세상에는 나무나 거북이처럼 오래 사는 존재도 있지만, 손가락 열 개 펼치고 세 번, 네 번 외친 만큼만 살다가는 존재도 있다. 우리 부모님처럼. 나도 곧 그렇게 될 거야. 12살의 한시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내면에서 쌓여버린 슬픔과 두려움은 결국 커다란 뱀이 되어 마음 한구석에 꽈리를 틀어버렸다. 다행스럽게도 기억은 무한하지 않았다. 한시우는 시간이 흘러 적당히 차갑고, 단정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유년 시절의 아픔은 어린 시절의 투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부모님처럼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이 되어 보겠다고 결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의대에 진학 후, 죽음의 문턱을 앞에 둔 사람들을 보았을 때 유한했던 기억은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공포가 되어 찾아왔다. 몇 년 만에 날카로운 눈을 치켜뜬 뱀은 몸속 뼛속을 무자비하게 기어 다니며 시우를 괴롭혔다. 그때 알았다. 자신의 기억은 썩지도 흐르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숨을 쉴 수 없었고, 두 다리는 무너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병원에서는 어머니의 병이 유전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쯤부터였던 것 같다. 자신이 부모의 나이가 될 때쯤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좀먹어 갔다. 공황은 심해졌고, 일상생활 또한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를 보듬어줄 가족은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쯤. 자신처럼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떤지 묻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이치 퍼니처에 입사했을 당시 한시우가 한지섭의 아들인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뛰어난 심미안과 재능을 인정받아 사원대표로 핸리마커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의 존재가 드러났다. 그렇게 그의 인생은 겉보기에는 성공 궤도에 올라와 있는 사람처럼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부모님과 같은 나이가 되어갈수록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처방받은 약 없이는 버티기 힘든 시간은 몇 년 동안 이어졌다.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9살에 시작되어 성인까지 이어진 시우의 확고한 세계는 너무도 단단했기에 치료 역시 결국엔 제자리걸음이었다. 성공을 해도 찾아오는 공허함에 익숙해져 갔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포기했다. 그 후로는 이렇게 살아도 지낼 만하다며, 일이 우선이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처럼 죽어가다 고통 없이 끝났으면. 지난 겨울, 떨어지는 흰 눈을 보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다. 그래서 도아를 보고 눈길이 갔던 순간에도, 마음이 커지는 걸 알아차린 순간에도 굳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우위에 두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삶은 이제 곧 끝날 것이고, 운이 좋아 조금 더 산다 하더라도 이따위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병신에게 연애 놀음은 사치였다. 무엇보다 여태껏 이성에게 향했던 욕망이 정신보다 우월했던 적은 없었다. 상대는 애가 타 안달이 나 보이는데, 자신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늘 그랬다. 그래서 자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 자꾸만 마음이 풀어지고 늘어졌다. 입을 맞추고, 품에 안고 그것만으로도 너무 황홀해 그동안 고민했던 것이 의미가 없어질 만큼 하찮다고 느껴졌다. 차라리 이 아름다운 비서가 자신을 이용해 적당히 즐길 심산이라면 기꺼이 다 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도아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면. 혹여, 자신이 부모님처럼 갑작스럽게 병이 발병하면. 그러면 자신과 같은 상처를 그녀에게 주는 게 되지 않을까. 내일 아침, 내가 아무 일 없이 대하는 것과 연인이 되어 사랑하다 떠나는 것. 무엇이 너의 가슴을 덜 아프게 할까. 시우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하늘은 파란 잉크에 하얀 물감 한두 방울 떨어진 어슴푸레한 새벽 빛깔로 변해 있었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도아의 뺨에 도장을 찍듯 입을 맞추며 인사를 건넸다. 아침 햇살에 그녀가 깨지 않도록 커튼을 치고 고요한 눈빛으로 방을 훑은 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으며, 다시는 오늘처럼 마음을 내비치지 않겠다 결심했다. ** 매마른 기억 위로 도아의 야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전혀요.”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떨림 없는 갈색 눈동자가 단호한 아우라를 풍겼다.
“어제 일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아무 일 없었듯이 지내고 싶습니다.”
도아는 간결하고, 꿋꿋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분히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발언이기도 했다. 시우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무심하게 행동할 리 없었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저 조금 긴 키스였을 뿐이었다. 서로의 살갗이 생생하고 그 소리와 눈빛이 선명하지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아는 그랬다.
