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미안해요2022.03.04.
“11시에 1호점 지점장님 방문, 오후 4시에 B회의실에서 온라인 사업확장 관련 발표가 진행 예정입니다. 저녁 세미나는 불참으로 연락해 두었습니다.”
“지점장님 오면 응접실로 안내하고, 4시 발표는 불참. 요약본 올라오면 출력해서 주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도아는 단정한 목소리로 하루 일정을 보고했고, 시우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쾌적한 온도로 맞춰진 집무실은 살살 흔들리는 식물들과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 덕분에 안락하고 평화로웠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지 보름이 지났지만, 그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날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낸 건 다음 날 요트 위에서가 마지막이었다. 파란 하늘과 바다, 눈앞에서 넘실대던 돌고래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기에 정말 꿈이었나 가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저. 대표님.”
“응?”
“이제는 수행 기사를 채용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달부터 장거리 일정들이 많아 직접 운전하시면 업무효율이 떨어질 듯합니다.”
“도아 씨가 운전해주면 되겠네.”
회사 관련 보도자료를 보던 시우가 눈꺼풀을 찬찬히 내리며 픽 웃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며칠씩 소요되는 출장 일정들도 많아서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농담이야. 이제 채용할 때가 됐지. 인사팀에 연락해서 수행 기사 경력직원으로 공고 올리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자신을 보지 않는 대표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또각또각 걸음을 옮겼다. 도아가 몸을 돌리고 나서야 시우는 검은 제 눈동자를 그녀에게로 맞추었다. 자신이 매만졌던 머릿결이 들꽃처럼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시우는 가슴이 아릿해져 더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을 닫고 자리에 앉은 도아는 손을 올려 머리를 짚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덩굴 위에 돌덩이를 꾹 내려놓은 듯 찜찜한 기분이었다. 괜찮아. 내가 선택한 거야. 기대하면 안 돼. 실망할 필요도 없어. 욕심을 한 번 채우니 다시 비워내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다른 사람보다 특별해지고 싶고, 한 번 더 만지고 싶고. 제 마음이 몸집을 불려 나가는 것이 느껴져 너무나 무서웠다. 그리고 시우의 태연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볼 때마다 정말 그날 일을 잊은 듯하여 슬퍼지기도 했다. 후회는 하지 않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제 인생에서 훨씬 큰 영향을 준 사건인 건 확실했다. 겨우 상념을 떨쳐내고 일에 집중하려는 찰나,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떨군 도아는 불만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이 비서님! 오늘 날씨가 무척 더워요. 이따가 택배 가지고 올라갈 때 아이스 커피 사서 갈게요!]
우진은 번호를 알려준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을 해왔다. 불편하다는 뜻을 돌려서 보내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커피는 괜찮습니다. 오전에 손님이 오시니 택배는 오후에 올려주세요]
빠르게 답장을 보낸 도아는 잠시 고민하다 내용을 추가했다.
[오늘 퇴근하고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이 정도면 자신한테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했기에 얼굴 보고 확실하게 입장을 밝혀두는 게 서로에게 편할 것이라 판단했다. ** 도아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창가 쪽에 앉아 있던 우진이 신이나 손을 흔들었다. 근무복이 아닌 카키색 반팔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스니커즈까지 신고 있으니 평소보다 더 어려 보였다. 도아가 음료를 들고 자리에 앉자, 우진은 들뜬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녁은 드셨어요? 안 드셨으면 저랑 같이 먹으러 갈래요? 여기 진짜 맛있는 초밥 가게 있어요.”
용건만 말하고 떠나려던 도아를 천진난만한 웃음이 저지했다. 도아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배가 안 고프다 거짓말을 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손에 들고 있는 빨대로 유리컵 안을 저었다.
“초밥은 주혜가 좋아하니깐 다음에 둘이 가보세요.”
“아, 그러게요. 저번에 옷가게 들렸던 날 일식집 갔는데 잘 먹더라고요.”
“주혜랑 자주 만나세요?”
“네. 동갑이라 많이 친해졌어요. 주혜 씨가 회사 정보통이라 이런저런 이야기도 진짜 많이 해줘요.”
얼음들이 달그락 부딪히며 빙글 돌아가는 소리와 우진의 밝은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도아가 손을 멈춘 건 이어지는 뜻밖의 질문을 들으면서였다.
“며칠 전에 출근 안 하셨던데 출장이라도 있었어요?”
대표의 일정은 공식적인 행사를 제외하면 외부 발설 금지였다.
“아니요. 외근이었어요.”
금요일부터 토요일. 워낙 짧은 출장이었기에 충분히 얼버무릴 수 있었다. 출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떠올랐지만 희미한 웃음으로 기억을 감추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 비서님. 혹시 대표님이랑 같이 출장 가게 되면 조심하세요.”
“네? 왜요?”
소리를 낮추며 제법 진지하게 말해오는 모양새에 도아는 덩달아 긴장하며 되물었다.
“전 전 비서인가? 출장 다녀오자마자 바로 사표 내고 무단결근해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인수인계도 제대로 안 하고요. 소문에 의하면 대표가 치근덕거렸다고 하더라고요.”
우진의 이야기는 너무나 터무니없었지만, 슬프게도 자신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져 흙탕물을 뒤집어쓴 듯한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주혜 씨가요.”
“무슨 소리세요. 그런 분 아니에요.”