“가지고 놀아도 될 텐데?”
비장한 대답을 들은 시우가 선선히 입매를 올렸다.
“또 그 소리세요? 술도 안 드셨으면서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허무한 내용에 도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당신은 그 정도 마음이었구나. 분홍빛 입술을 꾹 눌러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서운함을 막았다.
“이 비서, 한 대표. 이리 와서 점심 먹어.”
때마침 멀리서 둘을 부르는 천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회장님!”
도아가 천 회장을 향해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어 먼저 가보라는 시우의 눈짓을 읽고는 망설임 없이 음식이 가득 차려진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시우는 한동안 바람이 흔드는 파란 바다를 응시했다. 밤을 지새워 내린 결론과 비슷하게, 아무 일 아니었던 것처럼 마무리되었다. 차라리 어젯밤 끝까지 갔으면, 비겁하지만 그것을 핑계 삼아 질척거려 볼 텐데. 비서가 자신을 한없이 가볍게 대한다면 바보처럼 놀아날 텐데.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몇 가지 가정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의 감정은 이제 쉽사리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몇 달을, 몇 년을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다보면 욕심은 허무할 정도로 옅게 희석될 것이었다. 잘된 일이었다. 푸른 바람이 여름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
“대표님. 천 회장님이 계속 부르십니다.”
어둠 같은 생각에 가만히 묻혀 있던 시우를 도아가 불렀다.
“알겠어.”
서늘하게 고개를 끄덕인 시우는 도아를 따라 치즈, 브루스게타, 조각 피자, 오븐에서 구워낸 고기 요리가 가득 세팅된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한 대표. 피곤해? 어제 뭐 했어?”
시우가 자리를 잡자 와인잔을 건네며 천 회장이 물었다.
“일하다가 잠잔 게 답니다.”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맞는 말이었다. 능청스런 대화에 목이 타는 것은 오로지 도아의 몫이었다.
“뭘 여기까지 와서 일하고 그래. 하여간.”
“그러니깐 잘 진행해 주세요. 해외 지점도 함께하면 더 좋고요.”
천 회장은 고개를 숙인 채 음식만 오물오물 씹는 도아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도아 씨는 잘 잤어?”
“네. 좋은 방을 제공해 주셔서 편하게 잤습니다.”
대표의 침대를 밤새 주인처럼 차지한 비서였다. 감사 인사를 누구에게 전하는 게 좋을지 몰라 천 회장과 한 대표를 번갈아 보며 답했다.
“내가 정원 쪽 방으로 준비하라고 했어. 바다만 보이면 밤에 너무 심심하잖아. 조명 덕분에 이국적인 느낌이 났을 텐데, 밤에 봤을 때 예뻤지?”
“네?”
밤에는……. 그곳에서 잠을 잔 것이 아니었기에 뷰가 어땠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 속에 있는 지난밤의 기억은 시우가 전부였다.
“안 봤어?”
가지런히 놓인 과일을 포크로 찌르며 담백하게 되묻는 질문에 도아가 두 눈을 끔벅거렸다.
“못 봤을 겁니다. 저랑 같이 일하다 늦게 내려갔어요.”
“네. 회장님. 제가 바로 잠들어서 야간정원을 못 봤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본 모습도 정말 예뻐서 기억에 남습니다.”
시우가 적당히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자 도아가 허겁지겁 그것을 받아먹었다. 느슨하게 둘을 지켜보던 천 회장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어제와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둘이 뭐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분위기가 이상한데? 실수로 뽀뽀라도 했나?”
늙으면 원래 헛소리도 좀 해도 된다고 결론 내린 그녀가 결국 둘의 이상한 기운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브루스게타를 한입 베어 물었던 도아의 목에 바게트 조각이 탁, 걸렸다. 작게 캑캑거리는 도아에게 시우가 물병을 따서 건넸다.
“회장님. 요즘 그런 이야기 하면 신고당하세요. 전 참고인 조사 별로 받고 싶지 않은데요.”
여유로운 태도로 넌지시 받아치는 시우였다.
“알았어, 인마. 도아 씨. 내가 실없는 소리 했네.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먹어.”
물 한 모금을 꿀꺽 넘긴 도아는 놀랍도록 침착한 시우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앞으로 정말 괜찮을지. 견딜 수 있을지 조금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