“에이, 그거 모르는 거죠. 솔직히 그 얼굴에 그 재력이면 꼬시기만 하면 다 넘어올 텐데.”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한시우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으면서도 자신을 대하는 태연하고도 여유로운 태도가 자꾸만 떠올랐다. 다른 여자에게 그 목소리, 그 눈빛을 보내는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런 건 너무 헛소문이잖아요. 그러면 당사자에게 무례한 거죠. 비서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요.”
“그런가? 뭐, 이런 소문은 그냥 재미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세요. 우리 이 비서님은 예쁘니깐.”
재미라니. 어이없는 마무리가 황당해 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도아는 컵에 있던 얼음을 털어 넣고 아그작아그작 씹었다. 그렇게 네다섯 개의 얼음을 입안에서 없애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이 비서님은 얼음 좋아하시나 봐요. 또 뭐 좋아하세요?”
“네? 누굴 좋아하냐고요?”
“푸하하하. 아뇨. 음식이요. 왜 이렇게 귀여우세요?”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칭찬해주는 사람을 마주 보는 것이 버거웠다. 적의가 없음에도 자꾸만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의 말들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 저는……. 전복죽이요.”
“죽 좋아한다는 사람 처음 봐요.”
“그렇죠. 보통 죽을 말하지는 않죠. 일전에 정말 맛있는 걸 먹었더니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도아의 설명에 우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도 궁금해요. 다음에 저랑 같이 가요.”
“둘이요?”
“네. 우리 둘만.”
그 말을 듣는 도아는 어처구니없게도 시우를 떠올렸다. 저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이 사람이 아니라 시우였으면 좋겠다는 허무한 바람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도아가 결심한 듯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았다.
“우진 씨. 갑자기 이런 말 해서 당황스럽겠지만, 혹시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네.”
“네?”
나름 날카롭게 질문을 한 도아는 너무나 빨리 뻔뻔하게 되돌아온 대답에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관심이 없는데 매일 연락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 그렇죠. 관심이 없으면 연락도 안 하죠.”
단 한 번도 사적인 연락을 하지 않았던 시우가 또 떠올랐다.
“부담스러우세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부담스러워요. 저는 그냥 직장동료 정도로만 알고 지내고 싶어요. 개인적인 연락은 안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부탁드릴게요.”
갈수록 침울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본론을 말했다.
“제가 고백해서 차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고백도 안 하고 차이긴 또 처음이네요.”
“미안해요.”
도아의 사과에 체념한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인 우진이 돌연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런 말 들으면 상처받을 줄 알았는데 저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데요? 저도 좀 신기한데요? 뭐, 계속 보면 이 비서님도 정들겠죠.”
사뭇 가벼운 대사에 도아는 미간을 구겼다.
“우진 씨. 저는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씀드렸어요. 제 의사를 존중해 주시면 좋겠어요.”
“이 비서님. 저도 제 의사를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도아는 틈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우진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내도, 앞에 앉은 사람은 싱글거릴 뿐이었다. 쉽게 끝나지 않을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행동은 결코 좋은 방식이 아니라고 구구절절 설명이라도 해 줘야 하나. 아니면 번호를 차단할 테니 연락하지 말라고 더 단호하게 말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누군가 유리창을 탁탁 두드렸다. 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밖을 향했다. **
“우진 씨! 언니!”
매미 소리가 울리는 가로수길에 주혜가 서 있었다. 작은 주먹으로 유리창을 가볍게 치며 두 사람을 반갑게 불렀다.
“뭐야. 두 사람, 나만 빼놓고! 서운해지려고 해!”
카페 안으로 들어온 주혜가 볼을 부풀리며 애교 섞인 짜증을 부리자 도아와 우진이 귀엽다는 듯 웃어주었다. 찡그렸던 표정을 피고 주변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기려는 것을 우진이 저지했다.
“전 볼일이 끝나서 가려던 참이었어요.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우진은 보안직원 특유의 깍듯한 모양새로 자리를 공손하게 내어주며 빈 컵을 들었다. 그가 주혜와 살갑게 이야기를 하며 재빠르게 멀어져 가는 동안 도아는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시우의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기에 우진의 연락은 오늘 안에 확실히 해결하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타인의 출현으로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미 기회는 날아갔고, 앞으로 우진의 사적인 연락은 대답하지 말아야겠다 결심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우진 씨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다소 심란해 보이는 표정을 찬찬히 살피던 주혜가 대뜸 물어왔다.
“별 이야기는 아니고, 뭐 좀 부탁하려고.”
“무슨 부탁이요?”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추궁하듯 물어오는 질문. 주혜가 이러는 건 익숙했기에 도아는 그저 짧게 웃었다. 도아가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려는 것을 눈치챈 주혜의 표정이 조금씩 냉랭해졌다. 자신과 우진은 이야기가 잘 통했고, 같이 있으면 즐거웠다. 우진이 도아에게 관심이 좀 있어 보이지만 얼마든지 쟁취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퇴근길 카페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더 끔찍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친해진 걸까? 우진 씨는 왜 저렇게 재미있게 웃고 있는 거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당혹감은 질투로, 그러다 분노로 변했다.
“언니, 설마 우진 씨한테 작업 걸려고 만난 거예요? 꼬리 치는 거?”
앙칼진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며 도아를 흘겼다. 자신이 하는 것은 귀여운 질투라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주혜는 결국 그 정도를 넘어서고 말았다.